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시작 균의 말에 신료들은 술렁거렸다. 임금의 입에서 반역사건이 언급이 되는 일은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대체로 반역사건이 언급된다는 것은 일부관료들의 흠집을 문제 삼아서 숙청이 단행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균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조사의의 난 이후에 왕실의 재산이 내수사로 새롭게 재편되는 와중에 태종대왕께오서 아버님이신 태조대왕을 위해 내수사 재산과는 별도로 남겨두었던 왕실의 일부 재산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소."
균의 말에 신하들의 입이 딱하고 벌여졌다. 조사의의 난은 태종때 있었던 조선왕조 사상 최대의 반란사건으로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고 무려 4~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정의 1차 토벌군 수만 명이 참패를 한 적이 있다. 이에 태종은 남방주둔군 10만을 동원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는데 당시 조선군이 25만 전후였다는 것을 가정하면 전군의 70%가 참가한 대규모 반란이었다. 문제는 안변부사 조사의의 배후에 있다. 조사의의 난은 무려 5만에 가까운 반란군이 동원된 만큼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조사의는 그만한 기반이 없었고 반란군의 근거지 가까이에는 조선 최고의 부자인 태조 이성계가 있었다. 원래 함경도 일대의 강력한 호족이던 이성계는 그 영향력을 인정한 고려조정에 의해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그 뒤에도 이성계는 장군으로써 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고려왕실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함경도 토지의 약 30%를 차지했다던 이성계의 막대한 부는 5만의 반란군을 지원하기에 충분했고 다른 정황을 보아도 이성계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태조는 태종을 용서하고 태종은 태조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아서 막대한 왕실재산을 만들고 그것이 지금의 내수사의 원천이 되었지만 여러 야사가 말하듯 태조는 태종을 완벽히 용서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태조는 다시 난을 일으키기 위하여 많은 돈을 은닉했다는 소문이 전국을 떠돌았는데 균은 이점에 착안을 하여 외수사의 자금을 태조의 군자금으로 위장시키기로 한 것이다. 물론 국왕인 균이 스스로 왕실의 치부를 들어내기에는 곤란하기에 태종이 태조를 위해서 남겨둔 자금이라는 거짓말을 덧붙였다.
"자세한 것은 왕실의 중요한 일이라서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수사의 가용자금은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이오. 아마도 과인이 종계개정을 이루어 왕실의 숙원을 해결하자 태조대왕과 태종대왕께서 이를 크게 기뻐하시고 재원이 필요한 과인에게 그러한 선물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오."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말은 그렇게 하고 표정도 진지하게 짓고 있지만 균은 자기 입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했다. 입으로는 선대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축하한다고 하는 신료들도 속으로는 '이번 왕은 정말 얼굴가죽 두껍다.' 라고 말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 비참해지는 균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잡은 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종계개정을 이룬 공로와 태조, 태종의 권위를 빌린 좋은 호기를 부끄럽다고 놓칠 균이 아니다.
"정확한 액수는 말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지방향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는 재정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소. 그런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과인이 호조좌랑의 의견을 채택한 것이오. 마침 과인이 재정문제로 고민을 하던 차에 열성조(앞의 조선 국왕들)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니 수미법의 시행과 지방향리들의 녹봉지급은 더 이상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오. 경들은 과인과 열성조의 뜻을 받들어 이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을 만들어 과인에게 빠른 시일 내로 보고하시오."
"....."
역시나 잔머리의 대가는 치밀했다. 균은 먼저 이이의 수미법을 반박하면서 문제해결의 방법을 지방향리의 녹봉지급과 이에 필요한 예산 확보로 몰아갔다. 이것은 무척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신하들의 관심도 같이 그 쪽으로 쏠렸다. 이렇게 신하들의 관심을 유도한 균은 예산확보대책은 내놓지 않은 채 다시 입장을 바꾸어 이이의 수미법과 녹봉지급문제에 찬성을 하였고 이에 신하들은 지난번에 균이 문제라고 지적한 예산확보문제를 핑계 삼아서 균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 모두가 균의 노림수였다. 균은 반대의견의 근거를 예산확보 문제 쪽으로 유도해 버린 후 선대의 유산을 찾아서 재정이 충분하다는 말로 예산문제를 해결하여 반대의견의 근거자체를 소멸시켜버렸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선대의 유산이 지금 나타난 것은 종계개정을 이루어 조선왕실의 위엄을 세워준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선대왕들의 뜻이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정책은 선대왕들도 바라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해 반론의 여지를 제거해 버렸다.
