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228)

 즉위 1년.

그다음에 균이 만난 사람은 곽재우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서로 11살의 어린 꼬마였지만 그 뒤로 4년이 지나자 두 사람 모두 15살의 소년으로 성장하여 앳띤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두 사람 다 성장속도가 빠른 편이라서 1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곽재우는 이동시 배멀미를 많이 하는 바람에 얼굴이 헬쓱하였다. 그 모습을 본 균은 4년 전에 멀미를 하던 어린 곽재우가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이구나. 과인이 듣자하니 이번에도 배를 타고 오다가 죽을 뻔하였다는데 몸은 좀 괜찮으냐?"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별탈은 없사옵니다."

"하하하. 그래 그러면 다행이다. 그런데 과인은 네가 김부장 아래서 배우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찌 군대에 입대를 하였느냐?"

원래 균은 곽재우를 가르칠 시간이 부족하자 김호진에게 맡기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눈에 보일정도로 막대한 이익을 보여주어 상업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상업보다는 농업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농본주의를 내세웠는데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물을 계속 보여주어 벌써 상당부분 성리학에 물들어가는 곽재우의 생각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 균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균이 비금도를 떠나오면서 부장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는데 최근에 경비단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유명한 의병장이 되는 인물이라서 군사에 관심이 많은 것은 이해는 가지만 아직도 성리학제일주의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균은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균의 걱정은 곽재우의 다음 말을 듣고 말끔히 사라졌다.

"제가 재정부에서 일할 때 막대한 재정을 소모하는 경비단을 왜 유지하는지 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 바가 있사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역하러온 왜인들의 이야기를 숨어서 들어 보라고 하여 정보부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들었더니 '이 섬은 풍족하여 매우 탐이 나는 땅이지만 군대가 조선군답지 않게 강하여 감히 이 일대를 침공할 엄두도 못 낸다.' 라고 하였사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느낀 바가 컸사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많은 왜구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경상도일대에는 왜구의 출몰이 잦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이를 지켜야할 조선수군은 나태하고 난폭한 왜구를 겁내어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사옵니다. 비금도의 강한 군대는 바로 전하께서 말씀하신 상업에서 나오는 것이고 덕분에 비금도와 그 일대의 주민들은 왜구의 피해를 입지 않사옵니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선은 백성들이 못 살고 왜구도 못 막는 반면 전하의 뜻을 따르는 비금도는 백성들도 잘 살고 왜구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옵니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데 제가 어찌 성리학의 가르침만을 옳다고 하고 따르겠습니까? 그리하여 전하께서 내주신 과제는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기에 사내대장부답게 군대에 입대하여 문약한 저를 채찍질하고자 하였사옵니다."

"하하하. 네 생각이 그리하다니 정말 장하구나. 과연 동래부사 곽월의 아들답도다."

곽재우의 아버지는 곽월인데 원래는 문관이지만 무재가 뛰어나서 나라가 위급할 때 큰일을 할 인재로 칭찬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이에 균은 작년에 곽월을 동래부사로 임명하여 왜구의 침탈을 막으라는 임무를 내릴 정도 이었으며 아들인 곽재우 역시 그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곽재우의 말을 듣고 잠시 좋아하던 균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곽재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네 스승인 남명선생에게도 말할 수 있겠느냐?"

"비록 제가 많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잊어버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사옵니다."

"그래. 과인이 너에게 신경을 못 써주었는데도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네 생각이 변할 일들은 많을 것이다. 네가 너만의 확고한 가치관을 만들 때까지는 단 하나의 사상에 집착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렇게 곽재우의 생각이 바뀐 것을 확인한 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가 나누어지는 것까지 확인을 한 후에야 균은 남창완, 정병은 곽재우등 마중을 받으며 곽흘, 정인기등과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균이 바라고 바라던 조식과 그 제자들이 입궐을 하여 균을 알현하였다. 올라오라고 연락을 보낸 것이 1월이었는데 실제로 조식이 올라온 것은 3월이었기에 균이 기다린 시간이 길었지만 명종이 그렇게 부탁을 해도 은거하던 조식이 균의 말 한 번에 출사를 결심했다는 소식은 균의 위신을 세워주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균은 예정에는 없던 조식의 제자들에게도 벼슬을 내려주고 조식에게 한성부에서 거처할 집 한 채를 하사해주었다.

