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들 그날 밤 비금도의 본단에 나주지부장 김형중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비밀암호문를 접수한 수석부장 황재훈은 즉시 각 부장들을 소환했다. 그 비밀암호문에는 최상급의 보고임을 뜻하는 특급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어서 자기 혼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재훈은 부장들이 다 소집된 후에야 그 암호문의 봉인을 뜯고는 병기부장인 나원호에게 주어 해독을 하게 했다. 암호문을 해독한 나원호는 갑자기 그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부장들에게 외쳤다.
"하성군 마마, 아니 세자저하께서 이 나라 조선의 새로운 주상전하가 되시었소!"
"아니 나부장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세자저하께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어떻게 세자의 위에 오르신지 일년도 안 된 세자께서 다시 보위에 오르신다는 말입니까? 주상전하께서 양위를 하신다고 해도 세자저하는 아직은 어린 나이십니다!"
"선대왕마마께서 복상사를 하셨다고 하네."
"....."
나원호의 말에 모든 부장들이 말문이 막히었다. 모두 어이가 없는 것이다. 죽은 명종의 나이 이제 서른두 살. 이렇게 젊은 사람이 열네 살 어린 꼬마에게 일을 떠넘기고 자기는 여색을 탐하다가 죽어버렸다니 선대왕만 아니라도 당장 욕이 나올만한 일이었다. 근엄한 왕실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인 것이다.
"선대왕께서 승하하신 후 세자저하께서는 선전관을 이쪽으로 파견하셨는데 이미 나주지부장 김형중이 접대를 맞고 있다고 하오. 아마 내일쯤이면 이 곳 비금도로 건너와서 새로운 주상전하의 어명을 전달한다고 하니 놀라지 말라는 김형중의 보고요."
"...."
아직 어린 균이 갑자기 왕이 되고 선전관을 통해서 명령을 하달한다는 말을 들은 부장들은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적지않게 놀란 듯 했다. 그전까지는 음지에서 자기를 숨기는 일에 주력해야 했는지만 이제는 양지에 나가 마음껏 다른 일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자신들은 반정세력이 아니다. 이제는 조선국왕을 근처에서 옹호하는 친위세력이 되었다. 아직 부장들은 그러한 변화를 실감을 하지는 못했지만 균의 즉위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사실이다.
"세자저하께서 이제는 보위에 올라서 조선천하를 호령하는 분이 되시었소.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여러 부장들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이제 우리는 전처럼 관군토벌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우리가 바로 관군이오. 아직 주상전하의 정확한 어명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부장들께서는 기존에 하던 그대로 맡은바 책임을 다하여 주상전하께 변하지 않는 우리의 충성을 보여야 할 것이오."
"수석부장님의 말씀이 극히 지당하오. 우리가 비록 주상전하의 가신이지만 주상전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라서 우리가 전하를 믿고 이상한 짓을 한다면 가만히 보아주실 분도 아니고 또한 우리들 스스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오. 이럴 때일수록 주상전하의 뜻을 받든다면 전하께서는 언제나 그래오셨듯이 먼저 우리의 노고를 생각해 주실 것이오. 그러니 각 부장들은 결코 경거망동을 하지말고 더욱 행동을 바르게 하시오."
수석부장 황재훈과 병기부장 나원호가 연이어서 다른 부장들에게 행동을 조심하라고 충고를 했다. 비록 그들이 임금의 가신이지만 상당수가 반란군에 속했던 인물이고 벼슬이 없는 평민들이기에 함부로 정체를 드러낸다면 균에게는 부담이 될 공산이 컸다. 따라서 아직은 균의 명을 기다려야 했다.
부장들이 균의 새로운 명령을 전달받기 위해 손꼽아 기다리던 선전관 도지철이 비금도에 도착한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김형중은 특별히 작고 빠른 배로 비금도로 보내주려고 하였지만 도지철이 질겁을 하는 바람에 정기적으로 비금도와 나주를 오가는 큰 배편으로 비금도로 향하게 했다. 균에게 간단한 언급만 받았지 비금도에 처음 와보는 도지철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풍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도지철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살이 피둥피둥 오른채 힘차게 뛰어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다. 고작 한성부내의 양반집 아이들이나 살이 올랐을 뿐 몰락한 양반은 물론 평민들의 아이들은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었는지 뛰어놀기는커녕 쭈그리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아니면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서 그 작은 고사리손을 놀려서 집안일을 돕는 것이 조선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얼마나 잘 먹었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 옷차림새도 깔끔하여 다른 곳의 아이들과 크게 비교되었다. 그 모습에 놀라서 이곳 저곳을 살펴보던 도지철에게 멀리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가왔다. 얼핏보면 조선군 정규병사들 같지만 사실은 비금도 경비단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군교(장교)가 도지철에게 다가오더니 간단히 군례를 올리고 말을 했다.
"나주에서 오신 선전관이십니까?"
"그렇소. 주상전하의 말씀을 전달해야하니 이 섬의 수석부장께 안내하시오."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여봐라. 뫼셔라!"
도지철은 군교을 따라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금도의 본단이 위치한 성치산성으로 향했다. 도지철과 호위병사들은 큰 길을 따라 두 군데의 마을을 더 지나쳐서 섬의 동쪽에 있는 성치산성의 서문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한 마디 잡담도 없이 묵묵히 대오를 맞추어 따라오는 모습에 도지철은 감탄을 했다. 이처럼 군기가 강한 병사들은 조선내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서문을 통과한 일행는 곧 바로 본단건물앞에 섰다. 보통의 관청건물보다도 큰 본단의 위용을 본 도지철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건물의 크기에 놀란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라던 균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다시 군교의 안내를 받아가며 도지철은 대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것에는 지난 5년간 꿈에도 잊지못하던 인물이 있었다.
