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들 균과 왕대비 박씨가 잠시 기다리다가 알아서 물러나자 대비 심씨와 임상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다시금 걱정에 빠졌다. 오늘은 어떻게 넘어갔다고 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고 또한 운 좋게 숨긴다고 하여도 아기를 낳을 때는 들통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비전은 대비와 임상궁의 한숨소리만이 가득한 채 밤을 맞이했다.
대비전에서 나와 왕대비 박씨랑 헤어진 균은 다시 자신의 처소인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오후동안에 올라온 업무를 잠시 처리한 균은 저녁수라을 간단히 먹은 후에 내의원의 어의 양예수를 불러들었다.
당시 어의인 양예수는 허준의 실제 스승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동의보감편찬에 관여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는 순회세자와 명종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를 물어 투옥되기도 했지만 곧 다시 복직이 되는 당시 조선최고의 의관이었다. 하지만 공을 탐하는 성격이 있어서 순회세자의 병을 감추고 혼자서 치료하다가 악화시키는 결과를 불렀고 덕분에 균의 즉위를 간접적으로 도운 공을 세운 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균은 그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 의술만큼은 높이 평가하여 어의의 자리를 지키게 했다.
"신 내의원 어의 양예수. 주상전하의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과인이 묻겠다. 내의원에 도제조니 부제조니 하는 관헌들이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내의원을 관장하는 사람은 어의인 그대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러면 내의원의 책임자인 어의에게 묻겠다. 최근 대비전에 올려진 탕약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로 올린 것들이고 또 그 효능은 무엇이냐?"
이제 막 퇴궐해야 하는 저녁에 강녕전으로 불려온 어의 양예수는 균이 단도직입적으로 대비전에 올려진 탕약에 대해서 물어보자 잠시 주춤하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예. 전하. 최근에 대비마마의 기가 허시기에 이를 기운을 보충하는 탕약을 올리고 있었사옵니다."
"보약이라... 하긴 요즘 대비마마께오서 걱정이 많으신지 옥체가 많이 상하셨지. 그런데 어의는 왜 과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느냐?"
양예수의 답변을 들은 균은 그 말에 긍정을 하면서도 양예수를 추궁했다. 균의 말을 들은 양예수는 갑자기 뜨끔한 느낌이 들었다. 몇 달 전 대비전의 상궁 하나가 대비께서 몸이 허하시니 보약을 올리라고 전하고는 주상전하께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이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라는 대비의 말도 전했기에 양예수도 특별히 균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균이 어찌 알았는지 이에 대해서 물어온 것이다.
이쯤 되자 양예수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이 안 좋다고 하면서 보약은 받아먹지만 정작 의관들의 방문을 절대로 거부하는 대비와 그러한 대비의 상황을 알고는 이에 대하여 자신에게 물어오는 국왕. 이미 오랜 기간동안 어의를 지내서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양예수는 대비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국왕이 이를 알아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아는 사실을 국왕에게 보고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양예수는 자신이 아는 사실을 다 실토하였다.
"송구하사옵니다. 전하. 사실은 몇 달 전에 대비전에서 상궁 하나가 나와서 소신 등에게 전하기를 대비마마께서 요즘 옥체가 미령하시어 보약을 드시게 해야 하는데 대비께서 주상전하가 아시게 되면 걱정을 할 것이니 보고를 올리지 말고 조용히 대비전으로 탕약을 올려달라고 하여 그리하고 있었나이다."
"탁!"
양예수의 말을 듣던 균은 갑자기 서안을 크게 쳤다. 양예수는 걸리는 점이 있었던지라 균이 낸 소리에 몸을 크게 움츠렸다. 그렇게 움츠린 양예수에게 균의 불호령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명색이 어의라는 자가 대비마마의 건강이 달린 중차대한 일이 있었으면 당장 과인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비록 대비마마의 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약을 드시기 시작한지도 오래 되었는데 그러한 중요한 일을 과인이 모른다면 그것이 말이 되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어의는 그 일에 대해서 더 소상히 말해보거라. 이는 어명이니 조그마한 사실이라도 빠진다면 과인에 대한 불충이다."
균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은 양예수는 어린 왕의 위엄과 호통에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란 사실은 다 말을 했다. 하지만 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화를 냈다.
"예. 전하. 대비마마께서는 몇 달 동안 매일같이 보약을 복용을 하시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희 의관은 물론 의녀들의 방문도 엄격히 금하고 계시옵니다. 덕분에 내의원에서 대비마마의 병세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비전에 올리는 탕약은 저희 의관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전에서 나온 상궁이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하여 그 상궁이 원하는 보약으로 올리고 있사옵니다."
"내의원이 하는 일이 무엇이기에 상궁 따위가 정해주는 약재를 어찌 함부로 대비마마께 올리느냐? 병자에게 알맞은 약제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그대들 의관들이 해야 할 의무이고 이에 상궁이 간섭하는 것은 도리에 크게 어긋난 일이다. 그런데도 대비마마의 명이라는 핑계를 대고 그대들의 책무를 저버리다니 그대가 과연 과인과 이 나라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목소리는 무척이나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균의 표정은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좀 엄한 표정을 지은 채 양예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균은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봐라. 밖에 정 내관 있느냐?"
"예. 전하."
