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들 약간 시간을 돌려서 올해 초 균이 갓 세자로 즉위했을 무렵의 일이다. 비금도의 성치산성은 비금도일대의 균의 세력을 권장하는 곳으로 현재 최고 책임자는 수석부장 황재훈이었다. 균이 없던 이년동안 나름대로 비금도를 잘 이끌어온 황재훈은 어느날 급히 각 부장들을 회의장으로 불러들였다.
"수석부장. 무슨 일인데 우리들을 급히 불렀나?"
"한성부의 하성군께서 비정기암호문을 보내오셨네."
"그정도야 자주 있지는 않아도 가끔 있던 일이 아닌가? 그리고 수석부장인 자네가 혼자서 처리해오던 사안들이고... 혹시....우려하던 일인가?"
"설마 하성군께서 반정이라도 꾀하신 것입니까?"
눈치 없는 농업부장 이영식이 꺼낸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각 부장들이 균을 따르면서 내심 걱정하던 것이 균의 반란이었다. 당시에 순회세자가 죽고 균이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꼭 균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 부장들이 보는 균은 보통은 넘는 인물이었고 만일에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다고 하면 이를 승복할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또한 당시 비금도의 군사력은 약 2천여 명. 약체화된 조선군의 일개 병영 못지않은 강대한 군사력이다. 거기에 56소총이라는 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니 최소한 전라도 일대의 조선군의 전력쯤은 상대할 정도였다. 이러한 강대한 전력은 균과 비금도에는 양날의 칼이다. 강력한 군사력은 균이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후에도 다시 왕위를 넘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설사 균이 왕위계승권을 포기한다고 해도 이러한 세력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약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균은 합법적인 왕위계승이 불가능하면 살기위해서 내전을 벌이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부장들이기에 최근에 들리는 균의 소문(명종의 병시중을 들 정도로 사랑을 받는다. 대비의 병시중을 들면서 저승사자마저 쫒아냈다등)들을 들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갑작스러운 비정기통신문 때문에 모두 소집되자 은근히 긴장을 했다.
혹시나 일이 틀렸으니 전쟁을 준비하라는 지령이 내려온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생활터전 그리고 주군인 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정군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다면 이기던 지던 큰 피해가 예상되기에 그들의 표정이 굳어진 것이다.
"꽝!"
엄청난 소리와 함께 탁자 하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 탁자를 부순 것은 경비단의 단장인 임꺽정으로 손바닥을 내리친 것만으로도 탁자 하나가 그 수명을 다해버렸다. 하지만 회의장안의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단지 임꺽정에게 시선을 한 번 돌리는 정도가 고작일 뿐 이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까지 놀랄 필요는 없었다.
"하성군마마께서 반정을 일으키든 전쟁을 일으키든 우리는 하성군마마의 은혜를 입은 부하들이다. 아니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비금도의 이만여주민이 다 하성군마마의 은덕으로 살아가는 데 왜 그런 것 따위를 고민하는 거야! 마마님께서 이년간 자리를 비우셨다고 그새 마음이 바뀐 것들인가?"
역시나 다혈질인 임꺽정이 부장들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화를 냈다. 그에게 있어서 균은 생명의 은인이다. 설사 균이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다고는 해도 자신을 따르는 1만의 백성들까지 살려주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임꺽정을 비롯하여 황해도 출신의 주민들은 균에 대한 충성심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하지만 다른 부장들과 전라도 출신의 주민들이 가진 충성심도 약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다른 것을 걱정했다.
"임단장, 그 것이 무슨 소리인가? 우리들도 다 하성군 마마님의 배려로 이 자리에 올랐거늘 어찌 그런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겠는가? 우리는 단지 반정이 일어나게 된다면 적지인 한성부에 계시는 하성군마마의 안위와 또한 관군토벌대와의 전투시 죽어갈 우리 병사들과 주민들을 걱정하는 것이네."
