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228)

 동궁전의 새로운 주인.

"그러면 이번 일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처리하도록 하시오."

"망극하옵니다. 저하."

"그럼 이만 오늘 상참을 마치도록 합시다."

균이 대리청정을 맡은 지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어느덧 균은 대리청정에 많이 적응하여 제법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균이 명종을 의식하여 몸을 낮추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는 있지만 조정대신들 간에는 대리청정이 훨씬 낫다는 말이 오고 갈 정도 균의 정무처리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거기에는 균이 전생에서 공부를 많이해서 머리가 좋은 것도 한몫하지만 백과사전과 전생의 지식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을 잘 알았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대강이라도 나중에는 무슨 이유로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마도 현대의 사업가라면 떼돈을 벌 것이고 대통령이라면 나중이라도 선각자로 칭송을 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서 균의 선택은 거의 최선의 선택들이었다. 물론 아직은 미비한 것들이 많지만 고작 열네 살의 꼬마가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의 업무처리는 많은 신하들의 환영을 받았다. 당장 자신들이 야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결제가 빨리 이루지는 것이 큰 이유이기는 했지만 새로운 세자가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가서 왕실의 안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해서였다.

오전의 상참(아침회의), 조계(아침보고),윤대관의 보고(추가보고)등의 오전일과를 마친 균은 간단히 면류으로 시장기를 채우고 보고할 서류를 가지고 명종이 있는 강녕전으로 향했다. 강녕전에서 며칠째 쉬고 있는 명종은 그새 건강을 많이 회복하여 얼굴이 많이 밝아져 있었지만 재미있는 책을 읽는지 균이 들어왔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책만 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오늘 보실 중요 문서들과 상소문중 일부이옵니다."

"그 정도야 세자가 다 처리할 수 있지 않느냐? 힘들게 이곳까지 찾아와서 일일이 허락을 구하지 말고 세자의 선에서 그냥 처리하도록 하라."

"하오나, 아바마마. 아직 어리고 부족한 소자가 어찌 아바마마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세자. 겸손도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다. 내가 세자의 능력과 마음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대리청정을 명하였겠는가? 세자의 뜻이 곧 과인의 뜻이니 세자는 마음을 편히 하고 국사를 돌보라."

명종의 균에 대한 믿음은 지나칠 정도였다. 원래 대리청정이 실시되면 왕권에 위협이 되는 병권 등을 제외한 일부 잡다한 권한을 위주로 권한이 넘겨진다. 아무리 세자라도 왕권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세력중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종은 병권등 핵심권력을 넘겨주는 한편 기본적인 보고마저도 대충 듣고 허락했다. 그 정도라면 누가 조선의 진정한 군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덕분에 균만 간이 콩알만 해지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명종이 내리는 시험의 일종인지 아니면 명종이 양위를 하려는 사전준비단계인지 독심술을 모르는 균으로써는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리청정도 잘하면 세자인 균에게 큰 도움이 되지만 가끔은 세자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넘기는 그런 군주도 있기에 명종의 진심을 모르는 균은 더욱 몸을 낮추어야 할 처지었다.

균이 보고를 마치고 물러가자 명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예상보다도 일을 잘 처리하는 세자덕분에 명종은 보위에 오른 이래 처음으로 지루한 일과를 보냈다. 덕분에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이제는 심심한 바람에 중전은 물론 여러 후궁들에게 까지도 찾아갈 만큼 시간도 건강도 여유러웠다. 명종은 오후에도 열심히 일할 균이 있는 동궁전을 한번 바라본 후에 후궁들의 처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바마마께서 후궁전에?"

"예. 저하. 요즘 들어서 자주있는 일이옵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실 텐데.... 알았다. 양상궁은 그만 나가보라."

"예. 저하."

이미 어느 정도 동궁전을 장악하기 시작한 균은 명종의 행동을 자세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상궁을 통하여 명종의 행동을 조사한 결과, 아무래도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유가 생긴 명종이 남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후궁전을 찾는 것까지야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루 종일 정력을 낭비하면서 보내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었다. 그래서 균은 한껏 인상을 지푸린채 명종의 속마음을 생각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저녁이 되고 오늘 밤도 명종은 교태전에 들어서 중전 심씨와 함께 있었다. 원래라면 힘든 정무에 대한 이야기를 명종이 하고 이를 중전 심씨가 다독여주다가 같이 잠이 드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특별한 이야기꺼리가 없는지라 명종과 중전은 띄엄띄엄 이야기를 하는둥마는둥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낮에 후궁전 출입이 잦은 명종 때문에 조금 소원해진 두 사람의 관계도 한 몫을 했다. 한 참후에야 중전 심씨가 입을 열었다.

