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에서 온 칙사.
'과인은 아직 어리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있소. 그대가 황제폐하의 신하가 아니라면 아마 과인이 탐을 낼만큼 그대는 뛰어난 인재요. 그대가 과인에게 황명을 참칭한 죄는 당장 대국에 알려서 죽게 하여도 무방하지만 다 황제폐하와 대명제국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과인은 알고 있소.
조선은 황제께서 계신 북경에서 무척 가까운 거리의 나라요. 비록 우리 조선이 황제폐하와 대명을 충심으로 따르고는 있지만 북경을 기습 공격할 수 있은 거리의 나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 15년 전에 타타르의 알탄 칸이 했던 것처럼 말이오. 당연히 앞을 볼 줄 아는 신료라면 우리 조선의 역할이 대명제국의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대도 마찬가지기에 그런 향동을 자행했던 것이고.'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균의 말에 장거정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북경과 조선의 의주는 약 2천리.
요즘은 보병화된 군사력이지만 예전의 기마군단을 가진 조선군이라면 2,3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에 명나라의 수도 북경이 있다. 물론 북경근처에는 타타르족, 여진족등이 또 존재하지만 그 인구는 많지않다.
반면 조선은 일천만이 넘는 인구와 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며 예전에 무적의 기마군단으로 이름을 떨치던 나라이다. 조선의 선조 중에서 하나인 고구려는 이미 북경일대를 다스린바가 있고 또 그 앞의 고조선은 아예 북경일대가 근거지였다. 오죽하면 중국의 사서에 '어양일대는 원래 중국의 땅이 아니다.' 라는 기록도 있다. 어양은 중국 하북성 밀운의 옛 지명으로 북경일대이다.
명에게 있어서도 수도 북경의 입지는 무척 불안했다. 북경은 원래 태조 홍무제의 4남인 연왕이 지키는 변방이었다. 하지만 연왕이 반란에 성공하여 영락제로 등극하자 수도를 남경에서 북평으로 옮겨 그 이름을 북경으로 개칭한 것이다. 이렇게 변방에 위치한 명의 수도는 명의 국세가 강할때는 진출하는 데 유리했지만 약할 때는 수도가 포위되고 황제가 패전으로 포로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에 명제국의 앞날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던 장거정은 조선의 세자책봉요청이 들어오자 이웃나라인 조선을 알기위해서 스스로 자청을 해서 사신으로 왔다. 그의 생각에 조선왕국을 단지 명제국의 충실한 제후국중 하나로만 보기에는 조선의 국력은 상당하고 그 위치는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조선이 빈틈을 보이는 듯하자 명제국에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다가 자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장거정의 대처는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일부러 명의 칙사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새롭게 왕위에 올라 아직 왕권이 공고하지 않은 균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건방지기로 유명한 명의 사신들도 함부로 못하는 새로운 왕의 모습은 권위가 필요한 균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마치 조선후기의 조선통신사가 일본 에도막부의 권위를 세워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 것은 균에 대한 압박의 효과도 있다. 아무리 균이 우세하다고는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장거정은 그 연줄을 잘 잡아서 명의 중앙정계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개 변방의 제후국왕인 균으로써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해도 당시 명의 동향을 보아서는 함부로 상대하기 힘든 상대이다. 그러니 장거정의 행동은 자신이 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렇게 해줄 용의가 있으니 우리 서로 다투지 말자라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제반사정을 잘 아는 균은 이준경의 걱정과는 달리 적정한 선에서 장거정과의 협력을 통하여 조선과 자신의 이권을 챙기고자 생각하였다. 그래서 오늘 먼저 장거정에게 협력을 제시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죽여버리면 제일 좋겠지만 성공할 확률을 떨어진다. 명의 황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실권을 내각수보 서계가 쥐고있는 상황에서 균이 확보한 약점은 그 효과가 반감된다. 어쩌면 균에게도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그러기에 균이 이처럼 우호적인 모습으로 장거정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충심에서 나온 문제라는 것을 과인도 알고 있으니 황제폐하의 충실한 제후인 과인이 계속 문제를 삼는다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오. 그래서 이틀 전에 우리가 나눈 대화는 어차피 비공식석상에서 한 이야기니 과인이 잘못 들은 것으로 하리다. 그런데 과인이 어린 나이에 선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그대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소. 물론 황제폐하와 대명제국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달리 생각해보면 이익이 되는 일들이니 그대도 부담이 없을 것이라 생각을 하오.'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제가 최선을 다하여 전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공들일 필요도 없는 일들이니 가볍게 생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처리를 하면 되는 일들이오. 먼저 앞서 과인이 제시한 종계개정문제와 과인의 즉위승인등이 빨리 이루어지게 해주시오. 그 이유야 과인이 누누이 말했으니 그대도 잘 알 것이라고 믿겠소. 또한 당연히 이루어지는 일들이니 그대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가볍게 끝날 일들이오.