임꺽정을 제외한 다른 부장들도 균을 믿고 따랐다. 그들에게 균은 꿈에나 그리던 생활을 누리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균이 돈을 아낀다고 제대로 된 대우를 안했다면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나 균은 주민들을 위해서도 돈을 아끼는 않았다. 매일 재정부장 김호진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충분한 돈을 주민들과 부하들에게 투입하여 지금의 비금도는 조선과는 확실히 다른 살기 좋은 세상이었다. 또한 그러한 좋은 결과를 내보이는 균을 배신할 멍청이는 최소한 이 회의장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기부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가 하성군마마를 버리고 어디를 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제가 이 곳에 오지 못했다면 저와 저의 가족들은 벌써 지난번 흉년때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 들어서 와서는 밥 한끼 굶은 적도 없고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서 좋은 대우까지 받고 있는데 어찌 마마님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옳습니다. 마마님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
임꺽정의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더니 당장이라도 반정군을 일으켜서 한성부에 갖혀있는(?) 균을 구출하자는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먼저 부장들을 소집해서 이야기를 꺼낸 황재훈은 난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반출신인 정보부장 박수익을 보았더니 어느새 다른 부장들과 함께 지도까지 꺼내놓고 균 구출계획 및 반정계획을 토의하고 있었다.
"잠깐!"
보다 못한 황재훈이 각 부장들을 말리더니 다시 제자리에 앉히고 지도는 빼앗은 후에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하성군 마마님께서 의금부에 갖혀있다고 했소? 하성군 마마님께서 비정기암호문을 보내신 것일 뿐이오. 그런데 이번 암호문은 모든 부장들 앞에서 개봉하고 공개하라는 지령이 있어서 이렇게 각 부장들을 모은 것이니 모두들 흥분하지 마시오."
황재훈의 말에 각 부장들은 벌쭘했는지 헛기침을 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이가 많았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황재훈은 균의 봉서에서 봉인을 뜯고 그 내용을 꺼내서 먼저 박수익에게 주어 해독하게 했다. 그도 암호문은 알았지만 그렇게 다른 부장에게 해독을 시켜서 자신이 균의 명령을 중간에서 바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한참 균의 암호문을 정상적인 한글로 해독하던 박수익이 얼어붙었다.
"정보부장, 왜 그러시오? 몸이 안 좋으신게요?"
"박부장님. 박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보나마나 하성군 마마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신거다. 이봐 서유생 경비단에 비상령내려. 내가 직접 하성군 마마님을 구출하겠다."
얼어붙은 박수익을 보고는 각 부장들은 최악의 사태가 생긴 것이 아닌가를 걱정했다. 만일 균이 의금부에 잡혀가서 사약이라도 받는 불길한 상상이 부장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얼어붙었던 박수익이 조금씩 얼굴근육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른 부장들에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 조선천지에 하성군이라는 불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정말 우리 하성군 마마님께서 큰 일이 나신 것인가?"
박수익의 말에 차분히 있던 수석부장 황재훈마저도 얼굴색이 변했다. 다른 부장들도 이는 마찬가지였지만 임꺽정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지 온 몸을 부들거렸다. 까딱하면 흥분한 임꺽정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수익은 서둘러 다음을 말했다.
"이제는 하성군마마가 아니고 세자저하십니다. 하성군께서 이 나라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시었답니다."
"오호 천지신명이시어....."
"하성군께서 세자저하가 되시다니.... 우리 비금도 뿐만 아니라 이나라 조선의 홍복이로다."
"마마님께서 세자의 위에 오르셨다니 이렇게 기쁠 때가...."