"전하. 신첩이 듣기로 요즘 후궁전에 거둥이 잦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신첩이 질투를 하는 것은 아니오나 아직 전하의 몸이 좋지 않으니 후궁전에 출입하시는 것은 조금 자제를 하심이 옮을 듯합니다."

"중전의 말씀이 옮소. 중전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옮아요. 하지만 중전."

조금은 단호한 중전의 말에 명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명종을 보는 중전은 잠깐 꺼림칙한 기운을 느꼈다.

"예. 전하."

"과인은 요즘 마음이 공허하오. 활기에 찬 세자를 볼 때마다 그 모습에서 죽은 우리 순회가 생각나고 세자가 잘 처리한 일을 보면 정무에 밝으셨던 어마마마가 생각이 나오. 그래서 과인은 요즘 세자의 얼굴도 보지 않고 세자의 보고도 듣지 않소. 설령 세자를 피해서 혼자 있는다고 하여도 시간이 많이 남으니 두 사람의 생각이 나고 그렇다고 국사를 돌보자니 과인이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는 국정에 누가 될까 두렵소. 그래서 망극한 이 마음을 달래고자 후궁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오."

"전하. 전하는 이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누가 감히 전하께 망극한 말을 꺼내겠습니까? 잠시 쉬시다가 다시 정무를 돌보시옵소서. 세자가 돕는다면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전.... 과인은 말이오.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소. 어마마마의 일이든 순회의 일이든 세자의 일이든 골치 아픈 국사든.... 모두 다 잊고 싶소. 하지만 그것들이 과인을 놔주지 않아요. 잊어지지가 않아요."

명종은 흉년과 폭정으로 엉망이 된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벅찬데다가 외동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 여린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 거기에 세자 균이 예상보다도 정치를 잘하자 자신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왜 필요한지를 의심하게 되었고 여유시간이 많아져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기자 그 것이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살아갈 마음이 없던 명종에게는 여색으로 인한 말초적인 자극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리한 정사를 해서라도 그러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잊고자 했다.

중전 심씨는 그러한 명종의 마음을 잘 알았다. 비록 명종보다야 심리적인 타격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세자를 볼 때마다 자신의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자주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중전 심씨는 세자같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꾸 성욕이 생겼는데 방금 전에 세자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총명한 세자의 모습이 생각이 나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한 중전의 모습을 바라보는 명종도 마찬가지였다. 여색으로 몸이 축나기는 하지만 잠시나마 괴롭고 복잡한 일들을 잊을 수 있고 또한 만약이라도 균과 같이 똑똑한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여색을 밝혀왔던 터라 이미 달아오른 중전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 교태전의 불빛은 일찍 잠들었다. 아니 일찍 잠드는 듯 했다.

"...전하. ....전하!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어의를 불러라! 어서!"

조용하던 교태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관들과 궁녀들은 급히 뛰어다니고 대궐의 수비를 맡은 내금위의 병사들 역시 증강되어 곳곳에 배치되었다. 막 퇴궐하여 집에서 관복을 벗던 신하들 역시 급한 걸음으로 다시 입궐했고 급히 어의들이 교태전으로 뛰어들어 가서 미동도 하지 않은 명종의 용태를 살피었으나 명종은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은 즉시 차기 왕위계승자인 세자 균에게도 보고 되었다.

"뭐라고? 아바마마께서?"

"그러하옵니다... 저하."

균은 잠시 손을 머리에 대고 눈을 감았다. 예상보다도 너무나 빠른 명종의 병환. 역사대로라면 2년 후의 일이지만 이미 역사가 빠르게 흐르는지라 균은 약 1년 후로 생각했었다. 아직 세자가 된지도 몇 달도 안 되어 명에서 세자의 인준을 받지 못한 균에게는 결코 바라지 않던 일이다. 최소한 명의 세자책봉칙서를 받고 한동안 대리청정으로 세자의 자리를 공인받은 후에 명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주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미 정세는 변했다. 균이 걱정하던 데로 무리하게 여색을 밝히다가 쓰러졌다니 균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양자라고는 하지만 든든한 후계자를 갖춘 상황에서 친자식을 보겠다고 발악을 하다가 복상사한 꼴이라니... 균은 속으로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법. 균은 속으로 슬픈 생각을 다 떠올렸다. 그러자 잠시 후 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100%로 거짓 눈물은 아니었다. 균이 생각한 것도 바로 명종의 불행한 삶을 떠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균은 머릿속으로 명종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상상하며 양심당으로 향했다. 양심당은 현재는 없는 곳이나 임진왜란 전에는 강녕전 북서쪽에 있던 전각이다. 균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내관들이 명종을 그곳으로 옮겼는데 이는 명종이 교태전에서 승하하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명종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균이 양심당에 들어서자 이미 사태를 직감한 상궁나인들이 양심당 마당에 모여서 울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궐내각사에 남아있던 신하들이 급하게 오다가 균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으며 여러 의관과 의녀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명종의 생이 경각에 달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균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더욱 감정을 잡았다. 어느새 균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나와서 지나가던 나인들이 균을 보고 같이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어느 정도 명종에 대한 나쁜 감정이 사라지고 충분히 슬픔에 젖은 균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서 양심당안으로 들어갔다. 양심당은 원래 국왕의 침실 중에 하나로 강녕전보다는 작은 침소였기에 안에서 명종을 지켜볼만한 사람의 수는 무척이나 적었다. 고작해야 대비 박씨, 중전 심씨, 삼정승과 육조판서이상의 고위관료 정도이고 명종의 수많은 후궁들과 다른 신하들은 방밖이나 마당에서 위독한 명종의 상태를 슬퍼하고 있었다.

