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28)

 개혁의 시작 "신이 감히 주상전하께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현재 우리 조선의 세법은 당나라의 조용조세법에 기반을 두고 전세, 요역, 공납, 군포 이렇게 네 가지의 세금부담을 백성들이 지고 있사옵니다. 이 모두가 연이은 흉년으로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지만 특히 공납의 부담이 가장 심하옵니다.

본시 공납이란 그 지역의 특산물을 조정이 지정하는 양만큼 바치는 것인데 요즘 들어서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물건도 바치게 하여 백성들은 많은 돈을 소모해 물건을 사서 조정에 직접 가져다 바치기에 그 부담이 큽니다. 또한 공납의 종류와 수량은 둘째로 치더라고 그 부과기준이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성인남자의 수에 비례하여 가난한 자들의 고통은 더욱 큽니다.

하오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옵니다. 이러한 공납에 모리배들이 개입하여 백성들을 대신하여 조정에 물건을 바치고 백성들에게 10배, 100배로 갚게 하니 이를 방납이라 하옵고 이 방납에 의한 백성들의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사옵니다. 또한 이 모리배들은 심지어 백성들이 스스로 공물을 바치는 것도 방해하고 방납을 자행하여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고 있으니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노릇이옵니다.

이 모리배들로 인해 백성들이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유민이 되거나 노비로 전락하고 그만큼 양민의 수가 감소하여 조정의 세금수입도 감소하는 폐단이 있으면 또한 남아있는 자들이 사라진 자들의 세금까지 모두 부담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또 유민이나 노비가 되니 이러다가는 조선에 세금을 내는 백성들은 한명도 남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이이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상당한 준비를 했는지 균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하도 자세히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균은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대신들도 지겨운지 머리왕복운동을 하는 이가 하나둘씩 늘어났지만 다행히도 그런 것을 감시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한참 후에도 이이의 열변이 끝날 생각을 하지 않자 균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강제로 말을 멈추게 하고 이이의 말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그만! 그러니까 경의 주장은 공납제를 악용하여 이익을 보는 자들을 제거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화시키고 조정의 세금수입도 늘리자는 말이 아닌가?"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그 대책을 말해보라."

"....."

역시나 균은 원래 현대인답게 조선시대 사람들에 비해서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거기다 조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백과사전과 상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균이 그렇게 자세하고 끝도 없는 설명을 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인 이이는 대궐 안에 사는 어린 왕이 대궐 밖의 진정한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자세하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 충심을 몰라주는 균에게 조금 섭섭했다. 그러나 신하가 감히 임금에게 그런 마음을 내보일 수는 없는 법이라 자신의 생각을 계속 말했다.

"신이 듣기로 황해도 해주와 송화 등에서는 토지 1결당 1두의 곡식을 거두어 관아에서 그 것으로 조정에 바칠 공물을 사서 준비하여 방납의 폐단을 제거한 덕분에 흉년인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형편이 좋고 전세수입 또한 적지 않사옵니다. 그리하여 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다른 곳에도 해주와 마찬가지로 공납을 쌀로 거두고 관아에서 그 쌀로 특산물을 사서 조정에 바치는 방법을 시행하여 방납의 폐단을 막아 조정의 세수를 증대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

아까 전에 균이 '그만'이라고 소리칠 때 졸음에서 깨어나서 균과 이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신하들은 모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런 공납의 폐단과 그에 대한 대책을 조정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머리를 쓰는 자라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뒷감당이 어려워 의견을 내지 않았을 뿐인데 의기가 앞서는 젊은 선비인 이이는 그런 점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균에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경의 말은 극히 지당한 것이다. 현재의 공납제도는 백성이 내는 부담의 상당수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나라에 들어오는 세금은 적고 백성의 부담은 크다. 따라서 경의 말대로 공납을 쌀로 받아서 그것으로 조정이 필요한 물건을 사들인다면 백성들의 부담은 덜고 조정의 세수는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과인이 알기로 중종대왕때 조광조도 그러한 의견을 주장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경은 들어보았는가?"

이준경, 이명, 홍섬, 홍담등 여러 신하들은 이이의 상세한 이야기에 화를 낸 균의 태도로 보아서 균이 이이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는데 오히려 균의 입에서 이이의 의견이 좋은 의견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모두들 놀라서 균을 보았다. 하지만 균은 그에 아랑곳없이 이이의 의견이 좋은 의견이라고 하더니 난데없이 조광조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조선시대에 가장 먼저 공물을 쌀로 받자고 했던 인물을 바로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이이만큼 상세한 대책을 세운 인물을 아니지만 방납의 폐단을 알고 이에 대처하려한 첫 번째 인물이다. 하지만 균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갑자기 조광조의 이야기를 꺼낸 균에게 대부분의 신하들은 의아하게 여겼지만 조식만은 균의 뜻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 전하. 신도 들어본 바가 있사옵니다."

"그런데 왜 그때 그러한 좋은 방법이 채택되지 못했는지도 아는가?"

".....망극하오나 전하. 신이 아는 바로는 당시의 남곤등의 간신배들이 중종대왕의 혜안을 가리고 감언이설로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제대로 고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아니다."

