소설리스트

63화 (63/228)

 동궁전의 새로운 주인.

명종은 중전 심씨를 다독거렸다. 사실 가장 세자의 대리청정을 원하는 것은 명종이었다. 매일 잠을 잘 때마다 내일의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 걱정할 만큼 명종의 건강은 엄청난 업무량으로 인해 나빠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세자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싶지만 명종은 자신이 조선의 군주라는 책임감으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다음날 조회에서 명종은 대소신료들에게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말을 꺼냈다.

"경들도 잘 알겠지만 과인의 몸이 좋지 않아 더 이상 국사를 돌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소. 마침 세자가 총명하고 그 뜻이 깊어서 능히 과인의 일을 도울 만 하니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국사를 돌보게 함이 어떠하오?"

"신 영의정 이준경 아뢰옵니다. 신과 여러 대소신료들도 주상전하의 옥체가 미령하심을 심히 걱정하고 또 걱정하였나이다. 마침 세자저하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명하심을 갖추셨으니 이는 하늘이 주상전하께 내리신 홍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 데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하시옵소서. 전하."

"경들의 뜻도 과인과 같으니 무척 다행한 일이오. 그럼 지금 당장 세자의 대리청정을 준비하도록 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명종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신하들은 즉시 찬성을 했다. 이는 명종의 건강이 눈에 보일정도로 악화된 데다가 명종이 결제가 늦어져서 추가적인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신하들도 많이 고달 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예상보다도 신하들의 열렬한 찬성을 받은 명종은 즉시 도승지에게 명하여 대리청정을 명하는 글을 짓고 세자 균을 부르게 했다.

한편 균은 명종에게 오늘은 동궁전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남는 시간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자신의 직권으로 홍문관(역대자료를 관리하던 관청.)에서 몇 권의 책을 가져와 역대의 기록들을 살피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모른다면 그 문제점을 고칠 수 없다는 균의 생각 때문에 벌인 일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공부를 하는 척해서 세자시강원의 구성을 피해보자는 균의 얄팍한 속셈도 없지는 않았다.

여러 서적들을 읽어본 균은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조선의 현실과 사실에 때로는 한숨을 내쉬고, 때로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면에는 이게 과연 조선인가 할 정도로 좋은 사실도 있던 반면에 어떤 면에는 더 안 좋은 현실들이 들어나기도 하여 균의 인상은 펴졌다가 찌그러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늙어서 주름이 많이 생긴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책에 빠진 균은 천천히 기록들을 검토하며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어 나갔다. 한참 독서에 빠진 균은 방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세자저하. 세자저하."

"밖에 누구냐?"

"대전내관이옵니다. 세자저하."

"대전내관이 이 곳에는 왜? 혹시 아바마마의 명이라도 계셨느냐?"

"예. 저하. 주상전하께서 급히 사정전으로 오시라는 명을 내리였습니다."

"사정전으로? 그래 알겠다."

균은 제가 보던 책과 자리를 정리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내관의 뒤를 따라서 사정전으로 향했다. 균이 방을 떠나자 나인과 생각시들이 방을 정리하기 위해서 균의 방에 들어섰지만 특별히 청소할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나인 하나가 투덜거리는 말투로 혼잣말을 하면서 균의 방을 나섰다.

"이번 세자저하는 결벽증인가 봐. 편하기는 해도 일거리가 없어서 심심해 죽겠네."

어느덧 명종이 기다리는 사정전에 도착한 균은 먼저 명종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자리에 앉아서 명종의 하교를 기다렸다. 명종은 균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승지로부터 대리청정교서를 받아서 천천히 읽어나갔다.

"세자 이연은 들으라. 근래 들어 과인의 건강이 많이 상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근심을 하고 만백성들은 걱정을 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매년 흉년이 들고 변고가 나타나서 민심이 흉흉하다. 이는 모두 과인의 덕이 부족하여 생긴 일로 과인이 신하들에게 물으니 '세자께서 총명하시니 능히 만기를 도울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도다.

과인은 이르노라. 세자 이연은 이제부터 대리청정을 열어 과인을 대신해 국사를 돌보는 막중한 임무를 행하라. 비록 세자의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그 총명한 자질을 감추기에는 어린 나이가 아니다. 또한 문무백관들 역시 세자를 도와서 종묘사직을 지켜나가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기란 국왕이 해야 하는 일 만개의 일이라는 말로 그만큼 국왕의 일과가 바쁘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일은 궐내각사(궁내에서 신하들이 일하는 곳.)나 해당관청에서 처리하지만 그러한 일이 효력을 발휘하는 데는 임금의 어명이 필요했다. 단순히 서류를 검토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임금은 입법, 사법, 행정 등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다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엄청난 일거리가 고작 열네 살 꼬마에게 주어졌다.

