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1년.
균의 즉위 1년째인 서기 1566년 새해가 밝았다. 궁에 들어오기 전의 균이라면 차례를 지내고 노는 것이 일인 정월 초하루이지만 이제는 가장 바쁜 날 중에 하나였다. 간단히 두 분 대비에게 문안인사를 드린 균은 도승지 정인기를 통하여 '권농윤음'을 내렸다. 권농윤음이란 '농사를 권하는 임금의 말씀'으로 한해 농사 잘 지으라고 조선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격려를 하는 것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였다.
또한 대소신료들이 모두 모이면 망궐례를 해야 한다. 일반적인 망궐례면 정월 초하루와 대보름에 지방관들이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궐자를 세긴 패에 절을 하는 행사이지만 명의 제후국인 조선국왕은 명의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서 새해인사로 절을 한다. 이미 정초사를 북경에 파견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제후로써의 도리에 모자라다는 이유로 국왕이 직접 망궐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망궐례가 끝나면 역대 임금들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종묘로 향한다. 그다음은 공자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성균관으로 향한다. 이런 행사가 끝나면 종친들은 물론이고 문무백관의 신년하례를 받는다. 이렇게 바쁜 일정이지만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균이 결제해야 할 문서가 적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약 7일의 휴가가 있는데 그중 대부분인 6일이 정월에 있다. 대체로는 정월 초하루때 많이 쉬기에 덩달아 균의 일거리도 많이 줄어서 균은 오랜만에 여유 있게 쉴 수 있었다.
먼저 문무백관들의 신년하례를 받은 균은 오랜만에 모인 종친들을 강녕전의 부속건물인 연길당에 모아서 조촐한 대접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화려하게 하고 싶지만 정초부터 그렇게 하다가는 당장 삼사에서 난리를 치는데다가 대비 심씨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궁궐을 소란스럽게 할 수도 없기에 균과 종친들은 간단히 식사를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하지만 균과 종친들은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대다수의 종친들은 균이 같은 방계출신으로 운 좋게 보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한데다가 대비의 아기가 태어나면 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생각하여 거리를 둔 반면 균은 왕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잠재적인 위협세력인 종친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균은 은근히 주변을 압도하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의 기운을 발산하는데 주력하는 바람에 곧 연길당안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밖의 내관이 하는 말에 그 분위기는 180도로 바뀌었다.
"전하. 덕흥군부인과 하원군 남매가 들었습니다."
"당장 들라고 하라."
종친들은 그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균의 얼굴표정이 살벌에서 자애로 싹 바뀌는 신기를 구경하고는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균의 어머니인 정씨와 형인 정과 인 그리고 막내 진이는 가장 윗자리에서 부드럽고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균만 보았을 뿐 그 전의 분위기는 짐작도 하지 않지 못하고 균에게 인사를 했다. 옛 가족들의 인사를 받은 균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의 상석에 앉게 하고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님께서는 편찮은 곳은 없으십니까?"
"예. 전하.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몸성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두 분 형님들은 글공부에 진전이 좀 있으십니까?"
"아직 학문이 미천하여 감히 주상전하께 내세울만한 수준이 아니옵니다."
"그래 진이도 많이 자랐구나. 이제 곧 시집을 가도 되겠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그 뒤로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명종의 양자로써 왕위를 계승한 균이 자신의 사가 쪽에 관심을 보이는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다. 실제 선조도 두 형 하원군과 하릉군에게 많은 신경을 기울였지만 번번이 신하들의 반대로 마음껏 도와주지는 못했다. 마음 같아서야 서로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직은 그런 행동을 하기에는 균의 권력은 너무 취약했다. 그렇게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가족들을 보낸 균은 밤늦게까지 시름에 잠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해가 되자 균은 일부 인사조정을 단행했다. 먼저 영의정 이준경과 좌의정 이명은 유임하고 우의정에 홍섬, 이조판서에 이탁 등을 새로 임명하였는데 다 명망이 있던 신하들인지라 삼사에서도 이견을 제기하지 못했다. 또한 균은 조식을 사헌부 장령(정 4품)으로 임명하였는데 워낙 명망이 높았던 인물인지라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삼사의 대간들마저도 이번만큼 조식이 출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였기에 온 조정의 신경이 조식의 출사여부에 쏠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에는 조식이 출사를 할 확률이 높다고 평가하면서도 선대왕인 명종의 요청을 몇 차례나 거부하고 이제는 지리산 골짜기에 은거하고 있는 조식이 어린 왕의 부름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균은 이미 조식의 약점을 잡아두고 있었기에 상황을 낙관했다. 그래서 오히려 조식보다는 새롭게 사헌부 지평(정5품)으로 임명한 이지함의 출사여부에 더 신경을 기울였다.