"자네.... 수익이 아닌가?"
"아니 지철이. 이곳에는 어떻게....?"
"살아있었구만. 살아있었어."
원래 두 사람 모두 선전관으로 같이 근무한 친한 친구 관계였다. 5년만에 만나는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상관도 하지않고 얼싸안았다. 다른 부장들이야 저런 눈물겨운 만 보다는 균이 오랜만에 직접 내려 보내는 명령이 더 중요했지만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반가워하는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기에 그냥 두 사람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자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네. 평산에서 토벌군이 참패하고 자네의 잘려진 목이 황해도일대를 돌았다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꿈만 같구만."
"그래. 나도 그때는 죽는 줄 알았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렇게 살아남아서 주상전하의 가신중에 하나가 되었지."
"정말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이제 자네도 다시 선전관으로 복직할 수 있겠군. 아니 내 정신 좀 보게 주상전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주상전하의 말씀을 전할테니 비금도 수석부장 황재훈 이하 여러 부장들은 예를 표하시오."
다행이도 도지철은 공사는 분명한 인물이기에 곧 정신을 수습했다. 그러자 모든 부장이 균이 위치한 북쪽을 향해서 일제히 절을 올린 후에 도지철이 전해주는 균의 말을 들었다. 이제는 균의 말이 곧 어명이었다.
"과인은 이르노라. 선대왕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고 지금 선전관이 이 글을 전할 때라면 과인은 즉위식을 마친 후일 것이다. 과인이 어릴 적에 생부이신 덕흥군을 잃고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유지하고자 한성부에서 천리나 떨어진 전라도의 작은 섬에 염전을 만들고 이 염전과 섬 주민들을 지키키 위해서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이 어찌 과인이 혼자 한 일이겠는가? 모두다 어린 과인을 도와서 열심히 일을 해준 그대들의 공로다.
과인의 마음으로는 당장이라도 그대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크게 쓰고 싶지만 불행히도 과인은 선대왕마마의 친자가 아니라서 아직은 마음대로 국사를 돌볼 입장이 되지 않는다. 일단 비금도는 왕실의 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로 포함시키고 경비단은 전라우도 수영 산하의 비금진이라는 편제에 임시 배속시킨다. 하지만 두 곳의 지령은 없고 과인의 직접적인 어명을 따라서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이 될 것이다. 과인이 믿을 곳은 그대들 밖에 없어서 나중에 크게 쓸 것이니 그대들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과인의 뜻을 따라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장황한 내용의 글이지만 일단 비금도의 변화는 없다는 말이었다. 대신 내수사와 전라우수영에 배속시켜 비금도의 염전과 군대를 합법화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부장들 중에는 변화가 없다는 말에 조금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생각이 깊은 자들은 균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들을 잊지 않으려는 균의 배려에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사실 바로 그들을 불러 올리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조선에서 왕이 아닌 자가 저만한 자금력과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면 당장 반역으로 몰리게 된다. 이는 세자라도 마찬가지로 명종때 반란을 꿈꾸었다는 사유로 여러 세력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균은 비금도의 세력을 일시적으로 그런 공식적인 기관에 배속을 시켜서 합법화 시킨 후에 다시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들여 친위세력으로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단 내수사는 국왕의 직속기관이니 비금도 염전의 내수사 편입은 일도 아니었고 전라우수영 물론 전라감영과 전라병영에도 사람을 보내서 새롭게 비금진이라는 수군진을 하나 만들어 균의 사병이던 경비단을 합법적으로 비금도를 지키는 조선군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균의 최대 지지세력이자 최대 약점인 비금도는 합법적인 조선정부기관들로 거듭났다.
"하하하. 꼭 죽은 줄로만 자네가 이렇게 살아있다니... 그래서 전하께서 놀라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것 같네."
"하하하. 그러고 보면 주상전하도 참 대단하신 분이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혹시 전하께서 자네를 구해주시고 부하로 거두어 주신 것인가?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 성은이 망극하겠군."
"아니네. 사실은 평산전투때 임꺽정군은 현 주상전하께서 지휘하셨네."
어느덧 박수익의 처소에서 간단한 주안상을 준비하여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풀던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 박수익과 균의 관계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런 박수익의 말을 들은 도지철은 의하하게 여겼는지 고개를 가우뚱거리며 반문을 했다.
"참 이 사람 수익이.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많이 늘었군. 평산전투때 주상전하의 보령이 고작 일곱 살 내지 여덞 살이신데 어떻게 군대를 지휘하나? 거기다 당시 임꺽정의 반군은 선대왕마마의 신하임을 자인하면서도 양반들이라면 이를 갈고 처단을 했네. 그런데 종친이셨던 현 주상전하께서 지휘를 맞고 있었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글쎄. 하긴 주상전하께서는 그때 아주 어리셨지.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보령이 어리시다고 우습게 보다가는 아마 살아남기는 힘들꺼야. 자네도 이 점 만은 알아두게나."
도지철의 말을 들은 박수익은 6년전 구월산에서 처음 보았던 균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에 눈 덮힌 산에서 미끄러지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오백명의 군사가 함정에 빠진 일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균이 두렵기만 했다. 그때 그정도 였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구사할지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러고보니 이제 조선은 전무후무한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군.'
"자네 무슨 생각을 하나? 어서 술이나 받게."
"어. 그래."
잠시 균에 대한 생각에 잠겼던 박수익은 도지철의 말에 그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6년만에 만난 친구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