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228)

 균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들 명의 세자책봉사인 장거정이 돌아간지 며칠이 지나자 원상대신인 영의정 이준경과 좌의정 이명등이 균을 알현하기 위하여 균의 거처인 강녕전으로 찾아왔다. 강녕전에서도 균이 있는 방을 찾아가던 이준경의 눈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내관과 궁녀들이 들어왔다. 그들만 보아서는 이 곳이 강녕전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이준경의 눈에 익은 자들은 없었다. 어느덧 균의 방앞에 와서야 이준경은 자신이 아는 내관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그대는 동궁전의 정내관이 아닌가? 설마 대전내관으로 승진한 것인가?"

"예. 대감.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배려덕분에 계속해서 전하를 모시게 되는 성은을 받았사옵니다."

"오호. 이 사람. 그래서 주상전하께서 자네를 상온(정 3품)으로 올리라는 어명을 내리셨던 모양일세. 이미 비변사에서도 별 무리없이 통과했으니 자네도 곧 영감소리를 들겠구먼. 앞으로도 주상전하를 위해서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야. 그건 그렇고 주상전하를 뵈로 왔으니 주상전하께 고해주시게."

"예, 대감. 전하. 영의정 이준경 입시이옵니다."

"들라하라."

스르륵 열리는 문과 함께 정내관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자 이준경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균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곳까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균은 책을 읽다가 이준경들을 보고는 책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서 그들의 절을 받았다. 비록 균은 이제 14살이고 이준경은 환갑이 훨씬 지난 노인이기는 하지만 균은 전혀 거리낌이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그래 두 분 대감은 무슨 일로 과인을 찾아오셨소?"

"예. 전하. 어느덧 선대왕마마께서 승하하신지도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간 전하께서 선대왕마마을 생각하시고 슬퍼하시느라 소신들이 나라의 정무를 돌보았으나 이제는 주상전하께서 원상을 폐하시고 친히 정사를 돌보심이 옳다고 사료되어 이를 감히 청하옵니다. 바라옵건데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하하하. 외숙 때문에 두 분 대감이 많이 힘드신 모양이구려. 하긴 과인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오. 자식된 자로 어마마마의 동생이며 과인의 외숙을 함부로 대하기도 힘들고... 하지만 그냥 나두었다가 윤원형의 전례를 따를 가능성이 있으니 과인이 적절히 조치하겠소. 그러나 원상을 폐지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니 일부분의 정무는 과인이 돌보고 나머지는 대감들이 계속 처리해 주는 것으로 합시다."

"하오나 전하....."

명종이 승하한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균은 능히 나라의 일을 돌볼 능력이 있는데도 원상제를 폐지하지 않고 대부분의 정무를 원상대신들에게 전가시켰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대신들이 가끔식 균을 찾아서 청을 넣어보았지만 균은 완강할 정도로 원상제 폐지에 반대하였다. 지금 벌어지는 실랑이도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중의 하나로 아마 삼일후에는 다시 벌어질 것이다.

사실 균에 원상제를 폐지하지 않고 나랏일에 관심을 끄고 있는 것은 내부의 일 때문이다. 앞서 이준경이 보았던 것처럼 균은 왕대비 박씨의 도움을 받아가며 동궁전 소속의 내관과 궁녀들을 챙겨서 자신의 주변에 다시 포진시켰다. 그리고 원래 강녕전 소속의 내관과 궁녀들은 명종을 따랐기에 균이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근무를 하게 했다.

왜 이런 일을 균이 벌었느냐 하면 바로 대비 심씨때문이다. 즉위식전의 일명 옥새탈취작전이후 균이 왕대비 박씨와 손을 잡은 모양을 취하자 박씨와 불편한 관계이던 대비 심씨가 균을 못 마땅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대비 심씨를 내세워 대리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던 심의겸등이 균의 험담을 한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경복궁은 알게 모르게 균-왕대비 연합과 대비 심씨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대비 심씨의 영향력이 강하다고 판단되는 강녕전의 내관과 상궁나인들을 믿고 살기에는 너무 위험했기에 균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동궁전의 내관과 상궁나인들을 주변에 포진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덕분에 동궁전의 양상궁이 제조상궁이 되어 경복궁 전체의 궁녀들을 관리하게 되었고 역시 동궁전 소속의 내관 정성우가 당상관의 관직인 상온(정3품)으로 임명된 후 내시부를 관장하게 되어 균의 최근방의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내시가 웬 호위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시의 임무중의 하나가 호위이다. 하지만 무예는 거의 없어서 대신 칼 맞고 죽는 정도가 고작이니 정확히는 호종(모시고 따른다.)이 정확한 표현이다.