균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이 생각하기로 아무리 국왕이라도 최소한 50만 냥의 자금을 동원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점을 믿고 균의 의견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전설에나 나올 법한 태조 이성계의 숨겨진 군자금이 발견됐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실여부를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이 나라의 국왕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균이 한 말이 믿기지 않아서 고민 중인 신하들에게 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경들은 과인의 어명이 들리지 않는가? 수미법과 향리들의 녹봉지급은 당장 올해 가을부터 전국팔도에 실행을 할 계획이니 경들은 즉시 세부시행규칙을 세우고 삼 일내로 과인에게 보고하라."
"예. 전하."
균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강녕전을 떠나서 궐내각사에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한 신하들은 영의정 이준경을 중심으로 자신들끼리 대책회의를 열고 수미법의 시생과 지방향리의 녹봉지급문제, 그리고 균이 언급한 이성계의 유산의 존재유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미 균이 어명으로 수미법의 시행과 향리들의 녹봉지급을 지시하였기 때문에 신하들이 따로 결정할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균이 말한 이성계의 유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상대감, 주상전하께서 하신 태조대왕의 유산이 실제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까? 만일 그랬다면 선대왕마마께서 먼저 찾아내서 사용을 하셨을 텐데...."
"호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상전하께서 말씀을 하신일이네. 전하의 말씀을 신하된 자가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네."
"호판대감, 영상대감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주상전하께서 신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소인도 믿기지는 않지만 일단 그 정도의 재원을 마련하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또한 신하된 자로써 주상전하와 왕실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를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전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나 신료들의 전반적인 의견은 균이 말한 이성계의 유산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비금도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각종 재물들이 조운선에 실려서 한성부로 향해오고 있었고 그 액수는 돈으로 100만 냥에 달했다. 비금도 아니 외수사가 가진 여유자금의 태반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신료들은 한참동안 이성계의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영의정 이준경의 주도로 새로운 제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조참의의 말이 옳소. 그보다는 새롭게 시행되는 수미법과 지방향리들의 녹봉지급문제가 더 시급하오. 일단 전하께서 의욕적으로 추진을 하시려는 모습을 보이시니 우리들 조정대신들이 성심을 다하여 이를 보필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영상대감. 반발하는 자들이 만만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주상전하의 결정이 성급하신 것이 아닐지..."
"어허 이사람. 그래서 주상전하께서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해서 살 길을 열어주신다고 하지 않았는가? 향리들을 제외하면 다 악덕상인이나 모리배들이네. 그런 자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주상전하의 강한 의지가 계시는데 그런 자들의 반발을 걱정하는가? 일단 주상전하의 어명에 따라서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준비를 하고 그 뒤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하께 고하여 대책을 세우면 될 일이야. 그럼 모두들 의견들을 내어보게나."
이렇게 영의정 이준경의 주도하에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궐내각사에 모두 모여서 수미법의 시행과 향리들의 녹봉지급에 대하여 삼일동안 논의를 계속하였다. 그래서 삼일 후에 신료들은 다시 강녕전으로 모여서 균에게 보고하였다.
"신 영의정 이준경이 아뢰옵니다. 전하께서 내리신 어명을 받들어 상세한 시행규칙은 이미 완성을 보았사옵니다. 전하께서 최종승인만 해주신다면 당장 올해 가을부터 전하께서 읽고 계신 계본(임금에게 제출되는 문서)대로 전국팔도에 수미법과 녹봉지급이 이루어지옵니다."