교서가 발표된 후 명종과 신하들이 지금쯤 새파랗게 질렸을 균의 얼굴을 바라보니 오히려 화색을 띄고 있었다. 균의 입장에서는 세자시강원의 설치가 아니라서 한숨을 돌렸다는 생각해서 좋아한 것이지만 명종과 신하들은 엄청난 일거리를 떠 맞고도 오히려 반가워하는 균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보다 못한 명종이 그 연유를 균에게 물었다.

"세자는 앞으로의 정무를 돌보는 것이 걱정이 되지 않는가?"

"부족한 소자가 정무를 본다고 해도 아바마마의 유능한 신하들이 소자를 도울 것이고 또한 중요한 일들은 아바마마께서 돌보실 것이니 소자가 어찌 걱정을 하겠습니다. 그보다 아바마마의 환후가 차도를 보일 것을 생각하니 감히 어전에서 웃음을 보였습니다."

"하하하. 과연 우리 세자의 말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구나. 그런 자신감이면 충분히 혼자서도 정무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 경들도 세자를 도와서 더욱 분발하여 주시오. 세자가 아직은 어리나 만만히 보다가는 분명히 큰 코를 다칠 것이오."

"전하. 신 이준경 아뢰옵니다. 세자께서 이토록 총명하시니 분명 이 나라의 큰 복이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대리청정은 국왕을 대신해서 세자가 국무를 돌보는 일종의 임시정권이다. 정상적인 대리청정이라면 군주정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좋은 효과가 있는 제도지만 여러 가지 문제도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세자가 너무 뛰어날 때이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는 국왕이 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균도 이렇게 명종을 띄워주면서 답변을 한 것이다.

'모든 신하들을 내 신하로 생각하지 않고 명종의 신하를 빌린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힘들고 표시도 안 나는 일을 할 테니 명종은 큰 일만 처리해서 그 공을 다 가져도 된다. 내가 웃은 것은 정권을 맡은 것 때문이 아니라 명종의 건강을 생각해서이다.'

균이 말한 답변의 속뜻이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명종을 위하는 내용이었기에 후일 권력 분란의 소지가 없음을 확인한 명종과 신하들은 기뻐하였다. 아침의 조회가 끝나자 명종과 균은 강녕전에서 같이 정무를 돌보았다. 정확히는 명종은 감독하고 균은 일하고 도승지 윤의준이 서류를 가져다가 주는 체계였다.

균은 이미 다년간의 비금도주로써의 생활로 행정에는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당연히 세자가 비금도라는 무장독립세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명종은 처음으로 일을 하는 세자의 능력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익숙해지면 아예 혼자 놔두어도 잘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면 자기는 골치 아픈 정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균의 머리가 좋은 편인 탓에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도승지 옆의 작은 산을 보니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한참을 열심히 처리하고 검토해서 눈에 띄일 정도로 줄이면 그 악마같은 도승지가 '저하. 상소문들입니다.' 하고 다시 원 상태로 돌려버리고 또 열심히 처리하고 나면 '저하. 경상도에서 보내온 올해 세곡에 관한 보고이옵니다.' 하고 옆에 또 산을 만들어버리니 죽을 맛인 것이다.

다시 간단한 낮것상(점심)받고 잠시 쉰 후 다시 시작되는 서류와의 전쟁에 균은 '차리리 퇴계선생이랑 공부나 할 껄.' 이라는 후회를 하면서도 정신없이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관리들이 명종을 만나러 와서 균은 한쪽에서 계속 일을 처리했다. 그런데 균의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주상전하. 신 전 박천군수 이선이 문안드리옵니다."

"그간 박천군을 다스리는 라고 수고가 많았다. 그래 박천군은 평안한가?"

"예. 전하. 주상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재임기간동안 평년작을 거두어 백성들이 대체로 평안하오나 단지..."