아무튼 균은 나랏일은 원상대신들에게 맞긴채 경복궁내의 위험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까딱하면 자신도 인종처럼 독을 먹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균은 꼼꼼히 살펴서 믿을 만한 자들만 궁내의 여러 요직에 포진시켰다. 물론 궁녀들 쪽까지도 왕대비 박씨의 도움을 얻어서 새로 포진시키는 바람에 궁밖의 세력과 손이 닿은 내관과 궁녀들은 대부분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궁을 떠나야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균이 나랏일은 내버려둔 채 경복궁의 일에만 신경을 쓰자 결국에는 이를 지켜보던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균에게 상소를 올렸다. 왕이 즉위하자마자 궁내의 인사에 관여하고 자신의 측근을 심는 것은 원래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의 균은 너무 노골적이었고 심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전하는 이 나라의 군주이시옵니다. 무릇 군주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의무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지금 전하께오서는 대비마마들께서 맡으셔야 할 집안일에만 온 신경을 쏟고 계시니 이는 군주의 도리가 아니며 또한 많은 자들이 우려하고 있는 일이옵니다. 이미 선대왕께서 승하하시어 국정에 차질이 생긴지 여러 날이 지났나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이라도 국정에 전념하시어 군주로써의 위엄을 되찾으시옵소서.'

궁내의 일은 대비들에게 맞기고 국정을 돌보라는 뜻의 상소문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균의 서안(책상)위를 가득 채웠다. 덕분에 도승지만 균을 대신하여 죽어나는 실정이었다. 하루에도 똑같은 내용의 답장을 수십 수백 장을 써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 성현께서 남기신 말중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라는 말이 있다. 즉 집안이 편안하지 않으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어서 천하를 평안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과인이 지금하는 일은 마음을 놓고 국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경들은 이에 상관말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라.'

정치에 입문한지 얼마 안 되는 젊은 관리들은 균의 소심함을 걱정하고 한탄하였다. 저렇게 집안일에만 신경을 쓰면 언제 나랏일을 보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노대신들은 저런 사전작업을 하는 왕을 보고 놀라는 자가 많았다. 원래 세자시절부터 범상치는 않은 자였지만 저렇게 궁내의 세력들을 일소시키는 것이야 말로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균은 자신의 친위세력도 같이 손을 보기 시작했다. 조선의 병종에서 왕궁을 지키는 금군의 역할을 하는 부서는 약 일곱 군데였다. 가장 유명한 내금위을 비롯하여 겸사복, 정로위, 우림위와 별시위 선전관, 수문장등이 그것이다.

내금위는 내금위장이 지휘하는 약 190명의 정예군으로써 상비군이다. 하지만 무재가 뛰어나서 지방의 군지휘관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 예비전력을 확보하여 약 250~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겸사복은 역시 내금위과 비슷한 부대로 겸사복장이 지휘를 하며 병력은 약 50명이고 세자익위사가 설치되기 전에 세자를 호위하는 부대이기에 앞서 균을 경복궁까지 호위한 바 있다.

우림위는 우림위장이 지휘하는 150명의 병력으로 서얼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다. 주 임무는 내금위의 병력부족시 지원이다. 정로위는 지방토호들의 자제로 구성된 부대로 금군이 지방군지휘관으로 파견되는 것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평시에는 금군으로써 활동했지만 전시에는 변방까지 파견이 되는 부대라서 유사시 왕을 지켜주기에는 부족한 부대다. 그 인원은 약 1500명이다.

별시위는 용양위(중앙군인오위중 하나)의 예하부대로 원래는 금군이었지만 지금은 중앙군 기마병으로 운용이 되는 부대다. 병력은 역시 1500명이다. 또한 선전관, 수문장등의 무관직이 있으며 이들의 수만 약 100여명에 이른다. 이밖에도 금군의 성격을 가진 부대는 많다. 심지어는 포도청도 왕의 행차시에는 경호를 하니 금군이다. 하지만 정확한 금군의 개념에 포함되는 부대는 위의 소개된 부대들이 전부이다.

