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228)

 균의 즉위년에 일어난 일들 균이 대간들의 주청을 거부하고 대비를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세상 사람들은 동방에 큰 효자가 났다고 생각하고는 모두들 균을 칭찬했고 그런 균의 효심을 몰라준 대비에게는 악담이 쏟아졌다. 이러한 소문은 더욱 퍼져서 결국에는 대비 심씨의 귀에도 흘러들었다. 일이 그쯤 되자 대비 심씨도 점차 마음이 기울어 임상궁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균이 지금 하는 일은 손해를 보는 일이다. 대비 심씨를 그냥 간통죄로 모함을 하거나 비밀리에 먹는 보약에 사산을 시키는 약을 타면 균은 별 부담 없이 자신의 최대정적이 될지도 모르는 아기를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균은 모든 잘못을 임상궁에게 돌리더니 공개적으로 대비의 회임을 인정하고 산실청까지 설치하여 대비와 태아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적을 보호하는 꼴이다.

그러나 임상궁의 경우에는 조금 사정이 틀리다. 비록 대비 심씨를 따르는 늙은 상궁이기는 하지만 꼭 손해만 본다고는 할 수 없다. 소문대로 궁내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어부지리를 다른 사람에게 많은 돈으로 매수되어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 균이 시행한 대궐내의 세력정리에 위협을 느끼고 둘을 이간질시켜 균을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웠을 확률도 적지 않다. 그래서 아무래도 균보다는 임상궁이 잘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비 심씨의 마음이 그렇게 바뀌자 균에 대한 미움도 조금씩 사라졌다. 나중에야 균과 자신의 아이가 왕위를 두고 다툴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지금은 균이 자신과 아이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대비가 다시 생각을 해보니 아직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균과 왕위를 다투는 것을 상상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설사 아들이라고 해도 균보다 더 뛰어나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균은 대비가 아직까지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고는 대전내관 정성우를 통하여 임신 중에 좋은 음식이나 약재를 전달해주었다. 동시에 계속해서 삼사의 의견을 거부하고는 임상궁에 대한 국문을 강화시켰다. 결국에는 험한 국문을 견디다 못한 임상궁이 감옥에서 죽어서 더 이상 역모사건에 대한 조사가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균이 즉위한 후 처음 있었던 역모사건은 조용히 마무리가 되어갔다.

임상궁이 옥사하고 대간들의 상소문도 줄어들기 시작하자 균은 대비의 무관심을 틈타서 마지막 남은 대비전 일대의 세력도 일소하여 경복궁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한편 일부 조직을 재편해서 자신의 친위 세력화하였다. 이로써 일단 독약 먹고 죽을 확률은 현저히 떨어져서 균은 본격적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한창 대비의 회임과 역모사건으로 바쁘던 서기 1565년이 거의 끝나가던 12월 동짓달에 정인기는 다시 대궐로 불려갔다. 이제 한창 재롱을 부릴 나이인 6살 박이 딸의 재롱을 구경하는 재미로 세월을 보내던 정인기는 균의 부름이 반갑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했다. 보나마나 균은 관직을 내려줄 것인데 다시 출사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이상 딸의 재롱을 마음껏 볼 수 없다는 점은 안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신 전 나주목사 정인기. 주상전하께 문안드리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숙부는 과인이 강녕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삼사의 대간들이 얼마나 대단한 자들인지 몸소 느끼는 중이라 과인의 꿈자리까지 뒤숭숭하오. 그건 그렇고 요즘 현아(정인기의 딸)의 재롱이 그렇게 귀엽다면서요?"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하하. 과인은 현아가 아기때 한 번 보고 다음에는 숙모가 무서워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숙부의 표정을 보니 정말 귀여운 아이로 자라난 모양이요. 그건 그렇고 아직 점심을 안 들었으면 온면(따뜻한 국수)이나 같이 듭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균은 면을 무척 즐겨서 여름에는 냉면을 겨울에는 온면을 즐겨먹었다. 그래서 가끔씩 균과 같이 점심을 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면으로 배를 채워야 했는데 아무래도 면류가 소화가 잘 되는 탓에 집에 돌아가서 늦은 점심을 하는 자들이 많았다. 덕분에 점심때만 되면 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가끔 낮잠을 즐길 정도로 균의 점심시간이 길었다. 정인기와 만난 그 날도 감히 점심시간 전후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는지라 정인기와 여유 있는 식사를 즐겼다.

