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28)

 명에서 온 칙사.

이준경이 따라서 들어간 어느 작은 방. 장거정은 방바닥에 앉아있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이제 한 15세는 되었을 만한 소년은 자신이 들어왔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준경이 뭐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그 소년은 자신을 보더니 무슨 말을 하여 이준경은 물론 통역관마저도 내보냈다. 그리고는 한 참후에 소년이 종이와 붓을 꺼내서 무엇인가를 쓰더니 자신 앞에 내밀었다.

'대국의 예의가 어찌 동방의 예의보다 못하느냐? 칙사는 왜 과인에게 절을 하지 않는가?'

장거정은 먼저 불편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절을 한 후에 자리에 앉아서 필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내심으로는 어린 소년에게 강제로 절을 해야 하는데다가 소년의 글에서 공손함을 찾을 수 없기에 기분이 나빠져서 맞받아졌다.

'조선의 왕께서 이렇게 작은 방에 계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 나라의 국왕이 부왕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을 큰 방에서 신하들에게 표시가 나게 보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오나 우리 명나라에서는 신분이 높을수록 큰 방을 사용하시기에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럼 지금 별궁에서 생활하시는 대명의 황제폐하께서는 자금성에 사는 황자들보다 낮은 신분이란 말이냐? 최소한 우리 동방에서는 그 사람을 따지지 거처는 따지지 않거늘 대국에서는 사는 곳에 따라서 신분을 따진다니 그대가 말하는 상국의 풍습이란 무척 해괴하구나. '

명의 현 황제 가정제는 특히 말년에 이르러 자금성을 떠나서 별궁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덕분에 수많은 조선의 사신들중 황제의 얼굴을 본 자가 손에 꼽을 정도 이었다고 한다. 균의 이번 말로 장거정은 황제보다 황자들이 더 높다는 말을 한 것이 돼 버렸다. 얼굴 표정이 변한 장거정은 즉시 붓을 놀려서 수습에 들어갔다.

'어찌 황제폐하의 신하가 된 자로 그런 불충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저는 단지 조선의 당당한 제왕께서 격에 안 맞는 곳에 계시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넘어가지. 황제폐하께서 과인에게 전하라고 하신 특별한 말씀은 있으신가?'

'예. 전하. 우리 대명제국 황제폐하께서는 새로운 조선의 세자가 전 국왕전하의 친자가 아닌 것을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그 경우에는 조선의 왕권을 위협하는 불충한 자들이 나와서 대명의 동쪽 울타리인 조선의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을 특히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말씀만 하신다면 10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지켜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나 참 고양이가 쥐 생각을 다해주는군. 군대를 파견해서 지켜준다고? 그럴만한 군대도 없는 것들이...."

균은 이렇게 혼잣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조선어를 이해하지 못한 장거정에게 다시 붓을 들어 답해주었다.

'황제폐하께서 제후국인 우리 조선을 걱정해주는 것은 감사하나 본국의 정세는 결코 나쁘지 않다. 과인이 듣기로는 아직 황제 폐하의 군대는 오랑캐무리들과 전투를 벌인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군을 빼돌릴 여유가 있는가?'

'대명제국은 이 세상의 중심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인 천자의 나라입니다. 충실한 제후국인 조선을 지켜줄 정도의 군대는 충분히 파견할 수 있습니다.'

'북쪽의 알탄 칸이라는 자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또한 남쪽의 왜구는 안 쳐들어온다는 약조라도 받았는가? 당장 대군이 빠지면 알탄 칸은 북경을 유린하고 왜구는 해안을 초토화시킬 텐데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 또한 과인을 따르는 충실하고 용맹한 군사가 족히 10만은 넘는다. 그 군대로 충분한 것을 과인은 황제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는 황제폐하의 배려입니다. 전하'

균은 속으로 '그건 니 생각이지.'라고 말했다. 나라가 기울던지 말던지 별궁에서 지내는 가정제가 조선을 탐낼 이유가 없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동원해서 조선을 지켜주러 온다니 길가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까전에 장거정이 그랬듯이 균은 대놓고 황제를 무시할 입장은 아니기에 다른 말로 답을 해야 했다.

'칙사. 과인은 명의 10만대군보다도 더 원하는 것이 있다.'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먼저 오랑캐의 침입에도 제후국인 우리 조선과 과인을 생각하시는 황제폐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 하지만 우리 조선도 오랑캐의 발호가 예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황제폐하의 군대가 조선에 오려는 이유는 과인을 위해서 인데 오랑캐로 인하여 대군을 동원하기 힘든 대국이 손쉽게 과인에게 할 수 있는 배려는 따로있다.

대명회전(명의 역사서)에는 우리 왕실의 시조를 이자춘이 아닌 이인임으로 적고 있다. 이미 본국의 선대왕들께서 황제폐하께 주청을 드려서 이를 고치겠다는 확답을 들었거늘 아직도 대명회전을 비록하여 대국의 기록에는 엉뚱한 이가 과인의 시조로 기록되어있다. 대국에서 이러한 사실을 정정하여 우리 왕실의 위엄을 세우준다면 이것이야 말로 대국은 군대를 안보내도 되고 아국은 숙원을 해결하는 것이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칙사는 과인의 이런 마음을 황제께 잘 말씀 드려주기를 바란다.'

'하오나. 전하. 황제폐하께서는...'

