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28)

 개혁의 시작 "그래 상선. 얼마나 나왔는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려면 최소한 일년에 20만 섬이 필요 하옵고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정도라면 매년 30만 섬 정도의 재정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사옵니다."

"휴~.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역대 제왕들께서도 엄두를 못 내신 것이고..... 알았다. 상선은 그만 나가보라."

"예. 전하."

균의 측근인 대전내관이자 상선(종 2품)으로 내시부를 총괄하는 정성우에게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할 경우 필요 예산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균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시대에 녹봉이란 형식적인 것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나라에서는 관리들에게 녹봉은 물론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녹봉은 국가의 녹을 먹는다는 상징으로 작은 양만 지급되고 실제로는 토지를 하사하여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관료들에게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 국유지가 줄어들어 나라는 가난해지고 신하들은 사유지가 늘어 부유해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초기 모든 전현직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던 과전법은 폐지되고 세조때 현직관리들에게만 지급되는 직전법이 도입되었으나 이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토지가 줄어 경제력이 감소한 양반들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성종은 관수관급제를 도입하여 양반들이 소작농에게 횡포를 부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양반들은 자신의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개인토지의 확보에 더욱 집착했다.

조선농토의 상당부분이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들에게 넘어가면서 국가재정이 악화되자 명종은 관리들에게 토지지급을 금하고 오직 녹봉만 받게 하였는데 이에 부유한 양반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소유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반면에 재산이 없던 양반들은 제 식구들 먹이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녹봉만 받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어서 당당한 양반인 중앙관료들도 이른바 생계형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는 실정이었고 이번에 문제가 된 지방향리들은 그나마 녹봉도 받지 못해서 그 문제가 심각하였다.

그래서 균은 지방향리에 대한 녹봉지급과 녹봉의 현실화로 관리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대신 강력한 감찰활동을 감행하고 처벌을 강화하여 부정부패를 방지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일단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면 재정지출이 쌀 20만석, 돈으로는 약 100만 냥 정도였고 녹봉을 크게 인상하여 현실화시키면 지출이 최소 1.5배로 증가하여 쌀 30만석, 돈으로는 150만 냥의 재정지출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서 당장 균이 동원할 수 있는 돈은 세금 10만석, 외수사자금 50만 냥으로 총 100만 냥에 불과하였다. 물론 내수사의 자금도 있지만 내금위유지비와 대궐생활비가 들어가기에 전부 동원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현재상황으로는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간신히 지급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중앙관리들과 지방향리들의 녹봉을 어느 정도 현실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균은 뇌물로 명나라에 가져다 바친 5만 냥의 자금마저도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돈은 이미 사용된 돈이고 또한 그만한 가치를 할 수 있기에 균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빨리 접었다. 그보다는 먼저 당장 부족한 50만 냥의 돈을 어디서 구하느냐, 또한 올해는 어떻게는 자금을 동원하여 녹봉이 지급된다고 해도 내년에는 그 돈을 어찌 충당할 것인가, 그리고 외수사의 자금은 어떻게 출처를 위장해서 동원하느냐가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을 곰곰이 생각을 하던 균은 먼저 선전관이며 비밀 탐보망의 책임자 박수익을 불러들여 몇 가지를 명했다. 아직은 제대로 된 탐보망이 가동되지 않아서 균이 원하는 정보가 수집되기에 문제가 많았지만 특별히 급한 일도 아니었다. 또한 대전내관이자 상선인 정성우도 균의 밀명을 받고 내수사로 향했고 선전관 도지철은 외수사가 있는 비금도를 향해서 급파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마친 후에야 균은 다른 정무를 처리하며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균이 강녕전에서 일만 하면서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균은 대비 심씨의 부탁을 받아서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기는 무척이나 늦게 이름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이름을 지어줄 주체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종이나 문정왕후가 살아있다면 그들이 짓는 것이 당연하지만 왕대비 박씨는 웃어른으로 대접받지 못 했고 균은 엄밀히 따지면 사촌오빠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대비 심씨가 직접 짓기도 곤란한 면이 있어서 세 사람이 모두 눈치를 보는 바람에 아기의 이름을 못 지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균이 아기를 제 동생이라고 말하고 잘 데리고 놀자 대비 심씨가 제 딸의 위치를 균으로 인정받으려는 생각으로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고 이에 균은 흔쾌히 수락하여 아기의 이름을 이영이라 하고 정아공주라는 칭호도 내려주어 왕실의 정식공주임을 인정해 주었다. 이로써 선대왕의 유복녀로 태어난 아기는 이름과 칭호를 받아 정식으로 왕실가족으로 편입되었다.