이런 일부 인사조정과는 별도로 일부 군사조직과 비금도 상회에 변동이 있었다. 먼저 전라우수영관할의 비금진이 해체되고 그 세력이 내금위로 이관되었다. 즉 비금도의 군사력을 내금위에 전격적으로 통합시킨 것이다. 그리고 군사조직을 새롭게 편성하여 내금위에만 시범적으로 적용시켰다.
원래 조선군의 군사조직은 위, 부, 통, 여, 대 ,오로 구성되었다. 먼저 오는 병사 5명으로 만들어진 최하부 조직이고 5개의 오가 모여 대가 된다. 대는 병사 25명으로 구성되며 역시 5개가 모여서 여가 되며 여는 병력 125명이다. 하지만 그 상위부대인 통은 변동이 있어서 정확한 병력을 알 수 없다. 대강 500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조선중기에는 병력의 부족으로 그 규모가 축소되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게 해서 계산을 해보면 상급부대인 부는 약 2000명, 위는 약 1만 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이에 대하여 비금도 시절의 균은 조선후기의 속오군 편제에서 이름을 따와서 영, 사, 초, 기, 대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실제 균이 다스리는 조선에서는 아직 사용하기 전의 이름인지라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균은 다시 내금위조직을 재편하면서 그 이름과 편제를 일부 수정하였다 먼저 최소단위는 '대'로 병력은 10명 지휘관은 대수.
대가 3개가 모이면 '기'로 병력 30여명에 지휘관은 기수.
기가 다시 3개모이면 '려'라 하고 병력 100여명에 지휘관은 여수.
려가 3개가 모이면 '통'이라 하고 300여명에 지휘관은 통장.
통이 3개가 모이면 '영'이라 하고 약 1천명에 지휘관은 영장.
영이 3개가 모이면 '부'라 하고 약 3천명에 지휘관은 부장.
부가 3개가 모이면 '위'라 하고 약 1만 명에 지휘관은 위장이다.
그리고 '통'이상의 부대에는 본부를 두어 지원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내금위는 일종의 정예특수부대인지라 병력이 약 3천명인데도 그대로 '위'라고 칭했다. 따라서 내금위는 '대'가 없이 1위- 3부- 9영- 27통- 81려- 243기와 본부로 구성하고 비금도 주둔군 2천여 명을 한성부로 올라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비금도에 계속 주둔하게 되는 약 1천명은 따로 비금부라는 이름으로 개칭했다.
