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228)

 즉위 1년.

"이제 주상의 보령도 열다섯이오. 내년이면 벌써 열여섯이고 또한 왕실에 자손이 귀한 상황에서 주상이 홀로 지내심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오. 그러니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중전을 간택하는 것이 어떻겠소?"

"응애~!"

왕대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무거워졌다. 당장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균의 얼굴이 굳어버려서 놀란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왕대비의 생각대로 균은 왕비를 맞아야 할 때가 맞다. 하지만 그 말은 대비 심씨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말이고 또한 균 역시 지금 당장은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균은 즉시 아기를 유모에게 넘기고 정색을 한 채 말했다.

"하오나 할마마마. 아직 소손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이옵니다. 아직은 처자식을 거느릴 만한 나이가 아니오니 그 말씀은 거두어주시옵소서."

"하나 옛말에 이르기를 여자는 일곱 살 남자는 여덟 살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소. 그래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또한 예종대왕은 열한 살에 인성대군을 얻은 전례가 있는데 이제 열다섯인 주상이 아이를 못 가질 이유가 어디 있겠소?"

옛날에는 칠세 이상의 아이들은 같은 방에 재우지 않았는데 실제로 임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의 8대왕 예종은 11살 때 16살의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은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남미에서는 저 정도면 뉴스거리도 아니다. 남미에서 나온 세계 최연소 출산기록은 6살짜리 여자애가 9살 남자애랑 소꿉놀이 하다가 애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6살에 엄마가 된 소녀의 엄마는 당시 나이 18세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18살에 할머니가 된 셈이다.

하지만 균은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아직은 없었다. 지금 균이 결혼을 하여 왕자를 얻는 다면 왕권이 크게 안정이 되겠지만 문제는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의 국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들과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먼저 왕비간택의 결정권자는 왕실의 어른인 대비들이다. 왕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참여를 할 수 없다. 따라서 균은 두 대비들이 골라주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비간택을 살펴보자. 국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이 결정되면 전국에 13~17세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지고 가례도감이 설치되어 왕비후보자들의 처녀단자(처녀의 사주, 집안내력이 담겼다.)를 각 집안들로부터 받아 일종의 서류심사를 시작한다. 이 때 이씨 성을 가진 처녀는 무조건 제외가 된다. 간택은 크게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세 번으로 이루어지고 초간택에 걸린 처녀들은 가마를 타고 한성부로 향해서 재간택을 받고 재간택에서 뽑힌 세 명의 최종 후보자중에서 대비의 낙점을 받으면 왕비가 되고 나머지 두 명은 후궁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들의 혼례는 정략결혼의 성격이 강했다. 왕비감은 이미 혼인이 결정되기 전부터 대비가 정해두고 이러한 행사는 형식적으로 치러졌기에 대부분의 양반들은 자신의 딸이 형식적인 간택에 뽑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왕비를 배출한 가문은 명문가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왕실은 그런 유력가들과 혼인관계로 유대를 맺어 상대적으로 약한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역사에서 외척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현재 균의 왕권은 어느 정도는 안정되어있다. 하지만 여러 정파들의 세력균형을 맞추는 상황에서 안정된 왕권이기에 언제든지 약화될 수 있는 불안한 왕권이다. 이런 현실에서 혼인을 한다면 가장 유력한 가문의 처녀와 혼인을 하여 정치적인 지지 세력을 만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균은 이에 반대했다. 불안한 왕권이야 균의 군대와 돈으로 보강할 수 있지만 왕비와 외척이 개혁의 반대세력으로 나서면 굉장히 난감하기 때문이다. 태종처럼 처가를 싹쓸어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하오나 할마마마. 아직 아바마마의 삼년상도 다 끝나지 아니하였고 어마마마께서도 동생을 생산하신지도 얼마 되지 않았사옵니다. 또한 시급한 국사가 산적하여 있고 흉년으로 국가재정이 흔들리는 이 때에 그런 가례(왕, 세자의 혼인)를 치른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주상. 주상이 빨리 후사를 보아서 왕실을 튼튼히 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오. 주상이 하루라도 빨리 가례를 올려서 대통을 잇게 될 원자를 보시는 것이 주상의 중요한 책무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라오."

