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1년.
어느덧 조선에도 봄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명의 칙사가 다시 조선을 찾았다. 명나라의 조선국왕 책봉사인 정사 요신과 부사 이경은 모화관으로 친히 마중 나온 조선의 소년 왕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균이 국상을 핑계 삼아서 영의정 이준경을 대신 보냈지만 이제는 그런 이유가 없어서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덕분에 환영연회가 베풀어진 모화관 일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계속되었다.
연회가 끝나자 균과 문무백관, 그리고 칙사일행은 숭례문을 통하여 한성부로 입경하였다. 그리고 깔끔이 단장된 길을 따라서 경복궁으로 입궐했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전달 받는 곳은 대궐의 정전 즉 경복궁 근정전이다. 이미 근정전에는 용상위에 명황제를 상징하는 궐패가 올려져 있고 칙사가 궐패 앞에 칙서를 내려놓으면 균과 문무백관들은 자신들이 명황제의 신하라는 표시로 절을 네 번했다.
그다음에 칙사를 통해서 칙서를 받게 되는 데 이때 균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칙서를 받아야했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행사가 정전에서 치러지는데 칙사는 명황제를 대신하여 주인의 예를 따랐고 균은 명황제의 신하로써 손님의 예에 따라서 행동을 해야 했다. 이런 의식은 균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사대 행위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기에 균은 이를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온 신경을 다 쏟았다.
균이 그렇게 성의를 보인 것처럼 이번의 칙사들은 그다지 방자하지 않았다. 칙사들이 오기 전에 균이 그런 예법을 예습하여 흠잡을 곳이 없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장거정의 충고 때문이었다. 명나라 내각수보 서계의 친우이자 명망이 높은 장거정이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와서는 '조선의 신왕을 어리다고 앝잡아 보다가는 큰 코 다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기 때문이다. 이를 궁금해 여긴 사람들이 틈만 나면 장거정에게 그 이유를 물었는데 장거정의 답은 한결 같았다.
'내가 논쟁을 벌여서 밀린 경우가 여러 번 있지만, 논쟁에 패해서 사과한 것은 조선왕이 처음이다. 척 보기에는 어린 소년으로 보여 대부분 방심하겠지만 그 심계가 깊어서 웬만한 말솜씨로는 당하기 힘들다.'
그렇게 장거정이 완패를 시인하는데다가 명나라 사신단이 경복궁 앞에서 사죄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접한 명의 관리들은 그 전까지 선호하던 조선사신행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정사 요신과 부사 이경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조선으로 떠나기 전날 장거정이 찾아와서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지금도 요주의 인물인 조선왕 균의 움직임을 살피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근정전에서의 예식이 끝난 후 칙사들은 태평관으로 이동하여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고 균도 자신의 거처인 강녕전으로 돌아왔다. 균이 강녕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도승지 정인기가 급히 균이 처리해야 할 문서들을 가지고 와서는 먼저 균에게 축하인사를 하였다.
"전하.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으신 것을 경하 드리옵니다."
"휴~!"
정인기가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아서 조선의 왕으로 공인된 균에게 축하인사를 했지만 균의 표정은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러자 정인기는 그 것이 명나라 사신들과 관련된 줄 알고는 다시 균에게 물었다.
"전하. 망극하오나 혹시 명나라에서 추가적인 공물을 요구해 온 것이옵니까?"
"아니오. 숙부. 아직 칙사들이 과인에게 더 요구한 공물은 없지만 조선의 왕인 과인이 조선의 궁궐에서 손님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오."
"하오나 전하. 다 형식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선이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큰 전란이 없는 것만 해도 큰 이익이옵니다."
"제 아무리 명나라가 우리 조선의 10배가 넘는 인구와 20배나 되는 영토를 가진 대국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조선도 단군왕검이래 4천년을 이어온 문명대국이오. 그 역사로 따져서는 중원의 역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 나라인 우리 조선이 이렇게 명의 일개 제후국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과인은 무척이나 부끄럽고 슬프오."
균의 말에 정인기는 잠시 주춤하였다가 대답하였다.
