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28)

 명에서 온 칙사.

'과인은 황제폐하와 대명제국의 힘에 의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황제폐하의 눈을 가리고 폭정을 일삼는 무리들은 믿을 수 없다. 이미 조선은 정권을 쥐고 폭정을 일삼던 무리들이 실각하거나 죽었지만 대국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장거정 그대가 과인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해서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엄숭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해서는 무척 강직한 명의 신하로 도교에 빠진 가정제를 비판한 강직한 충신이고 엄숭은 가정제의 비위만 맞추는 간신이다. 하지만 가정제는 엄숭을 총애하여 내각수보로 삼은 반면 해서는 가정제가 죽을 때까지 옥에 갇혀지냈다. 따라서 둘중에 누구를 택해도 균의 반박을 받을 수 있다. 균은 지금 장거정에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져서 장거정의 공세를 벗어나려는 생각인 듯 했다.

'소관이 어찌 황제폐하의 깊으신 뜻을 알겠습니까? 다 황제폐하의 숨은 뜻이 있는 일이니 신하가 이를 두고 논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역시나 정거정은 이를 두루뭉술한 말로 받았다. 자기는 황제의 신하이니 황제를 따를 뿐이고 황제의 신하인 조선왕도 이를 논할 자격이 없다라는 뜻의 답변이다. 이 말을 들은 균은 속으로 '걸렸다.'라는 말을 외쳤다. 그리고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띄운 채 답을 했다.

'그러면 그대와 친분이 깊은 서계는 엄숭과 사이가 나쁜데 이는 어찌된 일인가? 또한 그대도 황제폐하의 숨은 뜻에 따라서 엄숭과 정치적인 적대관계를 가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한 말은 모순이다. 그대는 황제폐하의 숨은 뜻을 무시하고 엄숭과 적대적인 서계와 행동을 같이하거늘 과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하는가?'

서계는 엄숭을 실각시키고 내각수보의 위치에 오르는 명의 재상으로 장거정의 뒤를 돌보아준 인물이다. 장거정으로써는 심하면 은인 못해도 후원자는 되는 인물이기에 장거정의 답변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때 장거정이 엄숭을 좋게 말하면 서계를 배신한 꼴이 되고 서계를 좋게 말하면 가정제의 숨은 뜻을 무시한 셈이다. 어떻게 되던 좋은 약점이다. 그래서 천하의 장거정도 한참후에나 답을 했다. 동쪽 제후국의 어린 왕이 자신과 관련된 명나라 정세를 알고 반박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전하. 이런 것은 이 자리에서 의논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래하던 의논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인이 격식없이 이야기를 하지. 그대의 말은 이치에 닫지 않는다. 대국의 신하이며 그대의 정치후원자인 서계도 엄숭이 하는 일을 비판하였다. 이는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닌가? 또한 이 일이 옳다면 과인의 말이 어찌 틀렸다는 말이냐? 황제폐하가 먼 곳의 일을 다 아실 수는 없는 터, 이를 신하들이 보고하여 황제폐하께서 바른 결정을 내릴 수있도록 돕는 것이 도리이거늘 그대는 어찌 황제폐하의 명만 옳다하고 과인에게 강요하는가? '

'소관은 단지 황제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

"하하하!"

균은 어느정도 장거정의 기세가 눌렸다고 생각하자 한 번 크게 웃었다. 갑자기 작은 방에 울릴정도로 크게 웃는 균을 보는 장거정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균이 적어준 글에 얼굴이 질렸다.

'정말 우습구나. 그대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대는 원래 세자책봉사이지 황제폐하의 특사가 아니다. 그대가 황제폐하를 배알했을 때는 본국의 선대왕께서 나라를 잘 다스릴 때였다. 조선의 영토내에서 과인의 즉위와 선대왕마마의 승하를 알았다는 사신이 어찌 조선의 어린 왕이 걱정되어 10만 대군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황제폐하께 들었다는 말이냐? 그것이 정녕 사실이냐?'

"...."