"숙부는 오늘 과인이 숙부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송구스럽사오나, 전하. 소신은 아둔하여 전하의 깊으신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하옵니다."

"하하하. 이제 보니 숙부도 상당히 아부를 잘하는구려. 음~. 과인이 숙부를 부른 이유는 숙부도 잘 알겠지만 관직을 내리고자 부른 것이오. 도승지."

"성은이 망극하.... 예?"

그냥 예법대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려던 정인기는 균의 마지막 말에 놀라서 결례를 범했다. 도승지는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비서인 승지가 6명이 있었는데 도승지는 그중에서도 수장으로 정3품 당상관이다. 하지만 왕명출납의 기능을 가지는 승정원의 장이고 또한 서너 개의 관직을 자동으로 겸임을 하게 되는 등 그 실권은 무척 강하여 조정내의 요직 중에 하나였다.

아무리 나주목사를 지냈던 정인기라고 해도 조정에 세력이 없던 정인기에게는 과분한 자리였다. 사실 나주목사의 자리도 균이 힘을 써서 임명된 자리이고 고작 수 개월 정도 근무했을 뿐이었다. 지도군수로 많은 치적을 올렸다고는 하지만 감히 조정의 요직 중에서도 손을 꼽은 도승지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파격적인 승진이다. 당연히 삼사의 대간들이 척신(국왕의 외척)을 도승지라는 중책에 올렸다고 반대할 것은 분명했다.

"하하하. 숙부가 많이 놀란 모양이구려. 다 이해하니 과인에게 죄를 청할 필요는 없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물론 아직 숙부의 경륜이나 나이로는 도승지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오. 하지만 도승지는 과인의 수족과도 같은 자리이므로 과인과 일을 편히 할 수 있는 숙부가 최적임이오. 삼사의 반대는 과인이 알아서 처리를 할 테니 숙부는 과인의 명이 있으면 그 즉시 승정원으로 출근하시오. 설마 과인의 어명을 숙부가 거절하지는 않겠지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숙부가 도승지로 임명된 것이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니 그렇게 속으로 좋아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나머지 승지들만 해도 모두 숙부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오. 그런 자들을 잘 다스리면서 과인의 뜻을 따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최선을 다하시오."

"소신.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균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을 숙부의 얼굴을 상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정인기를 도승지로 임명하는 것은 별일이 아니지만 당장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삼사 대간들과의 전쟁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 해시계를 돌려서라도 피하고 싶은 상참이 시작되었다.

"과인은 이번에 공석이 된 도승지의 자리에 전 나주목사 정인기를 임명할 것이오. 비록 심임 도승지 정인기가 그 나이가 어리고 경륜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이미 지도군수와 나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펼쳐 전라도에서 그 명성이 높고 과인의 뜻을 잘 헤아리는 재주를 지녔기에 현재 도승지의 자리에 가장 적임자라고 과인은 생각하오. 경들은 그리 알고 그래도 시행하도록 하시오."

"신 대사헌 박응남이 아뢰옵니다. 정인기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여 좋은 실적을 올린 것은 신들도 잘 알고 있으나 아직 정인기는 중앙의 관청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습니다. 엄연히 중앙의 내관직과 지방의 외관직은 차이가 있기에 아직은 중앙 내관 직에서도 요직인 도승지에 임명함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옵니다.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

"신 대사간 윤두수가 아뢰옵니다. 정인기는 주상전하께서 사가에 계실 때 외숙으로 있었던 척신이옵니다. 정인기가 가진 능력을 떠나서 척신을 그런 요직에 임명하는 것은 선대왕마마때의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전례가 있었던 만큼 이번 인사에는 신중을 기하여 다른 적임자를 물색하는 것이 나을 듯 하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신 대제학 이황이 아뢰옵니다. 정인기가 주상전하의 사가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주상전하의 뜻을 잘 헤아리는 인물임은 틀림이 없으나 아직 도승지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너무 이른 듯 하옵니다. 아직 정인기의 나이가 어리니 더 경험을 쌓게 한 연유에 도승지로 기용을 해도 늦지 않은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역시나 균과 정인기의 예상대로 삼사가 모두 반대를 표했다. 아직 조선 최대의 외척인 윤원형이 물러난 지 고작 수년 후인지라 조정에서 외척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곱지 않았다. 오죽하면 대비 심씨의 남동생인 심의겸도 청렴하다고 소문이 낫는데도 불구하고 가진 재능에 비해서 낮은 벼슬에 머무르는 입장이었다. 하물며 가진 재능에 비해서 높은 자리를 외척이 받게 되니 그렇게 심한 저항이 있는 것이다.