"소신 도승지 정인기. 감히 주상전하께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역대 제왕들께서는 모두 다 주상전하와 같은 생각에 빠지신 적이 있습니다. 당당한 조선의 국왕이 아무리 명나라 황제라고는 하지만 타국의 임금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는 나라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일입니다. 하나 우리 조선에서는 맹목적으로 명을 따르는 자들이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태조대왕께서 나라를 개국하시며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지도 17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때는 우리 조선의 정세가 불안하여 할 수 없이 조공을 바쳤지만 세월이 지나 조선의 국운이 왕성한 지금에도 많은 유생들이 유학의 발상지라는 이유만으로 명나라에 복속하기를 원하고 전하보다 명나라 황제에게 더 충성을 하는 자들도 있사옵니다.
비록 지금 전하께서 굴욕감을 느끼신다고 하시어도 이를 함부로 표현하실 때는 아니옵니다. 소신이 전하께서 성장하실 무렵부터 전하의 뜻이 크고 깊은 것은 잘 알고 있사오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명심하시고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려 국운이 더욱 번창하게 하시옵소서. 언젠가는 명의 사신을 다른 나라의 사신들처럼 상석에서 맞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인기의 말을 들은 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비록 구체적인 말은 아니지만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조선의 관료가 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말이었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유학자들은 지금은 황제가 다스리는 땅이라고 만주가 옛 조선의 영토였다는 기록을 지우고 조선의 왕보다 중국의 황제를 자신의 주군으로 생각한다며 단군보다는 기자를 민족의 조상으로 생각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균이 생각하는 만큼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명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 명이 구원군을 파견한 뒤의 일이다. 그것도 정치적인 요인이 커서 오리지날 선조가 자신의 과실을 숨기기 위하여 일부러 조장하였다고 한다. 사석에서는 명군이 못 싸우는 밥버러지라고 욕하면서도 공석에서는 '조선의 힘으로는 절대 왜군을 격퇴 못하는데 자기가 명에 원병을 청하여 물리쳤다.' 라고 하면서 명의 재조지은(나라를 다시 되찾아준 은혜.)과 그 재조지은을 이끌어내서 왜군을 물리친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자신의 과실을 숨기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그 말에 속지 않았다. 덕분에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위임통치를 해야 할 만큼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선조의 뒤를 계승한 광해군은 자신이 명군의 한심함을 전장에서 직접 겪어본 인물이기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취하여 명에 대한 사대가 다시 약화되는 듯 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정권이 광해군의 모든 정책을 비판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를 강화시켰고 그 서인정권이 조선후기의 집권세력이 되면서 명에 대한 사대주의는 극에 달하였다.
물론 그전에도 상당수의 사대주의자들이 존재하였으나 인조이후만큼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균의 예상과는 달리 정인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인기의 말을 듣고 잠시 얼굴에 놀라움을 띄었던 균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간 후 말했다.
"과인의 뜻도 숙부와 같소. 지금은 과인이 노력을 해야 할 때이지 다른 신하들에게 과인의 뜻을 함부로 내보일 때가 아니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때까지 숙부는 과인의 옆에서 과인을 잘 보좌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정인기가 한 뜻밖의 말로 희망을 얻은 균은 기분이 좋은지 계속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정인기가 내밀은 결재 서류들을 보고는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 서류들은 명나라 사신의 접대에 관한 서류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던 균은 눈물을 머금고 그 서류에 결재도장을 찍었다. 명나라 사신의 접대비로 들어가는 돈이 아까웠던 탓이다.
며칠 후 명나라 사신들이 열렬한 환송과 푸짐한 선물을 받으며 한성부를 떠난 직후 배를 타고 마포에 도착한 내금위 소속병사들은 야간을 틈타서 조용히 입경하였다. 한창 조운선의 수요가 많아서 배도 부족한데다가 준비도 안 된 바람에 올라온 병력은 몇 백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두 합치면 2천명이나 되는 대부대였기에 경복궁에 같이 주둔시킬 수가 없어서 일단은 비어있던 창경궁과 창덕궁일대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균은 비금도의 정예병이 속속 도착하자 내금위장 곽흘과 도승지 정인기 등을 대동하고 조용히 창경궁으로 거둥했다. 일단 내금위와의 지휘체계를 정립시켜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내금위라고 하여도 곽흘 직할의 1부와 임꺽정의 2부, 3부로 나누어진다. 둘은 같은 부대에 속하지만 전혀 다른 부대였다.
