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28)

 동궁전의 새로운 주인.

명종20년 6월 28일. 조선 13대 국왕 명종이 경복궁에서 승하했다. 이에 따라 균은 세자로 책봉된 지 고작 넉 달 만에 짧은 세자생활을 마치고 사실상 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장례절차는 많이 남아있다. 먼저 선대왕이 죽더라도 후대왕은 약 5일 동안 울면서 자식 된 도리를 다해야 하기에 균이 정무를 돌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서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이명 등이 원상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로 정무를 돌보게 되었다. 비변사는 을묘왜변(1555)이래 의정부를 제치고 조선 최고의 의결기구가 된 조직으로 현재 어전회의(조회)가 무력화된 이상 조선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지금 그 비변사회의가 영의정 이준경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때가 때이니 만큼 조금 이상한 문제가 회의에서 다루어졌다.

"대행대왕께옵서 승하하신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되어서 조만간에 세자저하의 즉위식을 거행하여야 하오. 대행대왕께서 남기신 자손은 세자저하뿐이니 별 이견은 없겠지만 문제는 세자께 옥새를 넘기는 일을 하실 분이 두 분이나 되시어 어느 분이 행하시느냐는 문제이오."

"....."

제법 미묘한 문제였다. 현재 왕실에는 두 명의 대비가 있다. 바로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이다. 법도대로라면 왕대비 박씨가 균에게 옥새를 넘겨주고 왕으로 삼아야 하지만 문제는 옥새를 넘겨주는 대비가 아직 나이 어린 균의 권력을 일부 이양 받아서 수렴청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렴청정은 어린 왕을 대신해서 대비등 왕실의 어른이 발(수렴)을 내리고 정사를 돌보는 행위로 선대왕 명종역시 어릴 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은 바가 있다.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 신왕의 권력은 사실상 정지한다. 대비는 왕의 어머니나 집안 어른이기에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옥새를 누가 보관하다가 신왕에게 인계를 하느냐는 즉위초기의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렇게 대신들이 난감한 상황이 보이는 것이다.

"흠흠흠. 영상대감. 그야 당연히.......대비께서 맞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왕대비마마가 정정하신데.... 대비마마께 맡긴다는 것은...."

"말이야 바른말이지. 왕대비마마는 세자저하의 숙모가 되십니다. 즉 방계의 왕대비이니 직계인 대비마마께서 맡으심이 옳습니다."

"하지만 대행대왕께서는 중중대왕의 법통을 이은 것이 아니라 인종대왕의 법통을 이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행대왕께서도 인종대왕의 장례를 3년상으로 치루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현 세자저하의 할머니가 되시는 거지요."

왕대비인 박씨의 입장은 조금 애매했다. 그녀는 인종의 후손이 왕위를 잇지 않아서 방계의 왕족이기는 하지만 명종이 인종의 뒤를 잇는 바람에 형식적으로는 명종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예법이 복잡하여 신하들이 의논을 하여 결정을 하였는데 이번처럼 차기 권력이 걸린 문제라면 아무리 선왕의 상중이라도 이처럼 소란스러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왕대비마마께서 하심이..."

"그게 무슨 소리오? 엄연히 대비마마는 세자저하의 어머님이 되시고 직계가 되오."

"왕대비마마께서는 대행대왕의 어머님이 되시니 어찌 방계가 되겠소?"

"어허! 대감 말씀이 지나치시오. 대행대왕마마의 상중에 어인 고성들이오?"

"하지만 대감! 어찌 대비마마가 살아계시거늘....."

자산의 말은 아랑곳 하지 않는 영의정 이준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눈에는 지금 자신들이 입고 있는 흰 상복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긴 이제 대행대왕은 죽은 사람. 강대한 왕권을 가진 왕이 아니라 단지 싸늘한 시신일 뿐이다. 거기다 수치스럽게 복상사로 죽어버리고 후계자도 친자가 아닌 바람에 대행대왕은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어버렸다. 이준경이 한숨을 내쉬던 그 때였다.

"쿵!"

"이 어인 추태인가? 아직 대행대왕의 시신에 온기가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신하된 자들이 소란스럽다니 이 어찌된 일들인가?"

"......."

왕대비 박씨가 손수 문을 열고 들어와서 크게 호통을 쳤다. 왕대비는 무척이나 분한 듯이 손을 말아 쥐고 몸을 떨고 있었다. 20년이나 조용히 뒷방에서 지내던 왕대비가 저렇게 나서서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신하들은 즉시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닫았다. 한껏 기가 오른 왕대비는 성큼성큼 걸어서 영의정 이준경앞의 옥새를 집어 들고는 신하들을 향해서 외쳤다.

"이제 내가 왕실의 최고어른으로써 이 옥새를 관장할 것이다. 이는 왕실의 연장자인 왕대비의 고유권한이니 신료들이 대행대왕의 빈전 옆에서 떠들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디 불만이 있는 자가 있는가?"

"아니옵니다. 왕대비마마. 어찌 왕실의 일을 신하들이 논의하겠습니까?"

왕대비 박씨의 불호령에 즉시 영의정 이준경은 고개를 숙여서 동의를 표했다. 이준경의 동의를 얻은 왕대비는 즉시 몸을 돌려서 바람같이 밖으로 향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어리둥절하여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지만 영의정 이준경만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왕대비 박씨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서 성큼성큼 걸어서 자신의 처소인 왕대비전으로 향했다. 왕대비전에 들어선 그녀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마치 아까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천천히 걸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한 소년이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가 말을 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왕대비마마."

"휴~. 세자 덕분에 10년을 이 할미가 감수했소. 세자께서 재주도 좋으시지. 영의정 이준경과는 어떻게 말을 맞추었소?"