 순간 방안은 무더운 여름철인데도 불구하고 냉기가 감돌았다. 장거정은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균의 말대로 장거정은 세자책봉사이다. 명에서는 균을 조선의 세자로 알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이다. 따라서 백번을 양보해서 정사에는 관심이 없이 별궁에 사는 명의 가정제가 장거정을 만났다고 해도 조선의 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만일 도교에 심취하여 도사를 꿈꾸던 가정제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그런 황명을 내렸다해도 사신의 명칭이 바뀐다. 이 정도면 외통수가 아니라 이미 당한 것이다.

'당했다. 조선을 쉽게 정복하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그런 간단한 사실을 망각하다니 아직도 나는 부족하구나. 본국으로 돌아가도 황명사칭죄로 귀양을 보내지거나 목이 달아날 것이 분명하다. 대학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는 명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거늘, 동방의 어린 왕에게 당하여 끝나다니....'

장거정이 사색이 되어 이런저런 사색에 빠지자 균은 즉시 증거가 되는 종이들을 잘 챙겨서 그 방을 빠져 나왔다. 뒤에서 정신을 차린 장거정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균은 무시하고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이제 균도 생각할 일이 많았다. 물론 앞으로 명의 재상이 되는 장거정을 살리느냐 죽이느냐하는 행복한 고민이었다. 그런 균의 머리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저놈도 진짜 장거정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

균의 의심과는 달리 진짜인 장거정은 균에게 충격을 받아서 태평관의 자신의 처소에서 나오지도 않고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교활한 조선왕. 처음에는 일부러 모습을 보이지 않고 우리를 유인하더니 그 다음에는 나와 내 대역을 간파하고 자신이 어리석은 척을 해서 방심시킨 후에 마지막으로는 나와 관련된 정보를 가지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후 큰 것을 터트려서 완전히 가두어 버리다니... 거기다 일부로 필담을 나누어 증거까지 확보하는 용의주도함이라니....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구나.'

장거정은 어설프게 일국을 삼키려는 계책을 만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명에 비해서는 작지만 조선은 상당한 규모를 가진 국가였다. 그래서 장거정의 예상과는 달리 조선에도 인물이 많았다. 당장 영의정인 이준경이라는 자를 보더라도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이상의 인물이고 조선의 어린 왕은 자신이 따르는 서계와도 비견할 정도로 무서운 자였다. 장거정의 머리에는 문득 자신이 사신으로 북경을 떠나기 전에 서계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이번에 자네가 가게되는 조선은 지금은 우리 대명제국의 일개 제후국. 아니 제후국취급을 받는 나라이지만 예전에는 우리 명을 침공하려고 했던 나라이네. 비록 우리 명에 비해서 작은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 역대 중원의 한족왕조들은 조선에게 한 번씩은 혼이 난 적이 있지. 특히나 고구려인가 하는 나라는 이곳 북경까지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네. 못 믿겠다고? 허허허 못 믿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결코 우습게보지는 말게나. 태조 홍무제께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은 나라라는 점은 꼭 명심하기를 바라네."

장거정은 서계의 충고를 한귀로는 듣고 한귀로는 흘린 것을 후회하며 다시 대책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조선왕에게 모든 증거가 넘어간 이상은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하다. 먼저 자신의 필적을 바꾸어서 자기의 글이 아니라고 우겨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귀양으로 끝날 문제가 멸문지화로 확대될 수도 있다.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떠올린 장거정은 머리를 흔들어서 그 망상을 지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방법이 생각이 났다.

다음날 경복궁으로 출근을 하던 영의정 이준경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희안한 관경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이준경뿐만 아니고 출근을 하던 조선관리들의 발걸음을 모두 붙잡게 했다. 뿐만 아니라 길을 지나가던 일반 백성들마저도 가든 길을 멈추고 놀라는 표정으로 경복궁의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장거정을 비록한 명의 사신단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한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국왕전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조선국왕전하.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푸~!"

이준경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 역시 이준경뿐 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인 듯 곳곳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서는 간단히 표현했지만 사실 명의 사신에 대한 접대는 따로 그 규칙이 있을 정도로 정중한 것이었다.