"그래 영상을 비롯하여 여러 대소신료들의 노고가 컸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일단 최종결정은 내일 아침 조회때 내리도록 하고 경들의 의견에 대한 과인의 생각을 말해겠소. 일단 지방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문제는 과인이 보기에 조금 그 액수가 작기는 하지만 나무랄 곳이 없을 정도로 잘 되었소. 그런데 수미법에 대해서는 조금 고쳤으면 하오."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일단 여기에는 매년 토지 1결당 12두의 쌀을 걷어 그 것으로 각 고을수령이 토산물을 사서 조정에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소. 하지만 몇 가지 품목에 대해서는 공납제를 유지하겠다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오? 이렇게 시행을 한다면 수미법을 시행하는 뜻에 위배가 되는 일이 아니겠소? 매년 토지 1결당 쌀 15두 즉 쌀 한 섬을 걷어 들이는 대신 모든 공납을 폐지하시오."
"예. 전하."
균이 꼬투리를 잡은 것은 일부 공납이 유지되는 품목들이었다. 실제로 대동법의 시행 후에도 별공, 진상의 명목으로 공납제는 살아남아서 농민들의 부담이 되었다. 균은 이점을 인지하고 그것을 바꾸라고 지적하였다. 이로써 원래라면 조선말기까지 명맥을 지속하던 공납제는 약 삼백 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납제를 소멸시킨 균은 일단 그 정도에서 세제를 유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음 같아서는 명나라처럼 세금을 하나로 통일시켜 은으로만 받는 일조편법을 시행하고 싶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균은 공납제만 완전히 폐지한 채 나머지는 원안대로 그대로 승인을 하고 다음날 상참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시행을 명령했다. 그리고 며칠후 비금도에서 올라온 막대한 자금의 절반은 내수사로 전해지고 나머지는 바로 호조로 전해졌다. 호조판서 홍담이 균이 장담한 막대한 양의 이성계의 유산보고 경악을 금치못하고 영의정 이준경에게 뛰어가서 보고 했다는 소문만 남긴채 50만냥의 거금은 호조의 창고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성계의 유산에 대한 소문은 대궐을 넘어서 한성부일대를 진동시켰다.
균의 즉위 1년째인 서기 1566년 가을부터 시행된 공납제의 폐지와 수미법의 시행 그리고 지방향리에 대한 녹봉지급에 조선의 희비가 교차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공납제의 폐지를 무척이나 반겼다. 거기다 그 부담이 토지소유자에게 넘어가자 가난한 소작농들의 기쁨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방납으로 인하여 이익을 취하고 있던 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자신들과 손이 닫는 조정대신들에게 뇌물을 주고 공납제의 원상복귀를 요청했다. 이런 조정대신들이 자주 균에게 알현을 청하고 민심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공납제의 원상복귀를 주장하였지만 균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오히려 균은 그 대신들의 명단을 박수익에게 넘겨서 부정축재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라는 명을 내려서 후일을 대비했다.
건국이래 최초로 지방향리들에게 제대로 된 녹봉이 지급되었지만 지방향리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어느 쪽은 부정부패를 안 저지르고도 먹고 살 수 있고 또한 국가의 녹을 받는 관리로 인정받았다고 좋아한 반면 다른 쪽은 공납제의 폐지로 턱없이 줄어든 수입에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불만은 곧 사그러들었다. 균이 삼사의 강직한 대간과 청렴한 관리들을 이용하여 암행어사를 대규모로 제조해서 전국에 내려보낸 것이다.
원래 암행어사는 조선초기부터 있었지만 그 이름이 확정되고 또 활약을 보이는 것은 조선의 경제사정이 나빠지는 중종때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암행어사에 대한 비판이 많아서 그 권한이 약하여 실효성은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균은 달랐다. 각도에 2,3명씩 총 20명의 암행어사를 동시에 파견하는 초강수를 쓴 것이다. 원래는 30명을 채울려고 했는데 그러다가는 삼사의 업무가 마비된다는 만류가 있어서 많이 줄여잡은 것이었다. 소수의 암행어사라면 별 효과가 없었겠지만 20명의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은 탐관오리들에게 굉장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왕인 균의 강력한 개혁의지는 그런 탐관오리와 악덕상인,모리배등 나라와 백성들을 좀 먹는 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아무리 다른 신하들이 수미법에 반대를 해도 이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왕은 없었다. 조선중기와 후기에 그렇게 많은 탐관오리들이 날뛴 것은 왕들의 개혁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자기가 파견한 암행어사보다 탐관오리의 편을 들어주는 왕이 있었기에 조선후기는 각종비리로 얼룩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