5개 부대와 2개 직종을 합쳐서 총병력은 3500여명의 대규모 병력이지만 이중의 태반인 별시위와 정로위는 금군의 성격도 있지만 중앙군의 정예부대의 성격이 강하여 실제 금군은 약 오백에서 육백명수준이었다. 균은 이러한 부대들을 하나의 강력한 부대로 통합하여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보통의 조선왕들이라면 저정도가 무력의 전부지만 비금도주인 균은 아니었다. 그래서 균은 비금도로 선전관 도지철을 급파해서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또한 조정의 정식명령서가 전라도의 감영과 병영, 수영 그리고 지도관아에도 새로운 명령이 전달되었다.

이미 지도군수로 부임한지도 5년이 지나 임기를 다 채운 정인기는 두 가지 소식을 듣고는 기겁을 하여 앉아있던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적이 있었다. 하나는 명종의 급사로 조정의 업무가 일부 마비되어 일단 지도군수의 임무를 더 수행하는 바람에 아내과 딸이 있는 한성부로 돌아가지 못해서였고 또 하나는 셋째 조카인 균이 세자로 책봉되더니 보위를 물러받아 주상전하가 되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물론 정인기도 균이 비범하고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균이 잘 감춘다고 해도 정인기에게 부탁한 일이 하도 많아서 정인기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카 균이 절대 반란은 꿈도 꾸지 않겠다고 혈서로 약속한 적도 있고 또한 균이 하는 일을 돕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익이 떨어지는지라 특별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한은 눈감아주고 있었는데 반란은 아니지만 합법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해 버릴 줄을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매형인 이초의 부탁을 듣고 일곱 살의 어린 조카를 보살펴주기로 마음먹을 때만해도 균은 왕위와는 하늘과 땅차이 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균의 사업이 보기좋게 성공을 하고 비금도의 주인이 되어 자신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자 정인기는 남달리 영특한 조카가 생각을 잘못하여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지 고심을 해야했다. 그런데 조카는 그런 숙부의 마음이라도 아는지 순회세자의 글동무가 되어 신망을 쌓더니 순회세자의 죽음이후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부상하여 결국에는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매형, 매형의 말대로 우리 균이가 아니 이제는 주상전하시지... 주상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매형 말은 안 믿고 그냥 매형의 남겨진 식솔들을 보살핀다는 생각으로 조금 도왔을 뿐인데 이제는 저도 윤원형처럼 주상전하의 외숙이 되었습니다. 주상전하께서 보위에 오르는 것을 매형도 살아서 눈으로 보았어야 하는건데.... 하긴 저도 지방관이라서 보지는 못했지만 한성부의 누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습니다. 그간 매형없이 누님 혼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습니까?'

이런 감상에 빠져서 일도 제대로 안한채 며칠을 허우적거리던 정인기에게 드리어 균의 어명이 내려왔다. 정인기가 바라던 대로 다른 관직을 제수하는 어명이었다.

"이미 임기가 다한 지도군수 정인기를 군수직에서 해임하고 새로이 나주목사로 임명한다. 정인기는 즉시 과인의 명을 받들어 임지로 부임하여 목민관으로써 최선을 다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하라."

나주목사는 정3품의 고위관직이다. 앞서 이야기를 했지만 나주목은 지도군등 작은 군현을 거느리며 전국에 20개에 불과한 큰 고을이다. 고작 섬들로 이루어진 지도군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위직이지만 내심 중앙의 관직을 받아서 제대로 못 본 처와 어린 딸을 보고 싶었던 정인기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주상전하께서도 무심하시지. 아직 얼굴도 못 본 딸과 5년간 독수공방을 한 내 처는 어떻게 하라고? 뻔히 사정을 아시면서도 이런 어명을 내리시다니...'

절망에 빠져 다시 허우적거리는 정인기에게 선전관 도지철이 말했다. 그말을 들은 정인기는 지옥에 갔다가 다시 천당에 온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공식적인 어명이고 지금은 비공식적인 주상전하의 말씀입니다. 얼마 있지 않을 자리이니 숙부는 과인의 험담을 하지말라. 단지 숙부에게 경력을 쌓으라는 의미로 임명한 것이고 곧 숙모와 동생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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