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228)

 개혁의 시작 그렇게 균이 여러 가지 일로 한창 바쁠 무렵 마포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집에서는 반가운 손님이 하나 찾아들었다. 그 손님은 바로 사헌부 장령인 남명 조식으로 두 사람은 16살의 나이차이가 낫지만 상당히 친한 사이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이지함이 전국일주를 할 때 조식을 방문한 것이 시작이다. 그 뒤로 조식도 마포의 이지함을 가끔 방문하고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두 사람이 16살의 나이차이와 서울과 산청이라는 먼 거리를 극복하고 교류를 가졌던 이유는 두 사람의 성격이나 사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 다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들이면서도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지나치게 문치에 빠지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이들은 두 사람을 기인이나 괴짜로 생각을 하였지만 그만큼 흔치 않은 동지를 만난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토정.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하하하, 아니 주상전하의 신임을 받으신다는 사헌부 장령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어인 행차십니까?"

 "허허허. 다 자네가 나를 주상전하께 소개하는 바람에 이렇게 무거운 짐을 떠맡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자네는 유유자적하여 도원명처럼 생활을 하니 이 늙은이가 시샘이 나서 한 번 와 봤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히 요기나 하시지요."

"허허허, 그러면 오랜만에 찾아온 이 늙은이를 굶길 생각이었나?"

두 사람은 반가운 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함은 곧 점심을 차려냈는데 균과 똑같은 메밀국수였다. 조식은 악명 높은 공포의 점심시간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듣고 있었던 지라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지함에게 말했다.

"주상전하께 메밀국수를 권한 것이 자네였나? 허허허. 요즘 신료들이 메밀국수 이야기만 나와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는데 그 원흉이 자네였구만. 허허허."

"아닙니다. 그 것은 주상전하께서 즐기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주상전하는 소식을 하시는 데다가 또 장난끼가 있으시어 신료들을 괴롭히시려고 그리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나중에는 별식이라도 내려주시니 신료들도 악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즐기는 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허허. 도승지야 주상전하의 외숙이니 그런 것이지. 나도 점심시간은 피해서 주상전하를 알현을 한다네. 그것은 그렇고 자네는 언제부터 출사를 할 것인가? 요즘 제자들이 암행어사로 파견되는 바람에 사헌부에서 마음 편히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네."

이미 균은 이지함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지함은 병을 핑계 삼아서 이를 거부했는데 그래도 균은 사흘을 멀다하고 선전관과 내관들을 파견하여 출사를 요청했다. 조식의 경우야 이미 곽재우라는 약점이 있는지라 출사가 쉽게 이루어졌지만 이지함은 약점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실제 정체를 아는 인물이니 균이 잔꾀를 부리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간파당해서 역으로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균은 이지함에게 사람을 보내서 출사를 독촉하는 수밖에는 없었고 균의 구애행동(?)은 그의 성격답게 대단하여 이미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방문을 받은 이지함은 조식의 말을 듣고 설래설래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유유자적한 것을 좋아하는 이지함의 성격을 고려한 균의 찰거머리 작전에 이지함도 지쳐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아마도 곧 출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그냥 이렇게 사는 것보다도 오히려 출사하는 것이 한적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저도 생각을 하던 중입니다. 조금 시일이 지났다가는 전하께서 친히 나오실지도 모릅니다...."

"???"

균의 지나치다 못해 스토커에 준할 정도로 끈질긴 구애를 모르는 조식은 가뜩이나 조정에서도 균의 이야기가 나오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신료들을 많이 보아왔는데 이지함마저도 균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절머리를 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한 조식의 표정은 보지 않은 채 이지함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휴~! 북창. 자네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이보게 토정.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면이 퍼지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두 사람은 맛있게 메밀국수를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원래 점심을 먹지 않고 간단한 참을 먹었는데 점심을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 이후이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일반백성들은 이렇게 면으로 점심을 먹었고 양반들은 밥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흉년으로 먹을 것이 귀해서 일반백성들은 대체로 굶었다. 그래서 이지함과 조식도 이렇게 면으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메밀면은 곧 두 사람의 입으로 사라지고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정. 오랜만에 자네를 만나니 4년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는군. 그때 자네말만 믿다가 엄동설한에 어린제자와 같이 얼어 죽을 뻔했지... 때마침 어린 꼬마이시던 주상전하를 처음 뵙고 나보다도 현실적이신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왕위에 오르시자마자 큰일을 하실 줄은 그때는 몰랐네."

"하긴 조선이 개국한 이래 170여년 만에 최대의 변혁이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주상전하의 능력이면 더 밀어붙여도 되었는데 너무 안정을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걱정입니다."

