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228)

 즉위 1년.

"전하. 마음을 편안히 하시옵소서. 다 순리에 따르는 일이옵니다."

"전하. 상선의 말이 옳습니다. 그렇게 걱정을 하실 필요까지야 없사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산실청을 열어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지 않사옵니까?"

즉위 1년째인 1566년 4월 드디어 대비 심씨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도 아닌 형제에 불과한 균이지만 출산을 앞두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곧 아기아빠가 될 사람처럼 보여 주변의 상궁나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짓고 있는 처지였다. 오죽하면 도승지 정인기가 일부러 많은 양의 상소문을 통과시켜서 균에게 일거리를 안겨주었지만 균은 최단시간의 최다 일처리기록을 세우면서 간단히 끝내버려서 정인기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균이 어렸을 때부터 어린 아기들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인기지만 이번의 아기는 조금 달랐다. 당장 왕자라도 태어나면 균의 가장 큰 적이 되는 판국에 그것을 제일 경계해야할 균은 오히려 좋아서 죽으려고 하니 정인기는 한숨만 나왔다.

'정무를 돌볼 때는 애늙은이이시고 저런 때는 어린애 같으시니....'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균의 행동은 무척이나 이상한 것이었다. 자신의 최대정적이 되는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며 돕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권력에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힘이 가장 중요하다. 당장 균의 친위세력인 내금위 3천명만 해도 허수아비에 가까운 오위도총부의 전력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전력이다. 거기다 내수사와 외수사를 통하여 막대한 재정을 확보하고 있다.

권력의 필수요소인 군사력과 자금력을 확보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세력하나 없는 갓 태어난 아기정도는 균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에 과민반응 하는 것보다 자신의 평판을 좋게 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균은 생각했다. 그 예로 저번에 균이 대비를 감싸는 척하자 균 자신은 못된 양어머니를 진심으로 모시는 효자로 대비는 착한 아들을 의심하고 구박하는 못된 양어머니로 소문이 나는 바람에 얻은 이익이 적지 않았다.

물론 아기가 남자아이이고 무척이 뛰어난 아이일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균에게 위협적이지만 그 확률은 무척이나 낮았다. 당장 아버지인 명종과 아기의 친 형제인 순회세자를 보아도 아이가 균을 능가할 만한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남자아이라는 보장도 없다. 여자아이라면 균에게 티끌의 영향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대비의 아기가 균을 위협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고 균이 이에 민감한 반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다 계산을 한 균은 저렇게 웃고 있는 반면 오히려 균의 측근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직 어린 균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균과 측근들이 다른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한참 후에야 대비전에 파견해두었던 내관이 달려와 균에게 보고를 했다.

"전하. 대비마마께오서 공주아기씨를 생산하셨사옵니다."

"오~. 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생산하시었다?"

"예. 전하. 경하 드리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내관의 보고에 들은 정인기와 정내관등은 입을 모아서 균에게 축하를 했다. 겉으로는 누이동생을 얻은 균에 대한 축하지만 속으로는 왕자가 태어나지 않은 데 대한 축하였다. 균도 무척이나 기뻐하여 크게 웃었다. 아무래도 왕자보다는 공주의 탄생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하하. 이렇게 기쁜 일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은 어떠하냐?"

"두 분 모두 건강하다는 어의의 전언이 있었사옵니다."

"암암. 그래야지. 과인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내관은 과인의 무명옷을 대비전에 전달하여 공주의 배냇저고리로 사용하도록 하라."

"예. 전하. 대비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배냇저고리는 아기의 몸을 감싸는 쓰이는 것으로 주로 무병장수한 관료의 오래된 무명옷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래된 무명옷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의 무명옷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바람에 실제로는 사용하지는 못하고 형식적으로는 균이 그만큼 아기의 탄생을 반긴다는 의미로 대비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대비전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공주임을 알게 된 대비 심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 자신의 자식이 보위를 이를 가능성은 더 이상 없었다. 자신도 균처럼 영특한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균의 뒤를 이어서 이 나라의 왕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다 물 건너간 일이었다.