"충~!"
균의 거둥을 발견한 제 3부 병력 1천여 명이 일제히 군례를 취했다. 전원 56식 소총을 장비하고 1년 넘게 군사훈련만 받은 직업 상비군이었다. 그 정도의 정예부대이니 군례를 취하는 동작도 일반 조선군의 수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일사 분란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내금위장 곽흘이 기분이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새로 내금위가 보강되어 양적으로는 늘어나도 질적으로는 떨어질까 바서 걱정을 했는데 눈앞의 군대는 척 보아도 정예군임을 알 수 있었다.
반대로 도승지 정인기는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다. 균이 비금도에서 일부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챘었다. 아무리 균이 날고 기어도 모든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기에 자체 치안병력정도로 인색을 하고 눈감아 주었는데 지금 보니 치안병력이 아니라 정예병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출퇴근 할 때마다 보는 내금위 위사들 못지않은 수준에 이른 군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균은 내친 김에 비금도 경비단의 특기인 제식훈련을 하도록 명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반응은 그 차이를 더해갔다. 저런 정예군을 지휘하게 된 곽흘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런 정예군을 균이 길렀다는 사실을 아는 정인기는 조카의 능력에 대한 평가를 몇 등급 상승시키고 있었다. 제식훈련 및 간단한 시법을 선보이게 한 균은 감격한 곽흘과 경악한 정인기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지휘관 막사로 들어갔다. 잠시 후 두 명의 지휘관이 다가와서 균에게 군례를 올렸다. 제 2부 부장 남창완과 제 3부 부장 정병은이었다.
"충~!"
"그래 됐다. 그대들이 제 2부 부장 남창완과 제 3부 부장 정병은인가?"
"예. 전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힘들게 올라온다고 정말 수고가 많았다."
남창완은 원래 황해도 피난민출신이었는데 비금도에서 경비단이 결성될 때 입대하여 빠르게 승진한 인물이다. 그 지휘능력도 상당하여 부장의 지휘를 얻었지만 무엇보다도 한문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의 출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정병은은 원래 정인기가 비금도로 데리고 들어간 무사중에 하나인데 비금도의 군사력이 임꺽정의 경비단으로 재편되는 가운데에서도 그 자리를 지켜 지금은 임꺽정과 겨룰만한 검술을 인정받는 장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균을 먼 곳에서만 보았을 뿐 이렇게 가까이서 본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균은 그들의 수고를 알고 격려하자 둘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닙니다. 전하. 전하의 어명이 계셨는데 소장들이 어찌 길이 멀고 험하다고 하여도 아니 올 수 있겠습니까?"
"내금위장. 경의 새로운 부장들을 보니 기분이 어떠하오?"
"예. 전하. 조선 천지에 이렇게 용맹한 장수와 군대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의 혜안에 소신 감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존의 내금위들과는 크게 다르니 내금위장의 일거리가 더욱 많을 것이오. 부디 최선을 다해 주시오. 그리고 두 부장들도 내금위장의 명을 진심으로 따라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전하."
세 장수가 함께 대답을 하자 작은 막사 안은 떠나갈 듯 하였다. 휘하 장수들의 우렁찬 소리를 들은 균은 기분이 무척 좋아져서 정인기에게 명했다.
"도승지는 즉시 새로운 내금위 위사들이 그 피로를 풀 수 있도록 술과 고기를 내리도록 하시오. 또한 임시 거처이지만 병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물자를 아끼지 말고 지원해주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며칠 전 명나라 사신의 방문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균은 새롭게 알게 된 정인기의 생각과 자신의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친위군의 모습에 그 기분이 확 풀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기분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균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