먼저 명의 사신이 온다는 보고를 평안도 관찰사가 조정에 올리면 조정은 영접도감을 설치하여 의주에서부터 서울까지 영접을 담당한다. 서울 근교에 이르면 세자나 영의정이 마중을 나갔으며 중요한 일의 경우 왕이 직접 나가기도 하였다. 이 때 모화관의 환영연회에서는 자리의 배치와 사용음악, 절의 횟수까지 정해져 있어서 얼마나 정중한 대접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환영연회가 끝나면 남대문을 통하여 서울에 입성하고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황제의 조칙을 접수했다. 그 뒤로는 연회가 계속된다. 큰 연회만 7번에 작은 연회가 십여 번이고 거기다 근처로 유람까지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문무백관이 모두 마중을 나가서 환송하고 엄청난 선물을 주어 보내는 바람에 국고의 낭비가 심했다고 한다.

그렇던 차에 그 콧대가 높은 명의 사신들이 경복궁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조선의 왕에게 결례를 사죄하고 있으니 그간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로 인상을 찌푸릴 일이 많았던 이준경과 조선의 관료들은 소리내어 웃지는 못하지만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포도청에서 나온 포졸들이 사신들을 구경하던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쳤다는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전하. 명의 사신단 일행이 경복궁앞에서 무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칙사에게 특별히 하신 말씀이라도 있으셨는지...?"

"영상대감. 대감답지않게 왜 말꼬리는 흐리시오. 과인은 칙사와 간단히 필담을 나주었을 뿐이오. 그렇고 아무래도 칙사들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은 대국에 대한 결례이니 태평관에서 연회를 베풀게 하고 영상께서 잘 위로해주시오. 아마도 그다지 횡포를 부리지는 않을 테니 영상대감의 주름살을 늘게는 하지 않을 것이오."

이준경은 칙사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않아서 균에게 물으러 왔지만 균은 속시원하게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연회를 베풀어주라는 말만 했다. 거기다 이번에도 균은 사신들을 접대하러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쯤 되자 이준경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조선왕은 일곱 번의 큰 잔치중에서 한번은 참가하여 칙사를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다음에는 세자나 영의정 등이 접대를 전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균은 국상을 핑계삼아서 이를 무시했는데 보통의 칙사라면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칠 일이다. 하지만 이번 칙사는 오히려 죄를 청하고 있으니 두 사람사이의 대화내용을 모르는 이준경은 얼굴에 노골적으로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균은 그마저 무시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태평관에서 이루어진 연회에서 명의 칙사인 장거정이하 모든 사신들의 행동이 더욱 공손해진 것을 이준경은 느낄 수 있었다. 당장 장거정만 해도 이준경에게 술을 따라 주면서 '말씀 좀 잘해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회피했다. 이준경은 균과 장거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을 실감하고는 내심 걱정했다. 아무리 균이 명의 칙사의 약점을 잡아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명의 판단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새로운 조선의 왕인 균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줄 가능성이 높았다.

다음날 장거정은 다시 균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균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균과 장거정이 만난 곳은 이번에도 또 다른 작은 방이었다. 균은 그곳에서 조촐한 주안상과 함께 장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시오. 칙사.'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우리가 서로 안본지 겨우 이틀인데 그런 문제야 있겠소? 그런데 요즘 칙사가 마음 고생이 많다고 들었소?'

'아니옵니다. 전하.'

오늘따라 균의 대답은 온순한 편이었다. 이미 유리한 입장에 있는 균이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 장거정에게는 더욱 불안했다. 또 이렇게 약한 척을 하다가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거정은 등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일단 기세자체가 차이가 나는 지라 균은 쉽게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잠시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균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과인이 칙사에게 제안할 것이 있소.'

'.....제안이라 하시면?'

'그것은 과인과 그대가 앞으로의 일에서 협력을 하자는 것이오.'

"예?"

난데없이 손을 잡자는 균의 말에 장거정은 말을 흘렸다. 방에는 둘밖에 없고 근처에는 조선의 호위무관 몇몇 밖에 있는지라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당장 눈앞의 균이 인상을 짓고 있어서 장거정은 자신의 결례를 사죄했다. 하지만 균은 그런 일쯤은 상관이 없는 듯 계속 붓을 들어서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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