"허허허. 토정, 자네는 아직 젊구만. 물론 더 밀어붙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지금만이 때는 아니지 않는가? 괜히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시면 사대부들이 경계심을 품을 것이야. 차라리 적당히 밀고 가는 것이 낫지. 또한 한창 혈기가 넘치시는 나이인데도 저렇게 절제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대단한 일이네. 나는 전하의 그러한 면이 마음에 든다네.

하지만 부패한 지방향리들까지 다 포옹하려 하시는 것은 문제라고 보네. 거기다 아직 윤원형이도 살아있지 않은가? 덕분에 부패한 훈구파가 아직 조정의 요직에 남아있으니 이 또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일걸세. 그런 것에서는 과감성을 보이시어야 할 것인데....."

"그러나 지금 지방향리들을 싹쓸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는 당장 지방행정체계가 무너집니다. 그들만큼 행정실무에 밝은 자들도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훈구파는 원래부터 왕권에 빌붙는 것을 좋아하는 세력이지요. 신권을 중시하는 사림파보다는 주상전하의 입맛에 맞는 자들이니 전하께서 감싸는 것 아니시겠습니까?"

상대적으로 젊은 이지함은 개혁의 속도를, 원래 향리를 싫어하던 조식은 부패세력에 대한 균의 태도를 각각 비판했다. 하지만 균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균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그들이 바래오던 현실적인 왕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균의 정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점차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늘도 해가 뜨기 전부터 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늦게까지 상소문을 읽고 자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균은 일단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방 옆에 있는 작은 세숫방으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원래는 궁녀들이 세수시중을 들었지만 균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역대 국왕들이 운동부족으로 병약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균은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미 세자시절부터 해오던 이부자리 정리하기를 스스로 하는 바람에 제조상궁인 양상궁이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씻고 의관을 차려입은 균은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조금 비틀거리며 왕대비전으로 향했다. 왕대비 박씨에게 아침문안을 드린 균은 바로 대비전으로 향해서 대비 심씨에게 아침문안을 드리고 아직도 잠자던 아기의 조막만한 손을 살짝 만지다가 울려버리는 바람에 잠이 싹 달아났다. 직접 아기를 달래던 균은 한 참후에야 강녕전으로 돌아와서 간단히 죽으로 시장기를 달랬다.

그 다음은 원래 아침경연인 조강이다. 하지만 균이 즉위한 이래 조강은 상참 전에 비변사와 의정부에서 보고 되는 사항은 미리 보고받고 균이 이에 대비하는 시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원래는 조강이라 하여도 일부 경전을 공부한 후에 국정을 토론하고 도승지에게 중요한 사안을 보고 받는 시간이다. 하지만 균은 아예 형식적인 그런 부분을 없애버리고 정인기로부터 상세한 국정보고와 함께 박수익으로부터 정보보고까지 받았다.

"음~. 그러니까. 어제 남명이 토정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했지? 혹시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에 대한 탐보는 없나?"

"예.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데로 이지함의 집 근처는 최대한 탐보를 피하는 중이기에 자세한 사정은 모르옵니다."

"잘했다. 어설프게 탐보를 하다가는 더 일이 커진다. 위험한 일은 안하는 것이 좋지. 자금이나 인력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가져가서 사용하라. 무엇보다도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것은 탐보다."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박수익의 정보보고가 끝나고 나자 도승지인 정인기가 상소문으로 보이는 종이를 한 아름 안고 강녕전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옆에 쌓아두고는 균에게 절을 올렸다. 원래는 저만한 보고가 올라온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균은 하고 있던 일 하나가 삼사 대간들의 도마 위에 올랐음을 직감했다. 역시나 정인기의 보고는 균이 짐작했던 바를 벗어나지 않았다.

"전하. 신 도승지 정인기가 아뢰옵니다. 오늘 아침에 수많은 상소문들이 승정원에 접수되었사옵니다. 하나같이 전하께서 내수사전에 명하신 일에 대하여 논하고 있사옵니다. 이것은 홍문관 대제학 이황의 상소이오니 전하께서 읽고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신 홍문관 대제학 이황이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신이 듣기로 전하께오서 왕실의 재산을 동원하여 내수사전에 여러 가지 일을 행하신다고 하옵니다. 이중에 내수사전을 소작하는 자들에게 면제되던 국역(군역과 요역)을 다시 부과하신 것은 만인의 모범이 되는 것으로 역대 왕들께서도 미루시던 것을 전하의 대에 이르러 행하셨으니 전하의 깊으신 덕을 알 수 있는 좋은 일이옵니다. 또한 내수사전에 수리시설을 확충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옵니다.