"영의정 이준경은 삼대에 걸친 원로대신입니다. 왕대비마마의 뒤에 소손이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눈치챌만한 노련한 인물이지요. 그래서 소손도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균은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고 대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대비 박씨가 옥새를 빼오는 것 은 바로 균이 부탁한 일이었다. 혹시나 대비 심씨가 수령청정을 선언하면 자식 된 자로써 이를 거부할 수 없다. 그 경우 역사대로라면 거의 3년을 균의 손발이 묶이는 경우도 생긴다. 때문에 정치세력이 없는 왕대비와 손을 잡고 그녀에게 부탁하여 소란한 틈을 타서 옥새를 가져오게 부탁을 했다.

 균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차기 권력을 두고 언성을 높이던 신하들은 그것이 큰 죄가 되어 반론을 피지 못 할 것이고 가만히 있었던 자들은 왕대비의 다른 모습에 같이 놀라서 반론을 피지 못할 것이며 나머지 신하들은 왕대비의 돌출행동에 균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가만히 있거나 찬동할 것이니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여겼고 영의정 이준경도 균의 뜻을 간파하여 이를 지지해서 왕대비의 옥쇄탈취작전은 간단히 성공을 거둔 것이다.

왕실의 연장자인 왕대비의 손에 옥새가 넘어간 이상은 대비 심씨가 함부로 옥새를 자신이 보관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세력이 없는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할 여건도 아니었기에 균은 속으로 안심하고 곧 자신의 것이 될 옥새가 담긴 함을 잠시 보다가 다시 명종의 빈전으로 다시 향했다. 잠시 쉬러간다는 핑계로 떠나온 자리라서 왕대비전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명종20년 서기 1565년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 약 넉 달 만에 다시 문무백관들이 금관조복을 입고 품계석에 맞추어 늘어섰다. 대충 보면 4개월 전에 비해 바뀐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보다 참석한 사람들도 많이 늘었고 귓속말을 나누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근정전의 단 위에 위치한 용상이 비어있는 점이 달랐다.

이윽고 다시 한 번 근정문이 열리며 구장복(9개의 무늬나 그림이 들어간 옷)과 구류 면류관(9개의 줄이 달린 면류관.)등 국왕의 대례복을 갖춘 균이 입장을 하면서 문부백관들은 부동자세로 그들의 새로운 왕을 맞았다. 균은 천천히, 하지만 위풍있는 걸음으로 한 걸음씩 내딛었다. 세자책봉때 비해서 시일이 많이는 지나지 않았지만 균은 한 번 더 강성한 기운을 한껏 뽐내면서 자신이 더 이상은 꺼리낄 존재가 없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 주변의 문무백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균의 눈에 멀리 보이는 용상이 들어왔다. 얼마 전만 해도 명종의 자리는 이제 그 주인을 잃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너무 천천히 걸어서인지 조금 뒤에야 균은 근정전의 계단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정전의 용상과 근정전의 뜰 사이에는 2개의 계단이 있다. 왼쪽은 손님들이 사용하는 계단이고 오른쪽은 왕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균은 주저 없이 봉황의 무늬가 그려진 경사면의 오른쪽 계단을 차례로 올라서 용상의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몸을 돌리자 근정전의 뜰에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7월 달이라서 약간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장마철에 이렇게 맑은 날씨를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사로운 햇빛이 균을 비추었지만 면류관을 쓴 균의 눈을 부시게 하지는 못했다.

균이 용상의 앞에 서자 누군가 왕대비 박씨가 내린 균의 즉위명령서를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균에게 그보다는 멀리 대궐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한성부가 똑똑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남산만큼은 균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남산타워도 없는 작은 산이지만 그 위의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연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윽고 명령서의 낭독이 끝나고 왕대비 박씨가 내린 옥새가 균의 손에 들어왔다.

원래는 선대왕의 빈전에서 대비가 전해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왕대비와 대비의 사이가 좋지 않고 옥새의 보관문제로 더욱 사이가 나빠진 두 사람 때문에 여기서 왕대비가 영의정 이준경의 손을 통하여 옥새를 전달하는 것으로 형식을 변경하였다. 덕분에 균은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위식장에서 옥새를 물려받았다.

국왕의 상징인 옥새를 받고 여러 가지 의식을 끝낸 균은 드디어 용상에 천천히 좌정을 했다. 균이 용상에 앉는 순간 영의정 이준경의 제창으로 천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이를 따라서 문무백관들이 천세를 외쳤다. 귓가로 들리는 천세소리에 균은 자리에 앉아서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을 했다.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지금은 비록 천세소리에 만족해야 하는 제후국 조선의 어린 왕이지만은 언젠가는 만세소리를 듣는 조선의 황제가 될 것이다. 앞으로 여러 난관들이 있겠지만 지금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겠는가? 이제는 1300만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나를 바라보고 나를 믿고 살아간다. 그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것, 그것이 만백성의 아버지인 조선의 왕이 해야 할 일이고 이제는 내가 조선의 왕이다.'

균은 다시 눈을 뜨고는 고개를 들어서 아래의 뜰에서 일제히 천세를 외치는 문무백관들을 한 번 바라본 후 천천히 좌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까전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균을 반겼기고 태양은 힘차게 그 빛을 지상세계에 뿌려주고 있었다. 그런 하늘을 바라보는 균은 한껏 미소를 지었다.

명의 가정 44년 선조즉위년인 서기 1565년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한때 하성군 이균이라 불리던 세자 이연이 조선의 14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명종의 시대는 끝이나고 선조의 새로운 시 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직 선조 이균마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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