"당장 내금위와 의금부에 명하여 의녀도 아닌 주제에 감히 대비마마께 올리는 탕약을 결정한 상궁을 잡아들여라. 그리고 어의. 그대가 앞장서서 그 상궁을 잡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고 대비께 올려진 탕약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적어 과인에게 보고하라. 그대의 치죄는 그 후의 일이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날 밤 균의 명에 따라서 내금위소속 위사들이 대비전일대를 둘러쌌다. 그리고는 내금위장 곽흘과 어의 양예수가 직접 위사들과 의녀들을 거느린 채 대비전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밤에 갑자기 들이닥친 그들을 보고 놀란 나인들이 급히 대비 심씨와 임상궁에게 달려가 고했는데 낮의 일을 무사히 넘겨서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을 하고 긴장을 풀고 있던 그녀들은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밖에서 곽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대비마마. 신 내금위장이옵니다. 주상전하께서 의녀도 아니면서 감히 대비마마가 드시는 탕약을 결정한 상궁을 잡아오라고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소신들이 죄인을 색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임상궁. 이 어찌된 일인가?"
"대비마마. 아무래도 일이 터진 듯 하옵니다."
이 말을 들은 대비 심씨는 뱃속의 아기가 떨어질 정도였다. 그녀는 비밀리에 뱃속의 아기를 위하여 다른 핑계를 대고 보약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내의원에서 알면 주상이 알 가능성이 커지기에 보약 중에서 일부만 아기를 위한 보약을 스스로 선택하여 먹고 있었다. 그러나 어의 양예수에게 단단히 일러서 봉해둔 사실이 주상의 측근인 내금위장의 입에서 나온다면 주상은 모두 알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거기다 이렇게 대비전에 내금위 위사들과 의녀들이 들어왔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 일이지만 또한 주상이 이를 상쇄할 만 한 패를 쥐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비 심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비밀이란 없는 법, 언젠가는 다 들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노력여하에 따라서 비밀이 지켜질 수도 있기에 대비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가 될 때 까지만은 이런 비밀이 지켜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믿던 아버지와 동생마저도 손을 떼어버린 이상 대비에게 유리한 정세는 돌아오지 않았고 비밀은 탄로 나고 말았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이 나라의 대비이고 이 곳은 나의 처소다. 그대들이 함부로 침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 썩 물러가라."
"송구하오나 대비마마. 이는 주상전하의 지엄하신 어명이십니다. 속히 죄인을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어찌 궁을 지키는 내금위가 죄인을 체포하겠다고 왔느냐? 죄인을 다루는 것은 의금부의 소관이 아니냐? 그대들의 소관이 아니니 허락할 수 없다."
"송구하오나 대비마마. 궁궐의 깊은 곳이기에 내의원에 명하여 의녀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또한 의금부에서 도사(금부도사: 종 5품)도 같이 나와 있습니다. 단지 저희 내금위는 의금부의 지원요청을 받아서 근처를 지키고 있을 뿐이고 죄인을 색출하는 일은 금부도사와 의녀들이 담당할 것입니다. 또한 감히 소신이 이렇게 대비마마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중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관헌이기 때문이옵니다. 부디 죄인을 색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대비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모두 반박을 당했다. 옆에서는 임상궁이 고개를 숙인 채 대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대비의 명으로 내의원에 압력을 행사한 상궁은 임상궁이다 . 임상궁처럼 높은 상궁이 아니고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의관들이 덮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대비는 임상궁마저 잃게 생겼다. 감히 대비가 먹는 탕약에 의녀도 아닌 상궁이 관여한다는 것은 큰 죄였다.
"대비마마. 소인이 나가겠습니다. 부디 옥체보전 하시옵소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임상궁은 스스로 나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대비에게 절을 올리더니 천천히 물러났다. 아마도 임상궁은 자기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사될 것이고 대비의 수명은 조금 연장될 것이다. 하지만 영특한 주상은 의심의 눈초리를 한 채 대비를 계속 주시할 것이고 결국에는 대비 심씨 역시 위험할 가능성이 높았다. 밖으로 나온 임상궁은 대비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주...주상전하."
"네 이년.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전하. 소인은...."
"금부도사는 무엇을 하느냐? 어서 이 죄인을 포박하고 의금부로 압송하라."
"예. 전하. 묶어라!"
균의 어명을 받은 금부도사가 의녀들에게 명을 하여 임상궁을 포승줄로 포박을 했다. 역시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인 의녀들답게 포승줄을 묶는 것도 대단히 빨랐다. 일단 죄인인 임상궁이 금부도사와 의녀들에게 끌려 나가자 내금위 위사들도 곽흘을 따라서 대비전을 나섰다. 하지만 균은 오히려 대비전에 들어갔다.
"대비마마. 주상전하 드셨사옵니다."
"......"
"대비마마. 주상전하 드셨사옵니다."
"......."
밖의 상궁이 몇 차례 대비에게 균의 방문을 알렸지만 대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균은 그냥 문을 열게하고 어의 양예수와 의녀를 대동한 채 대비의 방으로 들어섰다.
대비 심씨는 옆으로 몸을 눕힌 채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균의 마음이 다 미안할 정도였다. 일단 균은 대비에게 예를 올린 후에 말했다.
"어마마마."
"......"
"어마마마. 소자이옵니다."
".....나는 언제 죽일 것이오?"
균이 몇 차례 대비를 부른 후에야 대비는 목이 메이는지 간신히 말했다. 하지만 균은 긴장이 탁 풀리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대비에게 말했다.
"어마마마께서는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자가 어찌 어마마마에게 해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소자는 단지 어마마마의 옥체에 위해를 가한 상궁을 처벌한 것뿐입니다."
"임상궁은 나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한 사람이오. 저번에는 나를 따르던 많은 상궁들을 궁밖으로 내치더니 이제는 내 수족이던 임상궁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제거하시다니, 주상의 능력은 선대왕마마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뛰어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