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에서 온 칙사.
조선개국력 174년이며 균의 즉위원년인 서기 1565년. 이균이 보위에 올라서 조선 14대 국왕으로 즉위할 쯤에 당시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흐르고 있었을까?
16세기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기근이다. 당시 전 세계적인 기근이 들어서 동서양 모두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먼저 동북아시아 삼국을 비교해보면 조선은 이미 언급했는 것처럼 흉년이 계속되었고 명은 연이은 흉년과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왜국역시 한층 다이묘(대명)간의 전쟁이 격해진 점을 볼 수 있다. 서양에서도 지중해의 해적이 급증하고 기존의 포르투갈, 에스파냐 이외에도 영국 등의 다른 국가들이 식민지개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즉 기근으로 인하여 세계 각국들은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확장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농업의 비중이 큰 동양의 경우에는 국가의 존망마저도 달린 문제였다. 식량부족으로 조선과 명에서는 농민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왜국에서는 왜구가 창궐하여 조선과 명을 노략질했다. 명 북방의 타타르족은 알단 칸이라는 영웅을 맞아서 명을 침공 한 때 수도 북경을 포위하는 등 조용하던 동북아시아는 국지전이 곳곳에서 발생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럼 간단히 주요 각국의 상황을 알아보자.
먼저 홍건적의 두목인 주원장이 백련교(명교)의 지원으로 몽골족의 원나라를 무너트리고 세운 명제국은 1371년 중원을 통일하고 한족의 중원지배를 실현하였다. 명의 주원장은 계속하여 몽골의 북원국을 공략하는 한편 만주를 공격하여 만주일대의 여진족을 복속시키는 한편 몽골족을 압박하여 1388년 북원을 멸망시킨다. 이때 고려의 요동정벌군의 공세가 있었지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한숨을 돌렸다.
이후 고려가 왕조교체로 정신이 없는 사이 명의 태조 홍무제 각 변경에 24명의 황자를 파견하여 왕으로 봉하고 변경의 오랑캐를 막아 남경의 황실을 옹호하는 체제를 유지한 채 내부의 정리에 박차를 가하여 주요 공신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통치체제를 만들어 내지만 그의 사후 2대 건문제는 숙부인 연왕의 공격으로 황제의 위에서 쫓겨나고 3대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영락제는 정통성에 심대한 문제가 있어서 거대한 궁성인 자금성을 축조하고 5차례에 걸친 원정의 성과와 정화의 대원정등 많은 정복사업을 펼치고 대운하를 개보수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후대 황제들은 내부의 세력다툼에만 신경을 써서 6대 정통제는 오라이트의 에센의 침입에 맞서 친정을 했다가 참패하고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명제국은 계속 쇠퇴하여 16세기에 들어서자 무능한 황제가 계속 즉위하고 환관세력이 득세를 하여 국정이 혼미한 가운데 계속 되는 가뭄과 북방 알탄 칸의 침공과 남방 왜구의 침입으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여 재정마저도 위기에 몰렸다. 현 황제는 세종 가정제는 전 황제의 사촌동생으로 제위에 올랐는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존칭문제로 무려 4년이나 신하들과 다투었고 그 뒤에도 환관 엄숭을 중요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아서 명의 국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가마쿠라막부를 물리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무로마치막부는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이후 계속 세력이 약화되더니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막부가 둘로 갈라지자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갈려 내전을 시작하여 사실상 무로마치막부는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약 100년간이나 항쟁을 계속하던 왜국은 뚜렷한 통일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약 60여개 소국들의 연합체로 갈라져서 사실상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덕분에 규슈지역의 무사들과 농민들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서 무자비한 해적질을 시작하니 그들이 바로 왜구들이다. 주로 조선남부를 유린하던 왜구들은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이래 그 방향을 명나라로 바꾸어 명나라의 해안지대를 공략했다. 명은 대군을 투입하여 토벌을 하였지만 그들은 근절시킨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16세기 중반에 들어서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영지만을 지키는 데 급급했던 다이묘들 대신에 천하통일을 꿈꾸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이묘중 하나가 오다 노부나가이다. 오와리의 영주인 오나 노부나가는 뛰어난 전법을 사용하여 주변의 영주를 차례로 격파하고 그 세력을 넓혀갔다.
한편 규슈남부의 시마즈가 역시 시마즈 요시히사라는 새로운 가주의 지도하에 조총부대를 양성하여 빠른 속도로 가문내의 내분을 진정시키고 대 조선교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하여 규슈통일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시마즈의 대조선 우호정책으로 조선남부의 왜구출몰은 크게 줄어들었다.