또한 요즘 대국에서 은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말들이 많은데 본국 역시 은이 많이 나는 국가가 아니라서 왜국에서 수입을 하여 조공으로 바치는지라 막대한 국고를 소모하고 있소. 그대도 잘 알겠지만 우리 조선에는 단천은광이라는 큰 은광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수요을 겨우 충당하는 수준이라 과인으로써는 난감하니 대신 다른 물품을 조공으로 바칠 수 있도록 해주시오.'
'예. 전하. 그 정도는 제가 북경으로 돌아가서 서계 공에게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거정은 균의 제안이 예상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돌렸다는 생각을 했다. 종계개정이나 즉위승인은 당연히 해주는 것이고 조공품목의 변경은 자신이 보고만 잘 해도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였다. 장거정의 실수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제안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보이는 균의 제안에 장거정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선에 흉년이 심하게 들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이오. 그런데 다른 칙사들이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서 많은 물건과 뇌물을 받아가니 조선의 평안도와 황해도의 궁핍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오. 물론 황제폐하을 대신하여 멀고먼 조선에 오는 칙사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조선의 작은 땅덩어리로는 버거운 요구가 자주 있어서 본국의 선왕께서도 많이 고심을 하시었소. 그대가 이런 우리의 사정을 대국의 조정에 말하여 우리의 부담을 조금만 줄여준다면 과인도 그대의 노고를 잊지 않고 보답을 할 것이오.'
이밖에도 균이 요구한 사항은 제법 많았지만 요약해본다면 조선과 명의 사이의 외교문제등 여러문제에서 명의 횡포를 없게 해달라는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별로 없었지만 조공을 제외한 추가 부담의 축소와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방지등의 문제등은 아직 장거정의 지위로는 해결하기 힘들었다.
'전하.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모두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들입니다. 최근에 우리 조정(명나라 조정)에 일이 많아서 그러한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은 제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를 제외한 우리 조정대신들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으며 또한 저의 지위가 낮아서 확답을 드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장거정의 대답을 들은 균은 그 정도는 예상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장거정은 내각에 입각한 권력가가 아니다. 아직은 내각수보 서계의 도움을 받아서 출세가도에 오르는 관리에 불과하니 유망한 존재이기는 해도 절대적인 권한은 없다. 하지만 균은 백과사전을 본 인물이다. 당연히 유명한 명의 재상인 장거정도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과인의 부탁은 지금 당장해 달라는 것이 아니오. 내가 보기에 그대는 크게 될 인물이오. 그러기에 미리 부탁을 해놓자는 것이지 지금 무리하게 한다고 해야 우리 둘에게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소? 내가 보기에 그대는 앞으로 수년 내로 대학사가 되어 내각에 들어갈 만큼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대명의 인재요. 당당한 대명의 재상이 될 사람이 그정도야 못하겠소? 과인은 그것을 보고 부탁을 한 것이지 무리한 청을 한 것이 아니니 그대는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오.'
'전하. 제가 수년 내로 대학사가 되어 내각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다니 너무 저를 과대평가를 하신 듯 합니다.'
자신이 수년 내에 대학사가 된다는 말을 들은 장거정은 놀라서 고개를 높이 들어서 균을 보았다. 균은 특유의 살짝 미소를 지은 표정으로 장거정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이 무척 맑은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균은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아는 장거정의 정보를 조합하여 그럴듯한 말을 꾸며냈다.
'칙사. 그대는 과인이 그렇게 거짓을 말할 사람으로 보이시오?'
'아니옵니다. 전하.'
'그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수년 내로 대학사가 될 것이고 동쪽과 관련이 깊을 것이오. 그대를 이끌어준 그대의 친구는 곧 실각을 하지만 그대는 계속 승진하여 세 번째의 아이를 만나서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아이를 통하여 그대의 꿈을 이루지만 그 아이가 그대의 꿈을 망칠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나중에는 그대가 다 알게 되는 일이니 궁금해 할 것이 없소. 궁금하면 나중에 점을 보는 사람을 찾아가 보시오.'
장거정은 호북성 강릉에서 태어나서 23세에 진사가 되었다. 그 뒤로 서계를 친구로 만나서 승진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여 1567년 동각대학사로 내각에 입각하여 융경제(명 13대 목종)때부터 재상으로 일하였으나 그의 친구 서계는 고공에 의해서 실각하였다. 만력제(명 14대 신종)가 즉위하자 황태후와 환관 풍보등과 손을 잡고 고공을 물리치고 내각수보가 되어 죽을 때가지 황제의 스승으로 정권을 담당하여 쇠퇴하던 명의 국운을 되돌린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가문은 몰락하고 만력제에 의하여 명은 쇠망의 길로 접어든다.
