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들 두 사람은 잘 정돈된 경복궁의 후원을 거닐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정치이야기가 아닌 일반적인 잡담이었다. 하지만 균이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던 터라 왕대비 박씨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주상은 어찌 그리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계시는 것이오? 덕분에 이 할미가 체통을 못 차릴 지경이에요."
"할마마마께서 기쁘시다니 소손도 기쁘옵니다. 그럼 다른 이야기도 들어 보시겠습니까?"
"뒷방 늙은이인 나야 좋지만 언제나 바쁘신 주상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서 그것이 마음에 걸리오."
"할마마마. 어찌 소손이 할마마마를 위해서 시간을 못 만들겠습니까? 심려를 거두시고 소손의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시옵소서."
두 사람이 즐거워서 웃는 소리가 후원전체에 울려 퍼졌다. 뒤에서 균과 왕대비 박씨를 수행하던 상궁나인과 내관들은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는 조손을 보고는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같이 즐거워하였다. 하지만 균과 왕대비 박씨, 그리고 주변사람들이 후원에서 웃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반대로 그 시간에 대비 심씨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자기 방에서 홀로 앉아있었다.
"대비마마. 소인 임상궁이옵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어느 늙은 상궁이 들어왔다. 대비 심씨의 어머니뻘로 보이는 그녀는 대비 심씨에게 절을 올리고는 심씨 바로 앞에 앉았다. 물론 이런 것은 상당한 결례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당장 대비 심씨도 늙은 상궁에게 접근하여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아버님과 의겸이는 만나보았으냐?"
"예. 마마. 두 분 모두 건강히 잘 계셨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 내 말을 전해 듣고는 뭐라고 하시더냐?"
"두 분 모두 크게 놀라셨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하시며...."
"뭐라?"
임상궁의 말에 대비가 화를 내자 즉시 임상궁이 말렸다. 그런데 그런 임상궁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복중의 아기씨께 좋지 않사옵니다."
"그럼 내가 고정하게 되었느냐? 선대왕마마의 친자가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거늘, 마땅히 이 아이를 옹립하여 왕실의 법통을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야 할 아버님과 의겸아우가 그렇게 나오다니...."
"송구하오나 마마. 주상전하께서는 아직 어린 보령이시지만 보통분이 아니시옵니다. 부원군(심강)께서도 생각은 있으신 듯하지만 이미 주상전하께서 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시여 함부로 나서기는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헌부 집의(심의겸)께서도 일단은 자중 또 자중하라고 하시며 대비마마께 잘 말씀드리라고 하셨사옵니다."
"아무리 현재 주상이 영특하다고 해도 기껏해야 방계의 왕족이 아니냐? 운이 좋아서 보위를 이었다고는 하나 선대왕마마의 적통의 자손이 이 세상에 나온다면 그 즉시 보위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당연히 예를 아는 선비라면 이를 반기고 나를 도와서 바른 임금을 세우는 것이 도리이거늘, 나의 친족이며 이 나라의 외척인 아버님과 의겸아우가 그렇게 나오나니 이는 필시 우리 조선의 예의와 법도가 땅에 떨어진 것이야."
원래 심씨는 그렇게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균에게 우호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의 유일한 친구였던 균이 이뻐보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균이 세자가 되어 대리청정을 보게 하는데 크게 일조를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명종이 죽고 자신의 임신사실을 알고는 균에 대한 태도가 180도나 달라져서 당시 세자인 균이 정무를 돌볼 능력이 있는데도 어린 나이를 핑계 삼아서 수렴청정을 강행하고 수렴청정의 기간동안에 자신의 친정인 청송 심씨의 세력을 확장하여 균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녀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방계왕족출신으로는 최초로 조선의 왕이 된 균에게 선대왕의 친자는 왕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최고의 정적이다. 그래서 균처럼 총명한 사람이라면 먼저 선수를 쳐서 자신과 아기를 제거하고 자신의 왕권을 굳히고자 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비 심씨는 당장 왕위를 되찾는 것을 떠나서 균의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아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수렴청정을 강행하면서 균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균은 눈치를 빨리 챘는지 왕대비 박씨를 움직여 대비 심씨의 수렴청정을 원칙적으로 봉쇄를 했다. 또한 즉위와 동시에 내부단속을 시작하여 심씨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복들을 심었으며 궁궐을 수비하는 내금위마저도 확대 개편하여 심씨를 고립시켰다. 결국 심씨는 대리청정은커녕 대비전에 고립된 채 간신히 친정과의 연락만 취하는 상황이었고 균은 순조롭게 궁궐 안 밖을 장악하고 조정의 명망 높은 신료들과 손을 잡아서 그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도 않은데다가 이제 배가 나올 조짐이 보이자 다급해진 심씨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최대한 피한 채 급히 친정에 자신의 임신사실을 이제야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심강이나 심의겸이 판단하는 바로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미 균은 즉위 후에 있었던 명나라사신 장거정과의 대면에서 우위를 점하여 그 위상이 급상승한 처지였다. 또한 이준경, 이명등 노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어느정도 그 자리를 굳힌 뒤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비 심씨에게 진정하라는 뜻을 전해왔고 믿었던 친정마저도 손을 떼려는 분위기를 보이자 그녀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다.