이는 대다수의 종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심 같은 방계의 왕족인 균이 보위를 차지한 것을 시기하고 차라리 적통의 왕자가 태어나서 균이 왕좌에서 쫓겨나기를 바랐는데 공주가 태어나면서 그럴 가능성은 더욱 없어지고 오히려 균의 권위만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조선의 왕족 중에서 균보다 더 정통성을 가진 왕자는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공주가 태어나자 균은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려서 왕실의 경사를 만백성이 기뻐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 대사면령이지 사실 전국의 감옥에는 흉악범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남아있던 범죄자가 없었다. 연이은 순회세자, 문정왕후, 명종의 죽음으로 많은 사면이 단행된 데다가 균도 이번의 사면 말고도 조광조의 신원때 같이 사면을 단행했고 작년에 왕위에 올라서도 사면을 단행한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너무 심할 정도로 사면이 남발되어 치안이 위협받을 우려가 있었지만 균은 흉악범에 대한 사면은 하지 않았고 또한 지금 감옥에 갖혀있는 사람들보다는 수배된 사람들의 수배를 풀어주는 방향으로 사면을 하였다. 이는 풀어줄 범죄자가 적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유민출신이 대부분인 비금도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고 다시 호패를 발행하여 이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기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면을 해도 반란군 수장인 임꺽정등과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된 박수익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균은 임꺽정등에게는 아예 다른 이름을 부여해서 호패를 발급하고 박수익은 다시 되살리는(?) 방안을 고려해야 했다. 그러한 균의 계획덕분에 비금도는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모두 균의 극악한 작명실력에 의한 것이었다.

"뭐라고 내 이름이 임.창.정.?"

"예. 임부장님. 주상전하께서 임부장님과 여러 장수들의 공을 높이 사서 새롭게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호패까지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주상전하께서 이름을 내려주시는 것은 크나큰 영광입니다. 더욱이 이제 임부장님도 이곳 비금도에 숨어 지내실 필요는 더 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하~! 이렇게 기쁜 일이... 그러면 이제 내가 더 이상 구월산 패거리의 수장인 백정 임꺽정이 아니라 조선군 장수인 양인 임창정이 되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임부장님. 정말로 경하 드립니다."

균의 대사면령이 내려진지 얼마 안 되어 비금도에도 균의 어명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극악한 작명실력을 가진 균은 여러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전생에서 생각나는 이름으로 대충 지어버리는 바람에 임꺽정은 임창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이름을 받고 기뻐하는 임창정을 보던 비금부 본부장 서유생이 혹시나 자신의 이름도 있는지 궁금하여 소식을 전해온 박수익에게 물었다.

"나는.... 나는 혹시 전하께서 이름을 안 내리셨소?"

"서 본부장은 어디보자.... 서 본부장도 주상전하께서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시었소. 이름이...

서.장.금. 이구려. 경하 드리오. 서 본부장."

"서장금이라... 참으로 좋은 이름 같구려. 그런데 박부장은 주상전하께서 이름을 하사하시었소?"

"물론이오. 이제부터 선전관 박.수.홍.으로 불러주시오. 하하하."

원래 임금에게 새로운 이름이나 성을 하사받는 것은 공이 큰 공신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며 영광이다. 그래서 그들은 균이 내려준 새로운 이름을 받고는 무척이나 기뻐하더니 그 날 저녁 비금도의 술이란 술은 모두 바닥내었다. 하지만 그 무렵 아무래도 찜찜한 생각이 들은 균은 다시 다른 이름을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으니 세 사람의 새로운 이름이 오랫동안 불려질 수 있지는 아직은 미지수였다.