명제국에 복속된 만주의 여진족은 명의 이간질과 조선, 명 두 나라의 막강한 군사력 하에 해서, 건주, 야인의 세 세력으로 나누어고 또 각 부족간의 항쟁이 계속되어서 통일의 기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금의 태조인 누루하치역시 고작 6살의 꼬마일 뿐 여진족은 국가체제를 이룩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현실을 갖추었다.
1517년부터 동아시아에 출현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은 1557년 마카오를 차지하고 이를 동방교약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1543년 일본에 화승총을 전래하면서 일본의 개항을 유도하고 있었고 1549년 천주교를 전래하였다. 에스파냐는 마젤란의 세계일주이래 1565년 필리핀을 정복하고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토르데실라스조약을 통하여 동아시아는 포르투갈의 영역 이였기에 에스파냐의 진출은 포르투갈보다는 뒤쳐지는 것이었다.
1392년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약 170년간 한반도를 지배하면서 그 영역을 지켜나갔다.
역성혁명으로 일어난 조선은 내부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하여 서쪽의 명제국에 사대를 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명의 앞선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흉년이 들자 국가 경제력이 약화되고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으로 변방은 불안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위정자들의 실정이 계속되어 국가기반이 흔들릴 정도였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이다. 즉 명제국에는 형식적인 속국의 형태를 취하여 조공을 바치고 명의 연호를 쓰며 왕과 세자의 책봉에 사후인가를 받는 등 명을 상국으로 받드는 사대를 취하여 강대국인 명과의 충돌을 피하고 반대로 왜와 여진에게는 교역을 허락하거나 귀화를 장려하는 평화책과 무력으로 본거지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쓰는 교린을 사용하여 그들의 조선침공을 막았다.
상당히 효과적인 대외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단점도 상당했다. 먼저 여진족과 왜구에 대한 정책은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성격이 커서 단순히 응급처치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종족의 잠재적인 능력을 모르고 단순한 야만족으로만 치부하여 그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면서 조선왕조는 결국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명에 대한 사대는 조선 초기에 흔들리는 왕조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사대부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명의 책봉을 받으며 시작됐다. 덕분에 조선왕조는 중국과 전쟁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점차 자신의 기상을 상실하고 종속 되어가는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이 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여 관우묘를 만들어 숭배하는 등 현실의 안위에 너무 집착하여 민족의 정통성에 먹칠을 하였다.
지금도 그러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는 곳은 서대문 밖에 있는 모화관이다. 태종때 생겨서 세종때 개수된 모화관에서 조선의 왕세자는 직접 명의 사신을 맞았다. 또한 갈 때는 문무백관들이 나와서 배웅을 해주었다. 물론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은 선물을 잔뜩 안고서 돌아갔고 호조판서(오늘날의 재경부장관)는 텅 빈 국고를 보고 눈물을 지어야 했다. 사신이 한 번 오면 수 만 냥이 들었다고 하니 약 200만 냥의 조선재정으로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번에 명에서 세자책봉을 인준하러 조선에 파견된 사신은 장거정이라는 인물이다. 곧 대학사(조선의 판서급)라는 높은 직책에 오를 것으로 평가되는 그는 올해 마흔 살 전후의 중년이었는데 말을 타고 오면서 조선의 산천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선의 산천이 아름답고 수려하니 우리 대명의 영토로 삼아서 직접 지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구나. 비록 작은 땅이지만 조선인들을 노예로 삼아서 열심히 부린다면 많은 조세를 거둘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대명의 재정부족문제도 한숨 돌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선의 수도로 가는 길을 잘 보아두고 황제폐하의 허락을 받아서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정복해 버리는 것도 좋을 것이니 따라온 화공(화가)에게 명을 내려 지형지물을 기록하게 해야겠다.'
장거정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조선통역관을 피해서 조용히 화공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때 사신 행렬을 앞에서 말이 한 필 달려오더니 통역을 받은 관리를 불러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였다. 그 말을 들은 조선의 관리와 호위 병사들이 모두 슬퍼하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장거정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통역관에게 물어보니 통역관도 슬퍼하면서 대답하였다.