균과 조식, 그리고 곽재우 세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균이 하사해준 집에 대해서 조식이 감사하는 뜻을 전하러 왔을 때였다. 조식이 입궐하자 균이 곽재우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이 명종 17년이었으니 거의 4년 전의 일이었다. 4년 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인 조식과 곽재우는 어전만 아니었으면 서로 손을 잡고 울면서 이야기할 정도로 서로 반가워했다. 균은 일단 두 사람이 평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빈방을 내주었다.

"스승님 절 받으시옵소서."

"오냐. 정말 많이 컸구나. 재우야. 그래 그간 힘든 일은 없었느냐? 듣자하니 내금위에 있다면서?"

"예. 스승님. 하지만 내금위에 지원한 것은 올해 초이고 작년까지는 비금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번 네가 보고 느낀 것을 천천히 말해보거라."

원래 곽재우는 조식이 균의 생각과 능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토정 이지함의 충고를 받아서 균에게 맡긴 아이였다. 그간 비금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자신이 아는 중요사항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지만 제 스승인 조식에게는 균과 비금도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물론 정말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정도만 해도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먼저 비금도는 무척이나 살기 좋은 곳입니다. 제대로 된 농토도 없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특히나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느라고 집집마다 연기를 피어 올리는 모습과 살이 통통히 오른 채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하긴 주상전하의 성품을 보아서는 백성들이 굶주리는 꼴은 못 보실 분이지."

"또한 비금도가 벌어들이는 돈은 엄청납니다. 장부상이지만 1년에 수백 만 냥이나 되는 돈이 오고갑니다. 덕분에 비금도의 주민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으며 부역이나 군역 같은 강제적인 인력동원도 없이 자유롭게 자신이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세금 같은 것이 아예 없다니... 그리고 수백 만 냥이면 우리 조선의 호조가 담당하는 예산보다도 더 많은 것이 아니냐?"

"물론 모두 비금도의 수입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엄청난 액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비금도는 그 돈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고 유지하는 중입니다. 단 3백 명의 병사가 반나절도 안 되어 수백의 왜구를 생포할 만큼 강한 병사가 수천에 소총이라는 신무기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럼 전하께서 사병을 양성하고 계시었단 말이냐?"

거기까지 듣던 조식은 균의 사병이 수천이라는 말에 언성을 높였다. 균이 왕위에 오른 것은 고작 8개월 남짓하다. 그사이 비슷한 수의 왜구와 대등이 싸워 그들을 생포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기를 수는 없다. 군대의 양성이란 최소한 1년은 있어야 쓸만한 병사가 나온다는 사실은 기본이다. 그렇다면 균은 아무리 못해도 세자시절부터 군대를 보유했다는 소리가 되고 그것은 반역이었다. 하지만 곽재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스승에게 말했다.

"스승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비금도등 다도해 일원의 방어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왜구를 막기 위해서 양성한 민병대가 많은 자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또한 주상전하는 이미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계셨지만 선대왕마마나 대비마마, 순회세자께 어떤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전하께서 역심을 품었다면 아마 사병을 풀어서 반란을 계획하고 성공을 하셨을 분입니다."

"그렇기는 하다만은 신하된 자로써 그런 사병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스승님. 그런 군대가 없었다면 전하와 비금도의 주민은 물론이고 다도해 일대가 왜구에게 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 전라우수영은 고작 조운선을 지키는데만 온 힘을 다하고 있어 주상전하의 사병으로 인해 목숨을 구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지나치게 법도만을 따르지 말라고 하시던 스승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습니까?"