"소손이 어찌 할마마마의 깊은 뜻을 모르겠습니까? 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일이니 할마마마께서는 심려는 놓고 좋은 소식을 기다려주시옵소서."

"주상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주상의 가례가 시급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주상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왕대비마마도 아시겠지만 주상은 영특하신 분입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하시는 말씀일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보던 대비 심씨가 균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덕분에 왕대비 박씨는 두 사람의 반대에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대비 박씨는 한 발짝 물러나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주상과 대비의 의견이 그렇다면야 이 늙은이가 딱히 할 말은 없소. 하지만 주상의 가례문제는 이 늙은이만의 생각은 아닐게요."

"소손도 이번 일의 중대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득보다 실이 클 때이옵니다. 때를 보아서 생각을 해도 늦지 않을 일이니 할마마마께서는 소손을 믿고 맞겨주시옵소서."

"알겠소. 주상."

그래서 처음으로 상의된 균의 혼인문제는 균의 완강한 반대와 대비 심씨의 지원에 힘입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왕대비 박씨의 말대로 균의 혼인문제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왕대비 박씨를 제외하고도 많았다. 이미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하여 조정의 노대신들과 도승지 정인기도 한번씩은 균의 혼인에 대해서 말을 했던 것이다. 일단은 균이 여러 가지 핑계로 거부를 했지만 이제 혼인할 나이가 된 균이 언제까지 독신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그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하. 신 선전관 박수익이옵니다."

"어서 들어오라."

균의 혼사문제가 논의된지 며칠 후 비금도에 있던 선전관 박수익이 한성부로 올라와서 균을 만났다. 무려 6년 만에 한성부의 땅을 밟아본 박수익은 무척 기뻤던지 균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무척이나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산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무렵만 해도 자신이 다시 관복을 입을지는 몰랐는데 이제는 국왕의 심복이 되었으니 전화위복(안 좋은 일이 좋은 일로 바뀜)이었다. 오랜만에 박수익을 보는 균의 얼굴도 밝은 편이라 방안의 분위기가 좋았다.

"경의 얼굴을 보니 그간 잘 지낸 듯하여 다른 안부는 묻지 않겠다. 그래 다시 선전관으로 복직을 한 느낌은 어떠한가?"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전하."

"하하하. 그럼 그때 과인이 한 약속이 거짓인줄 알았던가?"

"망극하옵니다. 전하."

6년 전 박수익을 사로잡은 균은 박수익을 회유하면서 10년 이내에 다시 관직에 나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박수익은 고작 종친신분인 균이 자신을 회유하기 위한 말로 생각하고 관직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육년 만에 균의 말대로 선전관으로 복직이 되고 또한 균의 배려로 품계까지 오르니 그 소식을 접한 박수익은 감격하여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만에 균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균은 박수익의 얼굴을 보자고 비금도에서 천리나 떨어진 한성부로 불러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균은 얼굴 표정을 싹 바꾸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낮은 목소리로 박수익에게 말했다. 그것은 바로 국왕 직속의 비밀정보조직의 창설이었다. 이제 군대와 재력을 갖추었으니 정보를 바탕으로 효과적인 운용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켜 나가야 할 때이기에 독자적인 정보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인이 경을 이렇게 부른 이유는 바로 과인 직속의 탐보망을 만들기 위함이다. 경은 이미 비금도에서 탐보망을 운영한 경험이 있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과인은 생각하노라. 그러니 경은 선전관직을 유지하면서 비밀리에 조선팔도 방방곡곡에 탐보망을 구축하라."

"신 선전관 박수익. 삼가 주상전하의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인원이나 자금이 부족하다면 언제든 과인에게 청하라. 과인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대의 직책은 계속 선전관지만 과인이 손을 쓸 것이니 과인에게 보고할 때를 제외하고는 선전관직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예. 전하. 소신이 최선을 다하여 전하의 어명을 따르겠나이다. 하오나 전하. 신이 궁금한 사항이 하나 있어 감히 주상전하의 고견(뛰어난 의견)을 듣고자 하옵니다."

"말하라."

"소신이 알기로는 이미 내금위와 포도청에서 어느정도 탐보망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탐보망을 갖추는 데 들어가는 돈은 상당하니 차라리 두 곳의 탐보망을 강화시키는 것은 더 효과적이라고 사료되옵니다."