균이 제 동생인 정아공주를 데리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고 균이 지시한 일들도 대부분 마무리 되었다. 그래서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균은 다시 한 번 주요 대신들을 강녕전으로 불러서 지난번에 못 다한 재정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동안 과인은 이번에 불거진 조정의 재정문제와 호조좌랑이 제기한 공납제도의 변경문제에 대하여 밤을 세워가면서 심사숙고하였소. 그리하여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였으나 과인의 의견보다 더 좋은 의견이 있을 듯하여 경들을 불렀소. 일단 과인은 호조좌랑의 말대로 공납제를 폐지하고 그 만큼을 쌀로 대신 받아서 조정이 그 쌀로 필요한 물품을 사드리는 수미법(쌀로 받는 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줄 것이오."

균의 말이 떨어지자 강녕전안의 공기는 싸늘해졌다. 물론 강녕전 안의 신료들 중에는 이이처럼 공납제의 변화에 찬성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뒤로 방납을 통하여 재물을 탐하는 모리배 같은 자들도 있었고 또한 대다수의 신료들은 그 일이 현실적으로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어린 왕이 그 반발을 어찌 다 감당을 할지 걱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균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과인의 결정으로 인하여 방납을 자행하던 자들의 반발이 클 것이오. 특히 방납에 생계가 걸려있는 지방향리들의 문제는 그냥 덮고 넘기기에 이미 너무 커진 일이오. 그래서 과인은 앞으로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여 그들이 방납을 하지 않고 묵묵히 맡은 바 일에만 충실하여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여 그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한편 공납을 악용하던 악덕 상인이나 모리배들은 그 지위고하는 물론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전 재산을 몰수하고 옥에 가둘 것이오."

"......"

옛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공납제도의 변화와 지방향리에 대한 녹봉지급은 당시로써는 엄청난 변화였다. 당장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어 그 완성을 본 것이 숙종 때의 일이고 지방향리에 대한 녹봉지급은 조선말기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한 일을 몇 백 년이나 앞서서 시행하겠다고 균이 선언을 하고 있으니 신하들은 몇 백 년을 내려온 제도의 변화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균의 말에 잠시 놀랐던 영의정 이준경은 신료들의 수장답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균에 게 말했다. 그가 들은 균의 말은 듣기에는 좋은 것이었지만 실효성은 없어보였다. 비록 종계개정문제를 자신의 대에서 해결하여 상당한 정통성을 세운 균이지만 방계의 왕족출신인 균이 무리한 일을 추진하다가 무너지면 조선은 더욱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이준경은 균의 생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기로 했다.

"신 영의정 이준경. 주상전하께 감히 한 말씀 올리고자 하옵니다."

"영상. 말씀하시오."

"신이 주상전하의 말을 들고 백성들과 지방의 향리들까지도 아끼시는 주상전하의 너그러우심에 크게 감복을 하였으나 당장은 시행하기 어려운 계책이옵니다. 먼저 고려조 때부터 이어져오던 공납제를 하루아침에 중단하고 수미법을 시행한다면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혼란하여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될 공산이 크고 조정은 조정대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많은 힘을 쏟아서 오히려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에 소홀해질까 두렵사옵니다.