아무튼 균은 임꺽정등에게는 다른 이름을 하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인상착의와는 다른 모습을 하게 했다. 동시에 임꺽정의 인상착의를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인 서림을 찾아내서 죽여 버렸기에 이제 그들이 임꺽정일당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모두 균의 휘하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배신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더 이상 임꺽정의 과거를 문제 삼을 만한 일은 없게 되었다.

박수익의 경우는 어떻게 조금 더 복잡했다. 이미 법적으로는 죽은 지 육년이나 지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균은 그냥 죽은 것으로 처리하려고 박수홍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아무래도 균의 근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균은 박수익과 그의 친구 도지철을 연계시켜서 하나의 연극을 시키기로 하였다.

즉 평산 전투에서 패전한 후 사로잡힌 박수익은 어느 날 허술한 경계를 뚫고 도주하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비금도였고 잠시 기억을 잃고 비금도에서 일하다가 마침 균의 명령으로 전라도에 내려왔던 도지철을 만나서 기억을 되찾았다는 그저 그런 이야기였다. 물론 허술한 이야기지만 벌써 6년 전에 낮은 벼슬자리에 있던 박수익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균은 생각했다.

"도리도리도리 까꿍!"

"까르르~"

아기가 태어나서 한참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균의 팔불출 행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틈만 나면 대비전에 찾아와서 제 누이동생을 데리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놀아준다고 정신이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대비 심씨나 유모가 안아들면 아기가 낯이 설어서 우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균은 아기를 데리고 살았다. 특히 꼬물거리는 보면 너무 귀여워서 쓰다듬어 준다고 정신이 없으니 주변의 사람들은 친자식이라도 태어나면 정사를 팽개치지나 않을지 크게 걱정을 하였다.

물론 균이 정사를 모두 처리한 다음에 놀러오는 것이지만 지나친 균의 대비전 출입에 삼사에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지만 그런 방해쯤이야 신경도 안 쓰는 인물이 바로 균이었다. 또한 아기가 울거나 균의 옷에 소변을 본다던지 해서 지켜보던 대비와 유모를 난감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균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어머니의 방해로 여동생 진이와 숙모의 방해로 사촌동생 현아등과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균에게는 대비의 아기는 마음껏 데리고 놀 수 있는 좋은 상대였다.

물론 균은 귀여워서 아기를 데리고 노는 것이었지만 이를 지켜보는 대비의 입장에서는 균이 고맙기만 했다. 공주(왕비가 낳은 딸)든 옹주(후궁이 낳은 딸)든 그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당시 왕이다. 왕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면 좋은 곳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지만 왕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안 좋은 곳으로 시집가서 일생을 불행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 대비 심씨의 하나뿐인 어린 딸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아주는 균이 고마운 것이다. 저렇게만 아껴준다면 하나뿐인 자식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균이 자주 대비전을 찾는데다가 왕대비 박씨도 귀여운 아기를 보려고 균을 핑계 삼아서 찾아오는 바람에 대비전은 왕실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복잡해졌다. 특히 균과 왕대비가 이끌고 온 상궁나인과 내관들이 상당한 수이기에 대비전 안마당까지 덩달아서 혼잡스러웠다.

"도리도리 잼잼. 까꿍~!"

"까우~."

"주상은 아직 혼인도 안 하신 분이 어찌 그래 아기를 잘 돌보시오?"

"예. 할마마마. 소손이 걸음마를 겨우하던 어린 시절부터 여동생이 하나 있어서 같이 자랐사옵니다. 덕분에 이렇게 아기만 보면 그 때 생각이 나서인지 무척이나 귀엽사옵니다. 특히나 소손의 누이라서 그런지 더 이뻐보이옵니다."

한창 아기를 데리고 논다고 정신이 없던 균에게 왕대비 박씨의 질문이 떨어졌고 균은 일부러 자신의 누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대비 심씨의 얼굴이 더욱 밝아지게 해주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왕대비 박씨는 속으로 자식하나 없이 혼자 늙어가는 자신을 생각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분을 바꾸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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