일순간에 비금도전체는 잔치 분위기로 휩싸였다. 아니 실제로 부장들이 협의하여 섬 전체에 큰 잔치를 열었다. 비금도의 유일한 단점인 조선본토와의 고립이 해결되는 순간이다. 이제 점차 조선도 비금도처럼 살기 좋아질 것이고 관군토벌대를 경계하여 숨 죽여 숨어지낼 필요도 줄어든다. 무엇보다도 마음놓고 살기좋아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주민들은 기뻐했다. 아니 했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인 그해 7월 전라도 나주목. 작년에 나주목사가 윤원형의 일파라는 이유로 바뀌었는데 또 별다른 이유없이 임기를 4년이나 남겨둔 현재의 목사가 한성부로 승진이 되어 올라가고 새로운 목사가 곧 부임한다는 소식에 나주의 주민들은 물론 나주의 소금상계도 어수선했다. 특히나 소금상계는 경재명상단이 유통시키는 일명 백소금(천일염)의 등장과 생산량증대로 한동안 홍역을 치렀던지라 이번의 새로운 사또의 부임이 득이 될지 해가 될지에 온 신경을 세우고 있었다.
덕분에 경재명상단과 비금도의 나주지부역시 한창 소금이 생산되는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좋지않아서 거래량을 크게 줄이고 나름대로 조용하게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균이 세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직 비금도의 정체가 들어나면 곤란하다는 지시를 받은 비금도의 황재훈은 다시 나주거점에도 자중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 결과가 예년과는 다른 조용한 여름이었다. 그래서 나주지부장 김형중역시 시간이 많은지라 죽부인을 안고 낮잠 즐기고 있다.
잘 알겠지만 죽부인은 대나무로 만든 길다란 원통형의 물건으로 속이 비어 있어서 안고 자면 무척이나 시원하다. 특히 대나무의 차가운 느낌은 무더운 여름에 선풍기도 없이 여름을 보내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이였다. 오죽하면 죽부인은 자식에게도 안 물려준다는 소리가 있을 만큼 우리 선조들의 사랑을 받은 물건이다. 그래서 김형중도 죽부인을 애용했고 그 날도 죽부인을 꼭 껴안고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리오너라! 이리오너라!"
"밖에 누구시오?"
"한성부에서 내려온 선전관이다. 여기 김형중이라는 자가 있느냐?"
"예. 선전관나으리. 이 곳에 거처하는 분은 맞습니다. 즉시 문을 열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 하나가 문을 여는 사이 다른 하인 하나가 김형중을 깨우러 왔다. 하지만 김형중은 이미 그런 소리를 다 들고는 먼저 비밀장부를 감추고 비금도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게 하기위해서 다른 증거물을 치우느라 잠시 부산했다. 균이 세자라고는 하지만 (균이 선전관 도지철을 파견한 것이 즉위전인데 덕분에 도지철이 균의 즉위소식보다 먼저 전라도에 도착했다.)이직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기에 김형중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를 한 후에야 마당으로 나갔다.
"그대가 김형중인가? 왜 이렇게 늦게 나오나?"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요즘들어 워낙 남도의 더위가 심한지라 의관을 다시 차려 입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하긴 전라도가 덥기는 하군. 자 이걸 받게."
김형중이 더워서 옷을 많이 벗은 탓에 옷을 다시 입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핑계를 대자 선전관 도지철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서 하나를 내밀었다. 김형중이 받아보니 균이 보내는 암호문이었다. 균의 암호문이 조정의 신하인 선전관을 통해서 전달되자 놀란 김형중이 덥썩하고 봉서를 받았다. 그러자 도지철이 한마디를 했다.
"역시 주상전하의 말씀대로군. 그렇게 놀라다니..."
하지만 김형중은 그런 말에는 관심이 없었고 즉시 봉서를 뜯어보았다.
'김지부장. 한창 여름이니 요즘 소금판다고 수고가 많겠군. 많이 놀랐겠지? 걱정은 말게나 선전관은 내 신하니까. 나주까지 소식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힘들게 숨길 필요는 없네. 이제 조선의 왕은 과인이니까. 그대는 선전관을 비금도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최대한 편의를 봐주게.'
김형중은 그제서야 선전관 도지철을 바라보았다. 도지철도 살짝 웃으면서 김형중의 어께를 두들겨주면서 말했다.
"주상전하께서 내가 대신 그대의 어께를 두들겨주면서 이 말도 전하라고 말씀하셨네. 이제 자네의 꿈도 얼마남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