또한 전하께서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고 감찰활동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를 막고 악덕상인이나 모리배들을 처벌하겠다고 하셨으나 당장 조정의 관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할 쌀도 모자라며 지방의 향리들의 수도 적지 않아서 내수사의 자금을 동원한다고 하여도 그 한계가 있사옵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하교하신대로 신들도 재원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그 방법을 강구해 보았으나 부족한 조정의 재원으로는 불가능 하옵고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사료되오나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이 세금을 더 낼 수 있는 여유는 없사옵니다. 하여 당장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것은 불 가하옵고 또한 전하께서 지난번에 하교하신대로 향리들의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공납제를 폐지하여도 미봉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늙은 소신이 전하께 간청을 들이니 부디 전하께오서는 이점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영의정 이준경을 중심으로 대다수의 신하들이 균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미 균은 지난번에 호조좌랑 이이의 주장을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라고 반대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물어보고는 그에 대한 대답이 없자 이에 호통을 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균은 자신이 비판한 이이의 주장을 채용하고 한술 더 떠서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였다.

영의정 이준경 등은 조선시대 사람이기에 현대인인 균에 비해서 생각하는 폭이 작은 편이다. 하지만 수십 년간 조선을 다스려온 노대신들이 오늘날의 재정문제는 무엇 때문이고 그 해결방법은 또 무엇인지 모를 리는 없다. 오히려 실무경력덕분에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준경 등은 균의 주장이 가진 약점을 간파하고 그 약점인 예산확보문제를 물고 늘어져서 균의 생각을 바꾸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균이 의도한 것이다. 일반적인 조선의 왕이라면 아무리 개인 사제인 내수사를 털어도 전국의 수많은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고의 여유가 없다면 조선왕의 자금력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균은 외수사라고 불리는 비금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 비금도는 작년 한 해 동안 균에게 거의 50만 냥에 가까운 재산을 불려주었다. 따라서 산하들의 예상과는 달리 균은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줄 능력이 충분히 되는 왕이었다.

"과인이 저번에도 경들에게 말하였으나 경들의 말대로 과인의 생각은 풍족한 자금이 없이는 실현되기 어렵소. 하여 과인은 그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였소. 자세한 것은 도승지가 전할 것이오."

"먼저 올해 조정의 예산은 쌀로 약 10만 섬 전후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50만 냥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정의 일년 경비는 쌀로 14만 섬, 돈으로 환산하면 70만 냥입니다. 거기에 지방향리들에게 적당한 수준의 녹봉이 지급되면 조정의 경비는 약 20만 섬,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 냥의 지출이 예상되어 전세수입으로는 경비의 절반정도밖에 부담할 수 없습니다."

"배...백만 냥."

"이밖에 재원으로는 내수사와 외수사가 있는데 외수사는 아직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고 규모도 작아서 자금을 끌어 쓰기에 문제가 있고 내수사의 자금은 아무리 아껴서 돌린다고 하여도 쌀 1만석이 한계라서 쌀 9만석정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보충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정인기는 균이 알려준 대로 열심히 심각한 표정을 연기하면서 무게를 잡아나갔다. 신하들은 뻔한 자금사정에 어디서 그 많은 돈을 마련할지 관심이 있는 듯 정인기의 입을 주시했다.

"무슨 수로 그 많은 돈을 마련한다는 말인가?"

"내수사입니다."

"아니 자네가 내수사에서는 쌀 1만석정도 밖에 동원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내수사는 내수사전을 소작을 주어 매년 수만 석의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는 큰 도움은 못되지요. 하지만 최근에 주상전하께서 내수사를 자세히 조사하신 결과 선대왕들께서 남겨둔 자금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니 내수사의 사정이야 선대왕 때부터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여유가 없었다. 선대왕께서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내수사의 재산을 조사하는데 최선을 다하셨지만 결국에는 특별한 재원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낫거늘...."

정인기가 거론하는 내수사 비밀자금설에 대다수의 신료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아직 균이 즉위한지 1년 남짓하여 신하들의 대부분이 명종 때도 이런 대책회의를 여러 번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내수사에는 내수사전밖에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난 뒤였다. 하지만 정인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균이 입을 열어 신하들에게 말한 것이다.

"경들은 태종대왕때 있었던 조사의의 난을 기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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