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1년.
중종 13년 (서기 1518년) 8월 함경도 관찰사 정인겸은 조정에 '오랑캐의 수장인 속고내가 국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와서 사냥중.' 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속고내는 원래 조선에 투항을 하였던 여진족추장인데 그 뒤에 변심하여 갑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힌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조선군이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자 다른 여진족 추장인 망합, 주장합등이 역시 조선의 변방을 공격해서 한때 변방이 어지러웠다.
이런 보고를 접한 영의정 정광필, 이장곤등의 신하들은 속히 소수의 정예 병력을 파견하여 속고내를 잡아들이자고 청하니 중종은 이를 승인하고 방어사 이지방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중종이 이지방을 만나서 명을 내리려는 차에 당시 부제학 (홍문관의 정3품 벼슬.) 조광조가 이 사실을 듣고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조정 대신들이 이미 자세히 의논하여 처리한 것이므로 신처럼 부족한 자가 가벼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작은 듯하나 실로 큰 것이니, 신은 이것 때문에 변방에 일이 일어나는 조짐이 될까 두렵습니다. 속고내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왕의 움직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은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우리가 불시에 기습하여 사로잡으려 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일은 변방의 장수가 임의로 처리하였더라도 불가한데, 만약 조정에서 스스로 도적처럼 행동하여 장군을 보내어 기습한다면 의리에 어떻겠습니까? 만약 사로잡았다가 속고내가 아니면 그 걱정거리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오, 참으로 속고내라 하더라도 만약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지금 변경에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닌데 몰래 군사를 내어 기습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합니다. 비록 장수를 보내더라도 사로잡지 못하면 여진족들이 반드시 우리를 믿지 아니하고 간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종종이 조광조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 속고내가 소란을 피우면 잡는 것이 옳고 지금 잡으면 사람들이 도적처럼 행동한 자신을 어떻게 보겠냐는 말을 하자 영의정 정광필이 이에 조광조의 말은 유학의 도리로써 맞지만 변방의 일은 그런 유학적인 것으로만 해결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가 다시 대답하였다.
"군주가 오랑캐를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소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벼이 움직여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명분 없는 일까지 해야 합니까?
비록 주장합이 이 거사로 인하여 스스로 처벌될 수 있다 하나, 아마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옛날 성종 조에 만포 첨사 허혼이 사냥하는 오랑캐를 몰래 사로잡았더니, 이로 인하여 수십여 년 동안 변방의 근심이 그치지 않아서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게 되므로, 성종께서 허혼을 베어서 앞으로 올 일을 징계하셨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대신을 보내어 숲 속에서 오랑캐를 엄습하여, 나쁜 일을 하는 도적이나 하는 행동을 하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변방의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만 크게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성종때 허혼이라는 자가 여진족 추장을 잡았다가 오히려 이에 격분한 여진족들이 공세를 편 적이 있었다. 이에 성종은 허혼의 목을 배고 여진족들을 달래었다. 조광조는 이를 들어서 반대를 했지만 이미 조정대신들은 이번 일은 경우가 틀리기에 별일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였다. 그래서 병조판서 유담년이 조광조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중종에게 말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큰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으라.' 는 옛 말처럼 이번 일에는 소신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사림파의 말을 듣고 방어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때 조선의 변방은 편할 날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국경을 지키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배하였고 중종 18년 11월에는 여진정벌전을 계획하였으나 허공교전투에서 조선토벌군이 패배하였다.
옛 말에 '송양지인'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송나라의 양공은 초나라의 대군이 침공해오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강을 경계로 대치하였다. 이때 초군의 장군이 성급했던지 먼저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초군의 진형이 허물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송의 장군 공자목이 송양공에게 건의하였다.
'강을 건너느라 적군의 진형이 무너진 이때 공격을 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건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참다운 패자가 되는 것이다.'
송양공의 답변에 어이가 없었던 공자목은 일단 주군의 결정을 따랐다가 얼마 후 초군이 도하를 끝내고 진형을 정비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송양공에게 건의하였다.