어느덧 균은 양심당에 들어와서 자신의 양아버지인 명종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명종은 숨을 쉬는 듯하지만 손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바보 같은 사람. 가만히 있었다면 몇 달, 아니 몇 년이라도 더 살았을 텐데... 그렇게 불행한 인생마저도 빨리 마감하려 하다니...'

균은 진심으로 불행한 사나이 명종의 손을 잡고 그의 일생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려주었다. 이미 한참을 울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봐 잠시 걱정을 했던 균이지만 눈물을 마르지 않고 계속 나왔다. 한참을 울자 아직 어린 소년이라서 그런지 가슴이 떨려오며 더욱 서러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왕이 죽기 전에 울음소리는 내서는 안 되기에 참고 있었지만 균이 흐느끼는 소리는 방에 있던 이들의 귀에는 충분히 잘 들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중전 심씨도 슬픔을 참을 수 없는지 어께를 들썩거리며 울음을 참았고 두 모자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대비 박씨와 신료들도 모두 눈을 감고 울음을 달랬다. 이제 양심당안에서 울지 않는 이라고는 누워있는 명종과 바로 옆에서 명종을 돌보는 두 사람뿐 모든 이들이 젊은 왕의 상태에 작던 크던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자정도 한참을 넘긴 시간. 가끔 침을 놓아서 명종의 숨을 돌리던 어의는 다시 명종에게 급하게 침을 놓더니 명종의 손을 잡고 맥을 집어보았다. 그리고는 면봉을 명종의 코앞에 대고는 유심히 살피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세 왕실가족에게 말했다.

"전하께오서는... 승하하셨습니다...."

"주상!"

"전하!"

"아바마마!"

"전하~!"

양심당안에서 튀어나온 소리를 들은 밖의 사람들도 일제히 '전하!'를 외치며 땅을 치거나 자기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울음소리는 조금씩 퍼져나가 곧 경복궁전체에서 울음소리가 울려 펴지더니 곧이어 왕의 승하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온 도성에 펴져나갔다. 현왕의 죽음을 알리는 나팔소리는 곤히 잠들던 많은 사람들의 잠을 깨우며 조선의 수도 한성부를 3년 연속으로 비통에 빠져들게 하였다.

명종 이환은 중종의 두 번째 아들로 문정왕후 윤씨의 소생이다. 하지만 중종의 생전에는 형인 인종의 위명에 가리어 빛을 보지 못하고 경원군의 봉작을 받았다가 형인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경원대군의 봉작을 받았다. 그해 인종이 죽자 조선 제 13대 국왕으로 12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양재역벽서사건등 문정왕후와 윤원형일파의 꼭두각시노릇을 하였고 서기 1553년에 친정을 시작하지만 그해 경복궁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윤원형의 전횡이 더욱 심해지는 등 국정이 혼미하였다.

1559년 임꺽정의 난이 발발한 이래 명종은 외척이 이량을 등장시켜 윤원형을 견제하고 자신의 왕권강화를 노렸지만 문정왕후의 개입과 이량의 인물됨이 깨끗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후 1563년 외아들 순회세자를 잃어 후계자를 상실하고 건강을 크게 해쳤으며 이듬해인 1564년 정치적인 후원자이던 문정왕후가 승하하여 명종의 심리적인 타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마지막 해인 1565년 봄에 하성군 이균을 양자로 맞아서 이연으로 개명하고 세자로 봉한후 대리청정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건강도 회복하는 듯 하였으나 무리한 욕심으로 경복궁 양심당에서 6월 28일 축시에 승하하니 그의 나이 고작 서른 두 살이었다. 타의로 왕위에 올라서 그 포부를 마음껏 피지 못하고 평생을 불행하게 살다간 한 사나이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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