또한 비금도 상회는 작년 한 해 동안 약 50만 냥의 이익을 보았고 여유자금만 해도 150만 냥에 이르러 조선조정의 공식적인 재정규모인 약 200만 냥에 필적 할만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왕실의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를 능가하는 액수로 더 이상 비합법적으로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물론 내수사로 위장 편입시킨 후였지만 내수사보다 더 많은 돈이 오고가는 비금도 상회를 계속해서 내수사의 하위기관으로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균은 비금도 상회를 외수사라는 새로운 기관으로 만들고 그 책임자로써 도승지 정인기를 겸직시켰다. 그렇게 합법적인 기관으로 일단 등장을 시킨 후 내수사와의 거래와 장부조작을 통해서 거래규모를 축소시키는 방법인데 먼 훗날 대한민국의 그룹들이 하는 방식과 흡사했다. 그래서 차차 거래규모가 늘어가는 것으로 조작을 하자 아직 상업에 어두운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수사의 지원을 받아서 급성장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고 덕분에 비금도는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균은 조정이 일부 인사이동과 남명 조식의 출사문제로 정신이 팔려있던 사이에 내금위, 비금부의 군사조직과 내수사, 외수사의 재정조직을 편성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하지만 아직 모든 문제가 다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남명 조식과 토정 이지함의 출사가 확정되지 않았고 또 삼사에서 새로운 두 조직(비금부, 외수사)에 대하여 물고 늘어질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은 큰 사건을 한 번 더 만들어서 신하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바로 조광조의 관직을 복구하는 문제였다. 조광조는 중종 때의 신진사림의 우두머리였는데 당시에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가 정권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훈구파의 세력이 강한데다가 사림의 급진성이 너무 강하여 결국 기묘년에 조광조등이 숙청되는 데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훈구세력이 정권을 잡고 사림을 압박하였기에 조광조와 그때 숙청된 사림들은 아직도 관직을 되찾지 못한 채 죄인으로 남아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현재의 조정은 사림의 세력이 압도적이고 훈구파는 균의 눈에 안 보이는 배려 하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심심치 않게 조광조등의 관직을 복구하는 문제가 사림들 간에 논의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에게 벼슬을 다시 내리는 문제가 중요한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벼슬은 일종의 명예였다. 실제 조선시대때 벼슬을 하게 되더라도 나라에서 주는 녹봉은 무척 작아서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양반들은 기를 쓰고 벼슬길에 나서기를 원했는데 이는 임금의 신하로써 나라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웠다는 것이 유교적으로 큰 명예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벼슬자리는 가문의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양반은 원래 계급의 이름이 아니고 문무관료를 칭하는 말이다. 조선의 제도상 양반이든 평민이든 다 양민이라는 하나의 계층에 해당한다. 하지만 양반과 평민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그 기준은 벼슬한 사람이 가문에 있느냐 없느냐 이었다. 만일 양반이라도 후대에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면 사실상 평민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양반들은 벼슬길에 목숨을 걸었다. 엄중한 처벌을 뜻하는 삭탈관직이 벼슬을 했다는 기록을 지우는 벌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러한 사회풍토속에서 조광조의 관직을 다시 복구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였다. 단순히 한 사람의 관직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훈구세력에 대한 사림세력의 우위를 상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림의 득세를 바라지 않는 균으로써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균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균은 경연(임금이 공부를 하는 것)에 나가서 경연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슬쩍 이 문제를 언급했다. 물론 그 경연관들은 대부분 사림이었다.
"과인이 생각하기로는 지난 을사년에 있었던 일은 선대왕께서 잘 해결하시어 그 마무리가 되었지만 기묘년에 있었던 일은 아직 그 시비가 가려지지 않았다고 들었소. 그런 의미에서 오늘 경연은 그에 대하여 논하여 보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합시다."
"신들도 나중에 전하를 모시고 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시니 전하의 안목이 새삼 높으심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경연관들은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특히 이황의 제자인 기대승은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반색을 하였지만 그의 스승인 이황은 그 표정에 전혀 변함이 없어서 균을 실망시켰다. 참고로 실제로도 이황과 기대승은 사제가 나란히 선조의 스승이었다.
"신이 듣기로는 선대왕마마때도 여러 번 논의가 있었지만 당시 조정의 많은 신료들이 욕심에 눈이 먼 소인배들이라 끝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광조는 그 학문이 깊고 뜻이 커서 감히 중종대왕을 도와서 조선을 요순시대로 만들 능력이 있던 자이나 당시의 세도가이던 남곤 등의 모함으로 안타깝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에 남곤 등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써서 중종대왕의 혜안을 어둡게 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았지만 지금도 당당히 관직에 올라가 있는 반면에 조광조등은 사약을 받거나 먼 곳으로 유배가 된 후 관직마저 빼앗겨 그 혼령들이 억울함에 눈을 감지 못할 지경이옵니다. 나중에라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 입니다."
기대승의 말을 들은 균은 그만 그를 비웃을 뻔하였다. 원래는 균도 조광조는 사림이기는 해도 좋은 인물이고 남곤 등은 권력과 재물을 탐한 자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자시절 읽어본 중종실록을 보고는 그 생각이 싹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