'적이 미처 진형을 갖추기 전에 공격을 하면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군자는 남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괴롭히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공자목의 건의를 거부하던 송양공은 초군의 전투진형 완성이 되자 그제서야 전투명령을 내렸고 약세의 송군은 절호의 기회를 노친 채 초의 대군과 싸워 대패를 하였다. 그 뒤 로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리석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고나 불필요한 도움을 주어 오히려 큰 피해를 입는 경우를 '송양지인'이라 하고 비웃었다.
이처럼 조광조는 그 학문적인 능력은 뛰어난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전략적 식견은 송나라 양공과 같았다. 이미 속고내는 조선을 배신하고 다시 약탈을 자행한 여진족의 수장이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범죄자이며 반란군이다. 좋은 기회를 맞아서 속고내를 잡았다면 그의 죄를 치죄하고 일벌백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설픈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사로잡혀서 정면대결을 주장했고 그 결과 많은 인명만 상실한 채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북방의 변경만 어지러워지는 우를 범했다. 그래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이상론적인 생각만 했다는 점에서 조광조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때 공자가 각국을 돌면서 약간씩 벼슬살이를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공자는 송나라의 임관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른 나라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송양공이 대패한 직후로 공자는 우매한 군주 때문에 고생하는 송나라 사람들을 무척이나 걱정을 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송은 멸망한다. 유학의 개조인 공자도 그렇게 대처를 했는데 그보다 이천년 후의 유학자인 조광조는 공자보다도 송양공의 뜻을 받든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성리학의 이상이었다.
중종실록을 읽은 균은 당연히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깨끗하고 학문이 깊어도 이상론에만 빠져 현실을 알지 못하는 자가 이 나라 유학자들의 표상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특히나 사림이 더 이상 초야에서 은거하는 자들이 아닌 조선의 중요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지금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균은 조광조를 칭찬하는 기대승의 말에 비웃을 뻔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균의 마음도 모른 채 경연관들의 칭찬은 이어졌다.
"전한(홍문관의 종 3품관직) 기대승의 말이 극히 지당합니다. 조광조는 소인들을 몰아내고 군자들의 조정을 만들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였으나 불행히도 그가 시행한 일들이 때로는 적중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중종대왕의 신임을 잃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이 조광조를 본받기를 원하고 따르니 그가 행한 일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고 사료되옵니다."
"당시 남곤등은 감히 종종대왕의 왕비이신 단경왕후를 폐출하고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국정을 전횡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이 때 중종대왕께서 조광조를 등용하시어 바른 정치를 펼치고자 하셨으나 남곤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그 큰 뜻이 꺾기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옵니다."
균은 불쾌한 마음을 감춘 채 경연관들의 말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굴을 밝게 하여 마치 자신이 그들의 의견에 찬성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는 경연이 끝날 때쯤 해서 폭탄선언을 하였다.
"과인이 경들의 의견을 듣고 보니 과연 조광조를 다시 신원하는 문제가 상당히 시급한 사한이라고 생각되오. 이를 내일 조회에서 대소신료들과 논하고자 하니 경들은 그리들 알고 계시오."
"전하의 깊으신 뜻이 옛 성인들과 다르지 않으니 이는 나라의 큰 복이옵니다. 소신들은 이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겠습니다."
균이 간단히 운을 띄워준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그렇게 바뀌어 경연관들은 균을 극찬하였다. 균은 마음속으로는 사림의 세력이 증대될 것 같아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대신에 합법적으로 부리게 되는 자신의 군대와 재물을 생각하고는 경연관들과 같이 웃음을 지었다.
신하들은 자신들의 숙원이 갑자기 해결되어 기쁘고 균은 자신의 세력을 합법화시킬 수 있어서 기뻤다. 균과 신하들의 동상이몽(같은 자리에서 다른 꿈을 꿈)이었다.
다음날 균과 조정대신들은 조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조광조, 김정, 기준, 한충, 김식등의 기묘년의 사림파를 신원하고 원래의 관직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역사대로 조광조등의 벼슬은 더해주지 않았다. 반대로 남곤, 심정, 홍경주등 반정공신들은 그 벼슬을 빼앗아서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약 50년간 사림들의 숙원이던 조광조의 신원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많은 선비들이 새로운 왕의 덕을 크게 칭찬하였다.