조선왕조의 종계 개정문제가 나오자 장거정은 한 발 물러서야 했다. 상대방 왕조의 시조를 잘못 적고 시정요청을 받고도 방치한 명나라의 실수이기 때문에 따질 수가 없는 사한이다. 장거정이 주춤하는 듯하자 균은 자기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몰아서 하기 시작했다. 기세는 잡을 때 밀어붙이는 법이다.

'또한 칙사. 군대보다도 과인에 대한 황제폐하의 인준이 먼저 필요하다. 과인이 아직 반쪽짜리 국왕이기에 명분이 없다. 군대를 파견하는 이유가 과인을 위해서지만 황제폐하의 인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10만대군이 무슨 소용인가? 황제폐하의 덕이 지극하심을 잘 알고있으니 무리한 군대파견보다는 과인에 대한 인준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

'인준이야 당연히 이루어지는 일이고. 황제폐하께서는...'

'또한 칙사. 우리 조선에도 군대는 있지만 흉년으로 군졸들이 굶주려 힘을 쓰지 못하다. 곡식 100만 섬을 보내준다면 내가 그들을 먹여서 정세를 안정시킬 것이다. 그러니 곡식 100만 섬만 넘겨 달라. 지금 대군이 온다고 해도 조선에 식량이 없으니 다 굶게 된다. 황제폐하의 군사들을 굶지 않게 하려면 천만 섬은 필요한데 본국의 국고가 버티지를 못 한다. 대국의 재정도 대규모 파병군을 유지하기는 힘들 터, 곡식 100만섬만 보내주면 과인이 알아서 황제폐하의 근심을 덜겠노라.'

'그런 재정문제는 소관의 소임이 아니라서.....'

'또한 칙사. 북방은 대국의 영역이나 사실상 여진족들이 알아서 살아가고 있다. 이번에 흉년으로 북방여진족의 남하가 예상된다. 조선군이 대국의 영역으로 진출할 수도 없으니 그 10만 대군을 여진족을 토벌하게 해 달라. 이때 조선군은 명군을 대신하여 과인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조선의 정세와 만주의 정세 모두 안정이 되니 그 또한 일석이조다.'

'폐하께서는 꼭 조선에...'

'또한 칙사....'

'그건 제 소관이...'

균의 여러 가지 대안제시에 질려버린 장거정에게 결국에는 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명의 칙사들은 명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는 명황제의 권위를 빌려서 조선에서 방자하게 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균의 눈에 자신의 거짓말이 간파당한 장거정은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그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협상권도 없이 조선의 왕인 과인에게 그런 제의를 하는 것인가? 과인의 말이 무리한 부탁인가? 과인은 황제께서 제시하신 사안을 검토하여 황제께 더 좋은 안건을 생각해내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거늘. 칙사라는 자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인가? 지금 칙사에게는 그런 중차대한 일을 논의할만할 권한이 없는 것 같으니 과인이 직접 황제께 글을 올리겠다. 칙사는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전하!"

장거정의 의견은 도저히 실현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장 명은 북방의 알탄 칸의 공세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있어서 만리장성일대의 병력을 빼돌릴 수 없었다. 또한 남쪽의 왜구는 어느 정도 정리되는 분위기였지만 아직도 강대한 왜구들이 침공을 해 와서 역시 대병을 파견해야했다. 동시에 상대적으로 평화롭지만 명의 국경선은 엄청난 길이다. 그 정도이면 백만대군도 부족함이 있다.

그 상황에서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치고 조선의 풍부한 물자를 얻어서 명의 세력을 신장시킨다는 그의 계획은 꿈일 수밖에 없다. 당장 10만 대군을 차출하려면 농민들을 강제징집하는 정도가 고작이고 조선이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더욱이 조선의 어린 왕이 이균이라면 말이다.

본시 조선은 명에 있어서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다. 명의 전력이 조선을 훨씬 상회하지만 조선은 주변에 큰 적이 없는 반면 명은 그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많은 나라들과 접경을 하고 그 국경선을 방어해야한다. 그래서 명의 원정군이 파견되어도 조선의 군사력을 격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명은 전통적으로 조선과 우호를 맺고 여진과 왜구를 같이 견제하는 동쪽의 울타리로 생각해왔다. 이는 동쪽 국경이 안전해지는 결과를 가지고 왔는데 조선왕이 '우리나라에 군대는 왜 보내?'라는 국서를 보내면 가뜩이나 전쟁으로 힘든 대다수의 명의 신료들이 '어떤 녀석이 생각 없이 조선을 건들였냐?'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거정으로써는 아무리 인맥이 좋아도 충분히 관직에서 밀려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장거정은 균의 답에 놀라서 서투른 말투지만 조선어로 간단한 말을 하고 다시 붓을 놀리며 답을 했다.

'이만한 일로 황제폐하와 국왕전하의 심기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황제폐하께 잘 말씀드릴 테니 전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저를 믿고 맞겨주십시오.'

'과인이 보니 그대의 지위로는 황제께 과인의 말을 제대로 전하고 더 좋은 의견을 관철시킬 수 없다고 생각된다. 칙사는 그만 돌아가라.'

이렇게 답을 한 균은 한껏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전하. 신 영의정 이준경이옵니다."

"칙사가 피곤한듯하니 데리고 가서 쉬게 하라."

"예. 전하."

칙사 장거정이 반쯤을 끌려서 나간 후 균은 다시 자리를 옮겨서 강녕전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이제 자신의 처소가 된 강녕전에 앉아서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저 칙사가 나중에 명의 재상이 되는 장거정이 맞나? 이름은 맞는 것 같은데 예상보다 약하네... 혹시 동명이인인가? 왜 자기가 자폭을 하지... 찜찜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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