박수익의 의문은 당연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정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내금위등 금군에서는 반역에 대비한 정보를 수집했고 포도청에서도 관할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조선의 행정조직역시 정보수집의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정보조직이 독립되지 못하여 그 기능에 한계가 있었고 또한 교통이 불편하여 정보수집에 차질이 많았다. 그래서 국왕이 한성부로 돌아온 지방관들에게 일일이 그 곳의 사정을 물어보는 것이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균은 정보조직이 필요했다.

"먼저 포도청의 탐보망은 상당하지만 그 범위가 고작 경기도일원이 한계이며 정보의 질이 낮아서 죄인을 잡는데 유용할 뿐이다. 또한 각지의 지방관들이 보고해오는 정보들은 누락이 심하여 과인이 지방의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없으며 이러한 소식들은 비변사(고위관료들의 국무회의)를 거쳐서 과인에게 전달되기에 과인은 궁밖에 일을 자세히 아는데 한계가 있어서 바른 정치를 펴고자 하는데 무리가 많다.

내금위의 정보는 과인에게 바로 전달이 되고 그 정보의 질도 높지만 전문성이 떨어져서 잘못된 정보가 많고 너무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서 세세한 정보를 다루기에 그 한계가 있다. 과인은 이제 그동안 생각해온 일들을 하고자하는데 만일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면 두 눈을 감고 낭떠러지를 걷는 사람과 같이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경은 과인의 밝은 눈이 되어 조선팔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아내도록 하라."

"예. 전하. 성심을 다하여 전하의 밝은 눈이 되어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사옵니다."

"조선의 수많은 신하들 중에서 과인이 이런 중차대한 일을 믿고 맡길만한 이는 오직 경 하나밖에 없음을 명심하라. 결코 과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예. 전하."

박수익에게 재차 다짐을 받은 균은 간단한 주안상을 들이게 하여 친히 박수익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왕이 신하에게 술을 따라주는 행동은 굉장한 신뢰의 표시이고 신하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균은 술을 못했기에 술대신 감주(식혜)를 마시는 바람에 박수익은 고급술 한 병을 혼자서 다 마시고는 취기가 오르는 것을 참느라고 고생을 했다. 그런 박수익을 보면서 균은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비금도의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물어보고 그때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균이 비밀정보조직을 박수익에게 만들라고 어명을 내린지 며칠 후 명에서 반가운 사람이 돌아왔다. 전 도승지이며 정초사(정초에 명에 보내는 사신) 이양원이 종계개정이 이루어진 대명회전(명나라의 법전)을 가지고 귀국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상을 이자춘이 아닌 이인임으로 잘못 쓴 대명회전을 고쳐달라고 명에 요청한 사건인 종계개정은 조선왕조의 숙원사업중에 하나였고 역대 조선왕들은 이를 위해서 사신을 파견하여 여러 번 명나라 황제의 허락은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조 20년인 서기 1587년의 일이다.

하지만 균은 장거정에게 부탁한 일이 잘 되었는지 21년이나 빠르게 종계개정을 성공시켜서 큰 이익을 보았다. 정통성이 부족한 균이 왕실의 위엄을 충분히 세운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래의 선조역시 매번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종계개정을 요구했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업적으로써 대신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균은 명 황제가 하사한 대명회전을 가지고 오는 정초사 이양원을 도성 밖까지 나가서 맞아주었다. 연극이기는 해도 원래의 선조가 하던 대로 눈물까지 흘리면서 대명회전을 받고 바로 종묘로 가서 역대 임금들에게 제를 지내면서 왕실의 숙원사업을 마무리 지었다고 고했다. 그날 경복궁에 돌아온 균은 명나라 황제에게 사은사를 파견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도록 하고 전국에 다시 한번 사면령을 내렸다.

왕실의 숙원사업이던 종계개정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당시로써는 큰 업적을 세운 균은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명종의 왕자가 태어나지 않는 데다가 무리없이 명으로부터 국왕승인도 받은 상태였기에 이제 정통성면에서 균에게 대적할 만한 종친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 이미 재위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 어느정도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균은 점차 자신의 뜻을 국정에 반영시키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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