"...."

이이의 말에 균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고는 고개를 돌려서 신하들을 한번 둘러본 후에 균의 속마음을 아는 듯한 표정을 지은 조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같이 살짝 웃어준 다음에 이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이는 고개를 더욱 수그리며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경이 계획한 일이 실행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이에 반발할 자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지방향리들이옵니다."

조선왕조 지방행정체계의 최고의 문제꺼리는 바로 지방행정의 실무자들인 향리들이었다. 원래 후삼국시절부터 호족으로 지방을 지배해온 향리들은 고려시대때만 해도 중앙의 권력에 대항하는 강대한 세력들이었다. 하지만 고려후기에 이 향리들 중에서 유력한 자들은 신진사대부로 성장하여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나머지 힘이 없는 자들만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중앙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고 신분도 중인으로 격하되었다.

조선왕조는 지방행정경험이 풍부한 향리들에게 지방행정을 맡기었는데 이는 향리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많은 수의 지방관을 파견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향리들에게 녹봉이 지급되지 않은 것이다. 원래의 향리들은 상당한 재산을 보유한 경우가 많았지만 대를 이어 향리직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후대로 갈수록 향리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그 결과 향리들의 부정부패가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조선조정의 향리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 원래부터 상당한 지주층인 사대부들은 권력과 부를 잃은 향리들의 생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단지 나랏일을 한다는 명예만으로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오판을 한다. 이는 철저히 자신들만의 관점에서만 생각한 것이며 또한 향리들의 녹봉을 아낀 만큼 재정이익이 발생한다는 짧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향리의 대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당장 눈앞의 흑자재정이 그들의 말을 헛소리로 만들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 향리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흉년으로 국가재정이 나빠지면서 사대부들도 향리들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지만 이미 손을 쓰기 어려운 실적이었다. 국가재정이 부실하여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싶어도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왕조는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등 처벌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썼지만 그 근본원인이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었다.

백과사전과 상실을 통하여 조선의 당시 수취체제의 문제점을 알고 있던 균은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주관적인 생각을 하는 양반 사대부 신하들을 압도해 나갔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균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과인이 아는 바로는 방납을 자행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지방의 향리들과 상인이다. 상인들이야 강력한 처벌을 단행하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녹봉을 받지 못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비리를 저지르는 지방향리들이다. 그것은 호조좌랑을 말고도 여러 대신들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잘 아는 사실이라고 과인은 생각한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지금 당장 과인이 어명을 내려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방납의 폐단은 사라지고 조정의 세수는 늘어나겠지. 하지만 지방향리들은 또 다른 돈줄을 찾아서 이동한다. 그러다가 문제가 커져서 또 이런 재정문제가 일어나고 그에 대한 또 다른 대책을 세우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호조좌랑의 의견은 지당하나 과인이 듣고 싶은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다."

"...."

"조광조의 의견도 그러했다. 공물을 쌀로 거두어 백성들을 구휼하자. 무척 듣기 좋은 소리기는 하지만 그대로 실행하다가는 몇 년 내로 또다시 재발을 하는 문제라는 것이 조광조는 몰랐다. 그래서 결국 조광조의 의견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경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문제의 근원인 지방향리들의 부패를 막을 방도를 강구하라."

이 말을 마친 균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스로 열고 나갔다. 신하들은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일찍이 영특한 임금인 것은 알았지만 저 정도로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밝을 줄은 몰랐다. 특히 균이 대궐 밖의 사정을 잘 모르고 철없는 어린 임금정도로 생각했던 이이는 더욱 충격이 컸다. 아무리 나라의 주인인 국왕이라지만 저 정도의 나이에 그 정도의 판단력은 결코 보통일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주인이 없는 균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는 지방향리들의 뇌물을 받고 방납을 방조하던 이들도 있었고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충신도 있었고 충신도 간신도 아닌 대다수의 평범한 신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임금의 능력에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다.

'과연 한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구나. 방계의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태조대왕의 피를 그대로 이은 듯하니 선대왕들과는 달리 조용하게 왕위를 지키다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폼 나게 스스로 문을 열고 방을 나선 균은 한참 후에야 자기가 박차고 나온 곳이 자신의 처소인 강녕전임을 깨닫고 신하들이 빨리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신하들이 자신들끼리 회의라도 열었는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바람에 별수 없이 아기나 데리고 놀려고 대비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균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느렸다. 자신이 아는 바로는 지방향리들에게 생계에 필요한 녹봉을 제대로 지급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감찰을 강화하는 강온양면책을 펴서 그들에게 녹봉을 받고 청렴하게 일하는 것이 비리를 저지르다 걸려서 가문이 박살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문제는 지방향리들에게 들어가는 엄청난 돈이다. 현재 국고가 메마른 조선의 현실에 그만한 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그중에서 가장 편한 방법은 외수사의 자금력을 동원하는 것인데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외수사가 생긴지 1년 만에 수십만 냥을 동원한다면 당연히 외수사를 국유화해서 재정난을 해결하자는 신하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외수사의 자금력을 다 동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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