균이 말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아직 명에는 자신이 역사에 끼친 영향이 없다는 판단하에 내린 예언인데 이미 장거정이 조선에 와서 균과 교류를 한 것 자체가 명에 대한 영향이므로 얼마나 들어맞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균의 말을 들은 장거정의 표정은 미묘했다. 입으로는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이미 젊었을 때 들어본 말이다. 그런 말을 이런 곳에서 다시 들으니 자신의 상대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를 장거정은 느꼈다.
상대는 비록 어리게 보여도 자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자신의 미래까지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또한 자신의 실수이기는 하지만 자신도 잊고 넘어간 문제를 정확히 집어냈고 그전에 자신과의 대결에서도 한 치의 물러남이 없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전왕의 친자식이 아닌데도 조선의 정세는 안정적이었다. 이는 신왕의 능력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래서 장거정이 내린 결론은 새로운 조선왕은 열네 살 소년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이 다시 붓을 들어서 생각에 빠진 장거정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것이야 나중에는 알게 되는 일이니 그냥 넘겨두도록 합시다. 과인은 그대에게 힘든 일을 시킬 생각이 없소. 과인은 단지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과인과 우리 왕실의 숙원을 해결하고 대국과 우리 조선이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고 싶은 것이오. 이는 대명제국의 번영을 원하는 그대의 마음도 같을 것이라 생각하오.'
여기까지 글을 마친 균은 서안(책상)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장거정에게 주었다. 장거정이 열어보니 거기에는 상당한 양의 금과 보석이 들어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균의 선물에 장거정은 약간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균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균이 가지고 있는 증거물인 필담모음이다. 그것이 균의 손에 있는 한 장거정은 계속 균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균은 다시 답장을 주었다.
'그 돈은 과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대가 필요할 것 같아서 주는 것이오. 또한 그대같은 대국의 인물을 만난 것도 무척 반가워서 주는 것이니 받아두시오. 그리고 이제 과인이 그대를 태악으로 부르고 싶은데 괜찮겠소?'
태악은 장거정의 호이다. 옛날에는 자신의 본 이름보다는 주로 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균은 지금 우리 사이 좋게 지내자는 뜻으로 태악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한 것이다. 장거정이 좋다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균은 서안에서 책을 한 권 꺼내서 장거정에게 보여주었다. 장거정이 살펴보니 자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필담모음집이었다.
"여봐라. 지금 즉시 청동화로를 가지고 오너라."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하는 장거정을 본 균은 밖에 대기하던 내관에게 청동화로를 들고 오게했다. 그리고는 필담모음집을 일일이 찢고 태웠다. 매운 연기가 방을 채웠지만 장거정은 불속으로 사라져가는 필담모음집을 보면서 어린 조선왕의 대범한 행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것을 가지고 자신을 부려먹을 수도 있을텐데 자신과 친하게 지내겠다고 스스로 태워버리는 모습에 조선에도 큰 인물이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 인물이 자신과 친교를 맺으려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하고 또한 반가웠다.
그 뒤의 연회에는 균이 직접 참가하여 마치 절친한 친구처럼 장거정을 대접하였다. 비록 국상중이라서 웃고 떠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균의 대접에는 가식이 보이지 않아서 장거정은 그 모습을 보고 균이 진심으로 자신을 대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선을 무시하고 차지하고자 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다시 장거정이 돌아가는 날이 되자 균은 몸소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벽제관(명의 사신을 접견하는 곳중 하나.)까지 마중을 하고 역대 명나라 사신들에 비하여 두 배나 정도로 푸짐한 선물을 안겨보냈다. 물론 균이 준 주머니의 재물은 제외하고도 그랬으니 호조판서가 대성통곡을 했다는 소문이 돌만큼 엄청난 접대였다.
장거정이 돌아간 후 균은 자신의 거처인 강녕전으로 돌아가서 미소를 지었다.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장거정의 마음을 얻었으니 그 이상의 가치로써 균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장거정은 무척이나 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신세를 진 셈이 된 균의 가벼운 부탁이라면 다 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명의 조정은 친조선파가 집권하게 되니 큰 이익이다. 하지만 만일 역사서와는 다른 인물이라면 지금 균이 만지고 있는 필담모음집 원본이 명황제에게 넘겨질 것이다. 균은 준비성이 철저한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