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28)

 명에서 온 칙사.

"껄껄껄...."

"대인. 소리가 너무 크시옵니다."

"조선왕이 예상보다는 괜찮은 인물이구나. 자네도 말을 못하는 자는 아니거늘. 자네가 그렇게 쫓겨날 줄이야."

"......"

명의 칙사일행이 묶고 있는 모화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칙사 본인이 묶고 있는 큰 방에는 지금 두 명의 인물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하나는 칙사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허리를 숙여서 상대를 공손히 대하고 있었고 오히려 조금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이는 껄껄거리며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서 상대를 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인. 조선의 신왕과 재상이 유능하다면 대인의 계획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나 혼자만 꿈꾸는 일이다. 조선의 왕이 무능하고 의심만 많다고 하여도 현재의 우리 명으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없다. 당장 10만 대군이 나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조선의 군사력도 족히 20만에 달하는 지라 결국에는 후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직접적인 군사 개입보다는 조선왕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우리 명의 군대가 조선의 도성근처에 주둔하게만 하여도 대성공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우리 대명제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조선의 왕이 바보가 아니고 어느 정도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아서 전왕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우습게만 볼 것은 아닌듯하다. 고작 14살짜리 소년이 독대한 자리에서 그 정도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인물로는 불가능하다. 그 정도라면 조선왕은 곧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니 나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히려 다른 요구를 해오다니 좋게 말해서는 대범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겁이 없도다."

"하면 대인께서 직접 조선왕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셨다면 조선왕의 꼬투리를 잡아서 대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실 수도 있었을 것을 왜 소인에게 맡기셨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조선왕의 관상을 보라고 하였지 않는가? 조선왕이 국상기간이라는 이유로 최대한 우리를 피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의 얼굴에 비밀이 있는 듯하여 그대를 들여보낸 것이 아니던가? 혹시 자네 조선왕의 관상을 보지 못했는가?"

 어느새 모화관 내부에 햇빛이 들어와 실내가 환해졌다. 그 빛에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은 놀랍도록 비슷하게 생겼다. 사실 균에게 왕창 깨진 인물은 장거정이 아니고 장거정의 부하 중에 하나로 상당한 수준의 관상가였다. 장거정이 아직 청년일 때 길거리에서 그와 만난 후 장거정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포섭했다.

그 뒤로 이 관상가가 장거정을 대신하여 대역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장거정이 이를 사용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세우면서 장거정의 벼슬은 높아져 지금은 대학사의 자리를 노리는 입장에 이르렀다. 물론 거기에는 장거정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지만 저 관상가의 노력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장거정은 이번 조선으로의 사행길에도 그를 대동하고 온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신왕은 이상할 정도로 사신들을 피했다. 물론 국상중이라는 핑계가 있기는 하지만 심할 정도로 자신들을 피해다니는 조선 왕의 관상이라도 보기위해서 장거정은 관상가를 대신 보냈다. 그 결과 자신의 대역은 한심할 정도로 깨져서 돌아왔다. 물론 자신이 직접 나섰다면 조선왕이 당했겠지만 조선정복이라는 별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조선왕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자네. 설마 조선왕의 관상을 정말 보지 못한 것인가?"

"방이 작고 어두운데다가 제가 기세에서 밀리는 바람에 자세히는 보지 못했습니다."

"껄껄껄. 조선왕의 계획이구나. 하기야 사신이 하는 일중에 하나가 정보수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제 얼굴을 숨기려고 하는 조선왕이라 냄새가 나는군. 이번에는 별 핑계가 없어서 그대를 다시 보낼 수는 없지만 내가 다시 조선왕을 만나서 혼쭐을 빼놓을 것이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예. 대인."

관상가를 돌려보낸 장거정은 스스로 칙사의 화려한 정복을 입고 자신의 처소를 나서면서 말했다.

"그럼 내 앞에서 재롱부리는 조선의 왕을 한 번 만나서 혼을 내주어야겠군."

조선의 원상대신이며 영의정인 이준경은 또다시 방문한 명의 칙사 장거정의 방문에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균은 이준경에게 사신의 방문을 최대한 막으라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는 명종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핑계로 정무를 이준경에게 떠 맡긴 채 강녕전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국상중이라고 해도 명의 사신을 안 만나주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거기다 아까 전처럼 조선을 자기들의 돈주머니쯤으로 아는 명의 사신에게 오히려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몰아붙이는 일 역시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이미 많은 수의 명나라 칙사를 맞아본 이준경은 지금의 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칙사의 알현요청을 받은 이준경은 균의 어명과 칙사의 요구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전하께서는 부왕을 생각하시어 식음을 전폐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이미 칙사께서 돌아가신 후에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시니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나는 전하께 아까 전의 결례에 대한 사죄와 전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답변을 하러 온 것이다. 조선국의 재상은 우리 대명제국과 조선국간에 불편한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싶은가? 이는 조선의 신하로써도 불충이니 재상은 귀국의 전하께 잘 말씀드리도록 하라."

노골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언급하는 장거정을 보면서 이준경은 저 얼굴을 한번 주먹으로 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불편한 관계이지 사실상 협박이다. 당장 균은 명으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통의 세자라면 무시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원래 균은 여러 종친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그만큼 정통성이 떨어지는 상황이기에 명의 인증은 중요했다.

이런 말을 이준경으로부터 전해들은 균 역시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완전히 자신의 국왕인증문제를 걸고넘어지겠다는 소리였다. 당장 국왕인증이 미루어진다면 균은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는데 더욱 큰 저항을 받게 된다. 거기에 명이 다른 왕족을 왕으로 지정하는 날에는 조선에서는 내전이 벌어진다. 그만큼 사대사상에 물이 든 자들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균은 이를 깨물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칙사 혼자만 불러오도록."