하오나 내수사가 소작농들에게 이르기를 '논에서는 모내기로 농사를 짓고 밭에서는 땅으로 파서 둔덕을 만든 후 종자를 심으라.'는 명을 내리고 또한 '도조법이라는 새로운 수취제도를 만들어 매년 1결당 5섬의 곡식을 거두겠다.'고 하여 소작농들의 불만이 크다고 들었사옵니다. 모내기는 수확은 많지만 지금처럼 가뭄이 많은 때에는 농사를 망칠 우려가 있고 밭에 둔덕을 만드는 것은 조선에서 처음 보는 방식이라 농민들이 잘 따르지 못하옵니다.

또한 평년에 1결당 5섬의 곡식을 거두시는 것은 농민의 부담을 더는 것이지만 지금처럼 흉년인 경우에는 농민들의 소득전체를 거두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신은 이러한 일들이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과감히 공납을 폐지하신 주상전하의 성지가 아니고 내수사 관헌들의 농간이 아닌가 생각하옵니다. 부디 이렇게 불합리한 일을 철폐하고 내수사의 기강을 바로 세워서 전하의 위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옵니다.'

균이 정인기가 주는 상소문을 읽어보니 내년에 내수사전에 시범적으로 실시예정인 이앙법(모내기)과 견종법, 그리고 도조법에 대한 내수사전 소작농들의 반발에 대한 글이었다. 올해 봄과 여름을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보낸 균은 가을이 되어서야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내수사전에서 추수가 시작되자 균은 내수사에 명하여 내년부터 시범적으로 새로운 농법과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남부의 논에는 이양법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가뭄에 약한 이양법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올해 겨울철에 배수로와 저수지등 수리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었고 북부의 밭에는 수리시설보다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작물에 따른 파종방법을 가르쳐주느라 담당내관들이 죽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신농법은 이미 검증된 것들이라서 농작물생산량의 증가는 확실했고 작물을 규칙적으로 심는다는 특성 때문에 농민들이 제초작업에 투입하는 수고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거기에 균은 당시 주로 행해지던 병작반수제(생산량의 50%를 지주가 가져감.)는 풍흉에 따라서 지주의 소득이 달라지기에 지주의 간섭이 심하여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낮다는 점을 간파하고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북돋아 주기위하여 도조법을 도입하였다. 도조법은 평균생산량의 30%정도를 지주가 가져가고 나머지는 소작농이 가져가는 방법으로 지주가 가져가는 량이 정해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나머지는 다 소작농의 몫이기에 소작농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진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따른 균의 기본구상대로라면 도조법으로 농민들의 소작세부담은 줄고 생산의욕은 높아지며 이앙법과 견종법의 도입으로 생산량의 증가와 필요인력감소의 발생으로 내수사전 소작농들의 수입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다른 일반 소작농과의 차이가 너무 난다. 그래서 국역을 부과하여 조금이라도 그 격차를 줄이자는 것이 균의 생각인데 소작농들은 그것도 모르고 안 좋은 소문을 흘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황의 상소문을 읽어본 균은 정인기에게 말했다.

"이런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당장 상선에게 전하여 내수사전을 소작하는 농민 중에 과인의 정책에 불만이 있는 자는 모두 교체하라고 이르라. 또한 홍문관 대제학에게는 과인이 다 생각을 한 일이라고 전하라."

"예. 전하."

다 자기들의 소득을 올려주겠다는 자신의 배려인데 저런 헛소리가 나오니 균은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하지만 이런 가소로운 저항 따위에 균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수사전은 전국의 수백 곳에 있으며 몇 천결에 달하는 넓은 토지이다. 이곳에서 균이 새로운 농법을 시행하고 새로운 소작세 수취제도를 시행하여 성공을 거둔다면 조선 사람들이 무뇌아가 아닌 이상은 몇 년 내로 균이 시행하는 방법들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주는 소작세가 안정적으로 들어와서 좋고 농민은 자유롭게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으며 조정은 늘어난 농업생산량을 바탕으로 많은 조세를 걷어 들일 수 있다. 결국 다 좋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처럼 농사를 짓는 데 많은 인력이 필요 없어진다는 점이다. 이른바 조선후기에 광작으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든 것처럼 많은 인력이 남게 된다. 그러면 균은 늘어난 조세와 남아도는 인력을 이용해서 공업과 상업을 일으켜 부국강병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국강병의 시초가 되는 일을 저런 저항 때문에 꺾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균은 간단히 무시하고는 오늘 아침 조회에서 논의될 의제를 파악하기 위하여 서안에 놓여진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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