"본국의 국왕께서 얼마 전에 승하하시고 세자께서 보위를 승계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도 없던 일인데 마침 우리가 왔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몹시 불행한 일이오. 한데 조선의 세자와 재상은 어떤 분들이오? "
"본국의 세자께서는 올해 춘추 열네 살이시고 원래 국왕전하의 조카분이 되십니다. 또한 현재의 재상은 이준경이라는 인물로 무척이나 어진 분입니다."
"그러면 별 걱정이 없겠소."
'어린 왕과 유능한 신하라 이간질을 잘 시킨다면 10만 대군도 필요 없겠군.'
통역관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물어서 조선의 현 정세를 판단한 장거정은 속으로 살짝 웃었다. 절대군주정의 나라에서 무능한 왕과 유능한 신하는 결코 좋은 궁합이 아니다. 서로가 의심하고 질투를 한다면 그 나라는 결국에는 망하는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장거정은 지금 보고 있는 조선의 영토가 벌써 명의 영토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장거정의 생각은 모화관에 도착했을 때부터 깨어졌다. 당연히 마중 나와야 할 조선의 왕이 자신을 마중 나오지 않은 것이다. 원래라면 조선의 왕세자가 나오는 것이 정상인데 왕세자가 없는 지금에는 어린 왕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분노한 장거정을 받은 이가 예조판서 이탁이었다.
"저희 국왕께서는 전 국왕전하의 빈전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계십니다. 거기다 아직 보령이 낮으시어 자손이 없는지라 예조판서인 제가 대국의 사신을 영접하고자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황제폐하의 칙사이다. 아직 조선왕으로 봉하지 않은 세자라면 당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칙사를 맞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칙사께 아직 세자책봉을 인정하는 황제폐하의 칙명을 전하지 않으셨으니 세자의 신분이라고 볼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
장거정은 자신이 세자책봉의 칙서를 전달하러 온 것을 깜박 잊었다. 조선의 대신말처럼 명의 책봉을 받지 않았으니 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세자로 인정할 수 없다. 없는 세자를 만들어 마중을 나오게 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장거정은 속으로 분을 삭이면서 모화관으로 들어갔다.
비록 조선의 왕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대첩은 최상급이었다. 식사 때는 자신이 명에서도 먹기 힘든 고급음식은 물론 조선의 고급음식이 나오고 숙소 역시 명에서도 구하기 힘든 고급 비단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장거정은 조선의 부에 은근히 놀라고 다시 한번 조선을 정복하여 명의 재정난을 해소하겠다는 애국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명의 칙사 장거정은 이미 즉위한 조선왕에게 세자책봉칙서를 주기도 힘든지라 조용히 예조판서 이탁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명종의 빈청을 방문하여 소복을 입고 공손히 조문하였다. 장거정의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공손한 장거정의 태도에 속아서 이번 칙사는 참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자가 많았다.
그 뒤에도 명의 사신을 위한 잔치가 여러 번 베풀어졌다. 비록 국상중이라서 많이 간소해진 것은 있지만 조선에 들어온 이후 장거정을 위해서 베풀어진 잔치의 수는 무려 십여 번에 달했다. 장거정이 수많은 잔치들을 무사히 마치고 조선의 신왕 이균과 원상대신인 영의정 이준경을 만날 수 있던 것은 한성부에 도착한지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먼저 이준경을 만난 장거정은 이준경의 풍채에 일단 한 번 놀랐다. 이미 나이가 많은 노대신 이준경은 장거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정치가의 냄새가 풍겼다. 작은 나라의 재상이라고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요리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장거정이지만 그 노구의 조선 재상이 풍기는 기운은 오히려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조선의 재상은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어린 왕을 잘 타일러 제갈량을 의심하던 촉한의 후주 유선처럼 재상을 의심하게 하고 그 기회를 틈타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켜 기회를 엿보아야겠다.'
장거정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직감하고는 아주 공손하게 좋은 이야기로 대화하여 이준경과의 회담을 마치고는 조선의 신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준경이 땀을 흘리면서 장거정을 말리는 것이었다.
"본국의 국왕께서 심기가 무척 불편하시오. 그러니 칙사께서는 조금더 연회를 즐기다가 알현하거나 아니면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이준경이 쩔쩔매자 장거정은 무엇인가 조선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무척이나 속으로 반겼다. 저 풍채가 좋은 조선의 재상이 가진 약점이거나 아니면 조선의 어린 왕과 관련된 약점이라면 장거정의 조선합병계획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거정은 속으로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정색을 하고 꼭 만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이준경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면서 알겠다고 답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