"마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이렇게 화를 내신다면 복중의 아기씨만 안 좋을 뿐이옵니다. 지금 마마의 옥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바로 아기씨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임상궁. 내가 고정하게 생겼는가? 내가 회임했다는 사실을 주상이 안다면 내 아기는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을 것이야. 보나마나 주상정도라면 나를 제거할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을 것인데 나는 아무도 돕는 이가 없이 홀로 그에 맞서야 한다니 이 얼마나 암담한 일인가?"
"마마...."
어느덧 대비의 음성에는 울음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대비가 어릴 때부터 그녀를 모시던 임상궁역시 대비의 슬픔이 가슴에 전해오는지 울먹이고 있었다.
"하오나 마마. 주상전하가 손을 쓰기 전에 수많은 조정대신들이 마마의 회임사실을 알면 되는 일이 아니옵니까? 또한 주상전하는 심성이 착하신 분입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옵소서."
"자네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주상이 왕대비마마와 손을 잡고 내가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여 아이를 배었다고 한다면 그 즉시 일은 끝나는 것이네. 선대왕마마께서 순회를 얻으시고 무려 15년 동안 후사를 못 보셨네. 그런데 내가 임신했다고 주장한들 두 사람이 모의해서 나를 친다면 무슨 수로 막아내는가? 또한 주상의 성품이 어질고 바른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이 아이가 태어나면 주상의 입장이 난처해지네. 이 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한다면 주상의 목숨이 위험한데 그것을 묵인하겠는가? 주상은 결코 이 아이를 살려두지 않을 걸세."
이처럼 대비 심씨의 입장은 무척 난처했다. 마음 같아서야 자기가 낳은 자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아이의 목숨은 물론이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했다. 저쪽에서 자기가 간통해서 아이를 가졌기에 왕실의 어른인 왕대비 박씨가 주상에게 청하여 사약을 내린다는 억지를 부려도 세력이 없는 심씨는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힘이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태조대왕께서 이 나라 조선을 세우실 때 왕사(왕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어떻게 만났는지 할마마마는 아시옵니까?"
"나는 잘 모르겠소. 주상이 잘 아시는 듯하니 주상이 이야기를 해주시오."
대비 심씨가 고민에 빠져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균과 왕대비 박씨는 후원에서 한창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참으로 다과를 먹고 난 후 이었지만 균의 이야기꺼리는 떨어질 줄 몰랐고 왕대비 박씨는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예. 할마마마. 태조대왕께서 아직 고려의 관직을 오르지 않고 무예를 닦으시며 어찌하면 도탄에 빠진 고려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시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대왕께서 잠을 주무시다가 꿈을 꾸셨는데 그 꿈에 대왕께서 어느 낡은 집에 들어갔다가 그 집이 무너질 것 같아서 급히 밖으로 나오니 그 집은 허물어지고 대왕의 등에는 세 개의 서까래가 지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도 생생한 꿈을 꾸신 대왕께서는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계시다가 마침 그 근처에 어느 중이 점을 잘 본다는 소리를 듣고 그 곳으로 가시었는데 벌써 그 중이 부자인 듯이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의 점을 봐주고 있었다고 하옵니다. 대왕께서 지켜보시는데 그 중이 점을 보러온 사람에게 한자 하나를 고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물어볼 문(問)을 골랐다고 합니다. 그러자 대뜸 그 중이 한다는 말이 '평생 빌어먹을 팔자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 빌어먹을 팔자라니 그 중은 눈도 없던 모양이요."