"단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예. 전하. 신이 왕명을 받들어 부임했을 때 전임군수에게 이양을 받은 사건이 하나 있었나이다. 신도 최선을 다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신의 재주가 미천하여 관찰사께 보고를 들렸는데 관찰사도 해결을 하지 못하여 계속 미결로 남은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선의 말을 들은 명종은 의아했다. 이선은 유능하지는 않아도 무능하지도 않은 자인데 그런 자가 임기기간인 5년 동안 풀지 못하고 관찰사마저 포기할 만 한 사건이 있다는 것이 이상해서였다.

"그런 사건이 있다니... 그럼 경이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말하도록 하라."

"예. 전하. 산에서 네 사람이 죽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목이 졸려서 죽고 세 사람은 술항아리 옆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시신의 부패가 심하여 사인은 알 수 없었고 네 사람의 짐에는 각각 상당한 양의 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단서밖에는 없는지라 신도 감히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음. 그 정도로 단서가 적다면 웬만한 자라면 진실을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경의 책임이 아니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세자도 이 이야기를 다 들었을 것이다. 어디 세자가 해결해보거라."

이선의 이야기를 다 들은 명종은 옆에서 서류와 씨름을 하는 세자 균을 불러서 이 사건에 대한 균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조선의 왕은 조선의 최고재판관이기도 하다. 이 역시 명종의 시험인 것이다.

"아바마마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오나 한 번 소자가 말해보겠사옵니다. 먼저 네 명 다 도적 떼이옵니다."

"도적 떼라.... 그래 세자는 계속 말해보거라."

"소자가 보기로는 네 명의 도적이 행인의 돈을 빼앗아가져 같이 네 등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 명의 도적이 나머지 하나를 죽이고 그 돈마저 차지하기로 하여 나머지 도적에게 술심부름을 시킨 후 그 도적을 목 졸라 죽이고 세 도적은 술을 마신 것입니다."

"하지만 도적이라면 칼도 있어야하고 또 세 도적이 죽을 이유는 없지 않느냐?"

"칼은 도적질이 끝난 후 버린 듯 하옵니다. 그래서 한 도적은 마을로 술심부름을 다녀올 수 있었고 세 도적은 그 도적을 목 졸라서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목 졸려 죽은 도적도 다른 세 명의 도적을 죽이고 그 돈을 취할 생각에 술에 독약을 타는 바람에 세 도적도 죽고 부패도 심했던 것입니다."

"저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전하. 소신도 세 명의 시체와 한 명의 시체의 부패속도가 틀린 점을 이상히 여기어 한 구의 시체는 세 시체를 보고 놀라서 죽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세자저하의 말씀을 들으니 당시 정황과 정확히 일치하옵니다."

균의 추리를 들은 이선이 크게 놀라서 명종 앞인데도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하지만 명종은 이런 결례에 상관없이 세자의 추리에 무척이나 만족하여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정무만 잘 보는 줄 알았는데 정확한 상황추리까지 해내니 명종자신이 옆에서 돌봐줄 필요가 전혀 없어 당장 내일부터 푹 쉬어도 될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명종은 당장 그 날 저녁부터는 모든 정무를 세자에게 맞기고 중전 심씨가 있는 교태전으로 거둥을 했다. 당연히 중전 심씨가 반가워하면서도 놀라서 뛰어나와서 명종을 안으로 맞았다.

"전하, 이 시간에 이곳에는 어인일로 거둥하셨습니까?"

"허허허. 자아비가 지어미를 보러 오는데 어찌 시간과 장소를 가리겠소? 과인이 반갑지 않으신게요? 중전."

"어찌 신첩이 그런 망극한 생각을 떠올리겠습니까? 단지 오늘부터 세자의 대리청정도 있는데다가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 때문에 일년 중에서 가장 바쁜 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하께서 거둥하실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하하. 중전. 우리 세자가 말이요. 알고 보니 그렇게 일을 잘 할 수가 없어요. 과인이라면 하루가 걸릴 일을 반나절에 끝내버리니 도저히 과인이 도와줄 필요가 없지 않겠소? 아마 며칠 내로 세곡문제도 다 알아서 해결할 것 같으니 중전의 소원대로 과인은 이제부터 푹 쉴 것이오."

"하오나 세자는 아직 열네 살밖에는...."

"국사는 세자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일에나 충실하면 되오. 기분도 좋은데 술이나 한잔 합시다. 중전. 허허허."

그렇게 교태전에는 오랜만에 이른 저녁인데도 명종과 중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옆의 옆의 사정전에서는 도승지와 세자 균만이 서류랑 씨름을 하느라 눈에 핏발이 선채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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