원래의 선조라면 이런 상황이면 두 말없이 물러났을 것이다. 특히나 선조의 글공부 스승이던 이황이 반대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균은 그렇지 않다. 먼저 이황은 균의 글공부 스승이 아니다. 아예 균이 명종실록을 편찬하는 임무를 맞겨버려 균과 이황이 만날 일도 드물고 이황의 이름을 빌릴 필요 따위는 없다. 거기다 이미 자신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받은 상황이니 균은 마음 놓고 밀고나갔다.

"경들의 우려는 과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오. 아직 정인기는 어리고 경험이 없으며 과인과 혈연관계를 가진 외척이오. 하지만 정인기의 가문은 쇠락하여 더 이상 그런 세도를 부리기도 힘들뿐더러 과인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과인은 일곱 살 때부터 정인기를 지켜보면서 자랐고 과인의 눈은 틀림이 없었소.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정인기를 잘 아는 이가 과인이니 경등은 단지 외척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인재를 내치는 우를 범하지 마시오."

"신 대제학 이황이 아뢰옵니다. 예로부터 외척은 나라의 화근이었고 이는 많은 고사들이 말해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유능하고 청렴한 인물이라도 권력을 대하면 사람의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이번처럼 갑작스럽게 높은 관직을 주는 것은 오히려 젊은 인재를 망칠 수도 있사오니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대제학. 대제학은 의술에 대하여 아시는 바가 있소?"

"예. 전하. 잘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 독술과 의술이 백지 한 장 차이라는 말도 알고 있소?"

"......"

균이 하는 말은 설사 독이라고 하여도 약으로 쓸 수 있는 다는 사실도 모르느냐는 뜻이다. 한약이든 양약이든 엄청난 종류의 약이 있지만 절대적으로 몸에 좋기만 한 것은 없다. 아무리 좋은 약, 심지어 보약이라도 잘 못쓰면 독이 되고 아무리 맹독이고 극독이라도 잘 쓰면 약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균의 말에서 이러한 뜻을 읽은 이황은 잠시 인상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더니 무척이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의원이 약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같은 약재가 때로는 약이 때로는 독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외척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주상전하께서 잘 다스리신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소신의 생각이 짧아서 주상전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큰 죄를 지었사옵니다."

"하하하. 큰 죄라고까지 할 수 있겠소. 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나이 어린 과인이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봐 크게 걱정이 되어 그런 부분까지 생각나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오. 그럼 이번에 도승지의 자리에는 전 나주목사 정인기를 임명하는 것으로 할 터이니 경들은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시오."

"예. 전하."

그 날 조회에서 무리 없이 신하들의 반대를 꺾은 균은 그날 바로 정인기에게 선전관을 보내서 다음날부터 승정원으로 출근하라는 명을 전했다. 이로써 정인기는 자기 형제들 중에 가장먼저 당상관의 반열에 그것도 요직중의 요직이라는 도승지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 당장 정인기의 아버지인 정세호가 소식을 듣고 막내아들을 찾아와서 크게 격려를 해주었다.

"정말 장하구나. 장해. 이제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벌써 당상관이 되다니..."

"아버님. 몸이 상하십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내 외손자가 주상전하가 되고 내 막내아들이 도승지영감이 되다니... 그래 이제 너두 당상관이다. 그중에 도승지라면 판서급에 맞먹는 요직이야 이 아비는 처신을 잘못하여 크게 낭패를 보았지만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알겠지. 인기야?"

"예. 아버님. 아버님의 말씀은 꼭 명심하겠습니다."

올해 79세의 정세호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인지 쓸 때 없는 말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인기가 임금의 외숙이 되고 높은 관직까지 받았지만 어떻게 보면 외척이라는 이유로 작은 일도 큰 타격이 될 가능성이 컸다. 일단 외척은 다른 신하들의 견제를 받기 때문이다.

10년 전쯤에 방납(세금중 하나인 특산물을 대신 납부해주고 농민들로부터 많은 돈을 요구했던 폐단중 하나.)을 자행하다가 면직된 후 많은 후회를 하였던 정세호는 두서가 없는 말이지만 밤이 깊어가도록 계속해서 정인기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었다. 결국 정인기는 다음날 첫 출근에서 지각을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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