"예. 할마마마. 태조대왕께서도 이를 이상히 여겨서 그 중의 소문이 헛소문이라 생각하시고 돌아가시려고 하는데 그 중이 풀이를 하더랍니다. 물어볼 문(問)은 문 문(門)과 입 구(口)가 합쳐진 글자인데 이를 해석해보면 문 앞에 입이 있다. 즉 다른 사람의 집 문 앞에서 먹고사는 거지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리 좋은 옷을 빌려 입어도 이놈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 것이구나.'하고 사라졌답니다.
그러자 호기심이 생기신 대왕이 역시나 물어볼 문(問)을 골라서 점을 보았는데 갑자기 그 중이 대왕께 절을 올리더랍니다. 놀란 대왕이 그 연유를 물어보니 '물어볼 문(問)을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보아도 다 임금 군(君)이니 분명히 임금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대왕이 꿈의 해몽을 부탁하니 '낡은 집은 고려를 뜻하고 세 개의 서까래를 등에 지면 임금 왕(王)자다. 당신은 분명히 임금이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궁금증이 풀린 대왕이 이름을 물어보고 사례를 하려고 하니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지면서 자신의 이름을 무학이라고 하였답니다. 그것이 두 분의 첫 만남이옵니다."
"태조대왕과 무학대사 사이에 그런 일화가 숨어있었다니, 과연 주상은 그런 일들을 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대단하시오. 그렇게 주상의 학식이 많으니 분명 나중에 큰일을 하실 분이오."
"과찬이시옵니다. 할마마마."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불현듯이 균이 대비 심씨의 이야기를 꺼냈다.
"할마마마. 이렇게 둘이서 웃고 즐기는 것도 즐거워나 어마마마께서 홀로 계실 것을 생각하니 소손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제 오후도 늦어가니 대비전으로 자리를 옮기어 어마마마의 말동무도 해드리고 어마마마의 병문안을 하는 것은 어떠시겠는지요?"
"요즘 들어 대비가 가벼운 질병을 이유로 들어 주상의 문안도 받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결코 주상에게 편치 않을 자리일 것이오. 이 할미야 대비와 원래부터 그랬으니 상관이 없으나 주상께서는 괜찮으시겠소?"
"소손이야 자식 된 도리를 다 할 뿐입니다."
"주상의 효심이 참으로 지극하구려. 그럼 지금 당장 대비전으로 가십시다."
그렇게 균은 혼자 외롭게 시간을 보낼 대비 심씨에게 놀러가자는 말을 꺼냈고 왕대비 박씨도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외롭고 상심이 클 것 같은 대비가 마음에 걸리는지라 같이 자리를 옮겨서 대비전으로 가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왕대비 박씨와 균의 방문을 받은 대비전은 발칵 뒤집혔다.
당장 대비 심씨부터가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판국이니 그 아래의 상궁나인들마저도 같이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꼭 나쁘다고 보기도 그렇다. 정확히는 서로 무시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그 동안에 별 만남이 없이 지내왔는데 갑자기 균과 함께 방문을 한 것을 보니 모든 것이 들통났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마. 왕대비마마와 주상전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찌하오리까?"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왕대비마마와 같이 나타날 줄이야. 주상은 아직 어린 남자이니 어찌하여 속인다고 해도 왕대비마마께서는 같은 여자이니 바로 눈치를 채실 것인데..."
"마마. 일단은 소인이 어떻게든 그냥 돌아가시도록 말씀들이겠습니다. 마마께서는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임상궁, 무슨 핑계로 돌려보낸다는 말인가? 왕대비마마는 왕실의 어른이시고 주상은 형식적으로는 나의 아들이네. 두 사람이 같이 왔으니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대비 심씨가 결정을 못 내리는 사이에 밖에서는 왕대비 박씨와 균이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어마마마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듯 하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어마마마의 병환이 나아지면 같이 병문안을 오심은 어떠시겠습니까?"
"그것이 좋을 것 같구려. 주상. 그러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합시다."
"예. 할마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