이로써 균의 즉위 1년째인 서기 1566년 초는 남명 조식의 출사여부와 일부 인사조정 그리고 조광조의 신원복원등의 큰일들이 일어나서 조정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고 그 틈을 타서 균은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군대와 재물을 합법화시켜 다음에 있을 일들에 대비를 하였다. 이때 사림들이 명분을 얻었다면 균은 실리를 택한 셈이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지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인 어느 산중턱. 그 산중에 집이 한 채가 있다. 산천재라는 현판을 단 대문을 지나면 본 건물이 나오고 그 건물에서 가장 큰 방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지만 소란스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용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 젊은 선비 하나가 입을 열어서 그 조용함을 깼다.
"스승님. 주상전하께서 특지(특별한 명령 또는 등용)를 내려 스승님을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한다는 어명이 내려온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도 한성부로 상경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
수제자이며 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의 말에 조식은 눈을 감고 살짝 미소를 띄울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후 김우옹이 조식에게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조식은 조용히 말했다.
"너도 은근히 관직에 오르고 싶은 게로구나."
"아니옵니다. 스승님. 아직 저의 학문은 미천하여 나라를 이롭게 할 수준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단지 퇴계선생도 홍문관 대제학으로 그 뜻을 널리 펴고 계시는데 스승님의 큰 뜻이 초야에 묻어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허허허. 하긴 너나 인홍, 영경 등은 아직 젊어서 공명심이 있지만 그 학문이 깊으니 능히 나라를 이롭게 할만하다."
"스승님. 저희들이 어찌 감히..."
"이제는 더 이상 주상전하께서 명하신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아마도 주상전하께서는 이 늙은이보다도 너희들을 원하실 테니 이번에 너희들도 같이 상경할 준비를 하거라."
김우옹등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선 조식은 방밖으로 나와서 하안 눈이 쌓여 색다른 정취를 풍기는 산천재 주변의 산세를 지켜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토정의 말이 틀림이 없구나. 그 때 어리셨던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실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이 나라가 사람을 살리는 도리를 깨달은 왕을 맞았으니 조금이나마 달라지겠지. 그간 전하께서 어떻게 변하셨는지 무척 궁금하군. 참, 우리 재우는 잘 있으려나? 허허허. 뭐 곧 만날 수 있겠지."
며칠 후 조식은 정인홍, 최영경, 김우옹등 자신의 제자를 대동한 채 균이 있는 한성부로 천천히 향했다. 아직 눈이 녹지 않아서 길이 험한데다가 이미 조식의 나이가 고령이라서 급하게 올라갈 처지가 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너무 늦게 올라가면 임금의 분노라도 받지 않을지 걱정을 하였으나 조식은 태평했다.
'주상께서는 조선의 사정을 잘 아시는 분이니 조금 늦는다고 해도 별 말씀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 세력이 없는 전하가 의지할 곳은 나와 내 제자들이 전부이니 그렇게 화를 내시지도 않을 것이고... 단지 주상전하에게 맞겨둔 우리 재우가 좀 고생을 하겠지만 뭐 어릴 때는 고생을 해봐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지.'
한편 그렇게 무책임한 스승을 둔 곽재우는 이제 15살의 청소년이 되었다. 예정대로라면 내년쯤에 다시 조식에게 돌아가야 하는 곽재우지만 지금은 내금위 제3부 소속 일개 위사의 신분으로 한성부로 향하는 배에 타고 있었다. 원래는 재정부장 김호진 아래서 회계를 담당했지만 언젠가 경비단의 대규모 훈련을 구경하고는 입대 하한선인 15세가 되자마자 경비단으로 들어갔다.
원래 곽재우 같은 신입병사들은 비금도주둔군에서 기본훈련을 몇 달간 해야 하지만 균이 그를 지목을 해서 불러올리는 바람에 이렇게 배를 타고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의 난간을 붙잡고 속에 있는 것을 바닷속으로 모두 토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4년 전에 비금도에 들어갈 때보다는 양호해서 어지러워서 뱃전을 굴러다니던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비금도에서 한성부근처의 마포나루까지는 감히 나주와 비금도와의 거리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다.
'저 곽재우.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제가 관직에 오르면 기필코 수군장수는 안 될 겁니다. 우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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