곽재우의 반론을 들은 조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선에서 국왕의 군대를 빼고는 다른 이의 군대는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당장 왜구가 쳐들어오는데 지켜줄 관군은 없고 또한 지켜야 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칼을 들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오지도 않는 관군을 기다리며 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부패한 관군역시 비금도의 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자체적인 방위력을 갖추는 것이 조식의 관점에서도 더욱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듣고 보니 네 말이 옳다. 왜구든 관군이든 비금도의 부를 탐내고 인명을 해칠 것이 뻔한데 국법을 지킨다고 손을 놓고 지내는 것보다야 전하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니 바람직한 일이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두 사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나누었다. 김호진이나 박수익등이 교육을 잘 시켰는지 곽재우는 비금도의 일급비밀들은 거의 몰랐고 아는 사실들도 중요하지 않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사실이 고작이었다. 그 정도는 조금만 다르게 생각을 해도 이해를 할 수 있는 사실들이기에 조식은 곽재우의 말에서 균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거의 알아낼 수 없었다. 설사 알아냈다고 해도 소문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기에 조식은 특별한 문제점을 알아내지 못하고 비금도의 번영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제자인 곽재우와 면담을 한 조식의 다음 상대는 당연히 균이었다. 균에게 있어서 조식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문제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아직 조정 내에 남명학파의 세력은 대단하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준도 아니었다. 자신과 남명학파 그리고 잔여 훈구세력이 뜻을 맞춘다면 조정의 주도권은 균의 것이었다. 그래서 균은 집을 한 채 하사하면서까지 조식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고 있었다.

"신 사헌부 장령 조식. 주상전하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래 재우는 잘 만나보셨소?"

"예. 전하. 감히 전하께 수고를 끼쳐 드린 점은 소신의 잘못이 크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때 과인은 어린 꼬마였고 경은 명망이 높은 대학자였소. 지금도 과인이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은 데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소. 만일 그래도 경이 용서를 구한다면 과인을 도와서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번창하게 하는 것이 과인이 그대에게 내리는 벌이오. 아시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균과 조식 두 사람만이 있는 강녕전. 먼저 조식은 균에게 용서를 구했다. 신하가 감히 국왕에게 제자를 떠맡긴 셈이니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균은 그런 것을 물고 늘어질 필요도 생각도 없기에 좋은 말로 넘겼다.

"이번에 과인의 뜻에 따라서 조정에 출사한 것만 해도 과인에 큰 힘이 되오. 앞으로도 경이 과인의 뜻을 헤아려 이 나라 조정을 이끌어 나가는 신하가 되어주었으면 하오. 그건 그렇고 재우를 만나본 소감은 어떻소?"

"망극하오나 전하. 역시 어리석은 소신의 밑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생각이 깊어져 기쁘기 한량없었나이다. 특히 주상전하께서 다스리던 비금도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감명 깊었사옵니다. 사람들은 굶주림을 모르고 세금도 안 내고 살아간다니 소신은 소신의 귀를 의심하였나이다."

"다 사실이오. 대부분은 재우에게서 들었겠지만 과인은 비금도의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해서 제법 많은 일을 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비금도가 만들어졌소. 비금도는 조선 어느 곳보다도 일반 백성들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점을 과인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소. 하지만 이제 과인은 조선의 군주요. 과인의 힘이 부족하여 조선전체를 비금도만큼이나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하오나 전하. 전하는 어린 나이에도 뜻을 세우시고 또한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소신은 전하께서 곧 조선 천지에 요순시대를 만드실 성군이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사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인뿐만 아니라 신료들의 도움이 절실하오. 하지만 경도 알고 있듯이 신료들은 물론 지방의 일부 토호들은 과인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니 걱정이오."

균은 비금도를 이룩한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면서도 조정 내에 자신의 세력이 없으니 도와달라는 의미로 계속 힘이 없다, 또는 신료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말로 조식에게 도움을 청했다. '네가 도와주면 나는 조선을 비금도로 만들 수 있다.' 뜻이었다. 하지만 조식은 절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무턱대고 따르기는 어려웠다. 최소한 두 사람의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중립을 지키자는 것이 조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날 조식과의 대면에서 균은 전혀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