"예. 전하."

이번에는 또 다른 작은 방으로 바뀌어서 둘이 대면했다. 조금이라도 상대가 덜 익숙한 곳에서 대화를 하여 상대를 압박하자는 균의 심리전술인데 불행히도 이번의 장거정은 그런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이번의 장거정은 여유있는 표정으로 들어와서 균에게 절을 올렸다. 선수를 친 것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통역이 없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전하. 대명국의 한림학사이며 이번에 조선의 세자책봉사로 파견된 장거정이라 하옵니다.'

'아까의 칙사는 다른 인물인 모양이군. 그대의 필체를 보니 무척이나 훌륭하다.'

'전하의 필체 역시 대단하옵니다. 이 정도면 우리 대명에서도 쉽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균은 대번에 지금의 장거정이 진짜 장거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 필체가 크게 차이가 나는데다가 만만치 않은 기상이 균의 감각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죽은 명종보다도 더 위엄있고 빼어난 풍채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공손한 절을 하여 균의 꼬투리를 바로 피했다. 지금 균은 조선의 왕일 뿐만 아니라 상을 당한 사람이기에 칙사라도 일단을 예의를 다해서 위로를 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균은 다른 일을 꺼내서 압박을 하였다.

'그런데 아까 전에는 왜 다른 인물을 칙사라 속여 들여보내어 과인을 속였는가?'

'그럼 왜 북경에 오는 조선사신들중에는 관상가가 있습니까?'

아무리 우호관계인 명과 조선이라도 서로 경계를 하고 정탐을 하였다. 조선의 경우에는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이 돌아와서 국왕에게 상세한 보고를 하였다. 주로 명의 정세와 황제의 동향등이 그것인데 관상가를 파견하여 명의 주요인물의 관상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명도 마찬가지로 명의 사신중에는 관상가나 정탐꾼들이 있어서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 하였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임진왜란때 있던 일이다.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참패를 하고 선조가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하면서 명에게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의 신종 만력제는 먼저 사신과 관상가를 파견하여 의주에 있는 조선국왕 선조의 관상을 살피게 하였다. 당시에 조선군이 너무 빨리 무너져서 명에는 '조선의 진짜 왕과 정예군은 함경도에 숨어있고 의주에는 가짜 왕이 있어서 명의 원군이 파견되면 조선과 왜의 연합군이 이를 격파하고 명으로 쳐들어온다.' 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조가 왕처럼 보였던지 명은 원군을 파견하게 된다.

이처럼 비공식적으로 조선과 명 두 나라는 정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균의 말에 장거정이 '너희도 정보전 하지 않느냐?' 로 맞받아주어 균은 그 패를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앞의 사신은 과인의 능력이 의심스러워 명의 대군을 파견하겠다고 하였다. 이 말이 황제폐하의 덕이 지극하시어 나온 말임은 알고 있으나 조선은 2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과인은 황제폐하로부터 세자책봉을 받은 입장이다. 그대가 이러한 사실을 황제폐하께 잘 말씀 드려 황제폐하의 군대가 불필요한 출정을 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황제폐하께서는 전하의 능력을 믿고 있으나 아직 어리신 전하께서 힘들어하실 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이미 황제폐하께서도 전하와 비슷한 입장에서 제위에 올라서 무려 4년간이나 그러한 문제로 고심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나중에 양정화등 역신을 몰아내고 나라의 뿌리를 바로 하시기는 했으나 그때의 생각으로 전하의 어려움을 간파하시고 이러한 용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명의 12대 황제인 세종 가정제는 11대 황제인 정덕제의 사촌동생이다. 정덕제가 형제와 자식이 없이 죽자 보위에 오른 가정제는 큰 아버지인 10대 홍치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여 양아버지와 친아버지중 누구를 아버지라고 부르냐는 문제를 놓고 신하들과 대립하는 대례의분의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그러한 예법을 핑계로 한 권력투쟁이었는데도 장거정은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서 균을 압박했다.

'이는 황은이 망극한 일이다. 하지만 '소를 잡은 칼로 닭을 잡는 일'은 황제폐하의 충실한 제후인 과인으로써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과인이 필요한 것은 황제폐하의 군대가 아니라 황제폐하의 인준이다. 황제폐하의 인준만 받아도 과인은 충분하나 황제폐하께서 과인을 더욱 염려하신다면 앞의 사신에게 말한 우리 왕실의 종계개정을 미루지 말았으면 한다. 이 정도만 해도 황제폐하의 근심을 더는 것은 충분하다.'

'황제폐하께서는 전하의 이런 마음을 만리 밖에서도 헤아리는 분이시기에 그 정도는 조금만 기다리시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자식의 나라이면 명은 부모의 나라인터 어찌 자식이 조선의 어려움을 뻔히 알고도 부모인 명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황제께서 이번 일을 아신다면 크게 슬퍼하실 것입니다.'

'과인이 알기로는 황제께서는 변방의 오랑캐의 침입으로 많은 신경을 쓰시다고 들었다. 북방에는 타타르족의 알탄 칸이 일어나 만리장성을 넘어서 명의 북방을 유린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는 아직도 왜구의 잔당이 출몰하여 대군이 배치되어 있는 입장이다. 또한 명은 중원의 주인답게 넓은 영토와 긴 국경선을 자랑하지 않는가? 명에서 새로이 대군을 동원하려면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부모인 명이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이 조선이 큰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대명은 중원의 패자입니다. 어찌 황제폐하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는 분명한 불경입니다.'

둘의 필담이 길어질 분위기를 보이자 장거정이 먼저 균의 말에 꼬투리를 잡았다. 서로를 노려보는 균과 장거정의 눈이 제법 무서웠지만 둘 다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균의 붓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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