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시작 그날 아침 상참은 상소문이 올라온 대로 균이 내수사전에 명령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반발로 시끄러웠다. 원래 내수사전의 문제는 왕과 신하들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다. 태종이 이성계의 재산을 국고가 아닌 사유재산화한 이래 내수사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자금원의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수사소속의 사람들이 왕의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많아서 심심하면 내수사의 문제를 두고 왕과 신하들이 격돌하고는 했다. 그래서 균이 반발이 적으라고 먼저 내수사전에 시범적으로 새로운 농법과 소작제도를 시도하는 데도 말이 많았다.
"그럼 대제학이 말하는 것은 과인이 왕실의 재산인 내수사전에 행하는 일도 일일이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서 행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신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하께서 새롭게 내수사전에 시행하시는 일들이 내수사전을 소작하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므로 전하께서 이를 굽여 살펴시어 백성들의 고충을 듣고 결정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하~! ....경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과인에게 모두 말해보시오. 과인이 듣고 바꿀 것은 바꾸고 고칠 것은 고칠 것이오."
균은 계속 반대를 하는 홍문관 대제학(정 2품) 이황과 무조건 통촉하여 달라는 말만 내뱉는 일부 신료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결국에는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반대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역시나 반대의견의 대표자인 이황이 앞장서서 그 근거를 제시하였다.
"신 홍문관 대제학 이황이 아뢰옵니다. 먼저 이앙법은 일명 모내기법이라고도 하는 농법으로 소신이 살던 영남지방에서 많이 보아오던 농법이옵니다. 이앙법은 쌀의 생산량이 많아지고 농민들의 노동력이 적게 드는 장점은 있으나 요즘처럼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는 때에는 아예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백성들이 기피하는 방법이옵니다. 그리하여 앞서 조정에서 몇 차례 금지령을 내린 방법인데 이를 농민들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과인이 듣기로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 좋은 농법이나 모를 논에 낼 때 물이 없으면 일년 농사를 망칠 수 있는 단점이 있소. 하지만 과인은 올해 겨울에 농수로와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오. 만일 내수사전에 천수답(물 공급을 비에만 의존하는 농경지)이 있다면 이는 당연히 직파법을 시행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내수사전은 대부분 1등급의 토지로 수리시설만 잘 되어있다면 가뭄의 피해도 크지 않소. 그런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니 가뭄을 핑계 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황은 자신의 판단실수를 인정했다. 이황은 경상도 예안 땅이 고향이라서 상대적으로 모내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반해 균은 서울 태생에 세자가 되기 전에는 주로 섬에서 지내는 바람에 모내기를 접할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이황은 균이 아직 모내기를 한때 가뭄의 무서움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충고를 했으나 예상보다도 균은 모내기에 대해서 잘 알았고 그가 가진 토지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기름진 토지였다. 일반 평민들의 천수답에 비할 토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물러선 이황을 대신해서 나선 이는 이황의 문인이자 홍문관 전한(종 3품)으로 재직 중인 기대승이었다. 두 사람 모두 홍문관에 재직하면서 균의 경연관을 맡은 사람들인데 이들이 나선 이유도 균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서 어린 제자의 오판을 막기 위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알기에 균도 화를 안내고 이렇게 답변을 해주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 이였다면 균의 어투자체가 하오체가 아닐 것이다.
"신 홍문관 전한 기대승이 아뢰옵니다. 전하께서 내수사에게 명하시기를 '앞으로 밭농사는 견종법을 행하라.' 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하오나 어리석은 신이 알기로는 새로운 농법은 밭에 길게 골을 여러 개 만들고 또한 작물에 따라서 심는 방법도 다르다고 들었사옵니다.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 방법이 복잡하여 익히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밭을 다시 개간해야 하는 힘든 일을 해야 하옵니다. 또한 아직 제대로 시도해본 적이 없어 그 수확이 불확실하오니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시행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아직 과인이 어린 시절에 과인은 섬에서 살았소. 경들도 알겠지만 섬은 바닷바람이 강하여 농작물이 잘 살지 못하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움푹 파인 땅에 있던 작물은 무척이나 잘 자라서 사람들은 일부로 둔턱을 만들고 농작물을 심었는데 그 결과가 좋아 5배의 수확이 있었소. 우리 조선은 겨울이면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밭에 심은 종자가 발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섬의 바닷바람과 비견될 만 하오. 그래서 아깝게 땅에 버리게 되는 종자들을 살릴 수 있도록 골을 내고 종자를 심으라고 한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임금이 직접 5배의 수확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에 딴지를 걸 간 큰 신하는 없었다. 그래서 기대승도 별말이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외의 인물이 도조법에 대하여 딴지를 걸었다.
"신 사헌부 장령 조식이 아뢰옵니다. 전하께오서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그러한 농법들을 앞장서서 도입하시려는 깊으신 뜻은 저희 신료들이 모두 마음속 깊이 알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하온데 내수사전의 소작제가 기존의 병작반수제에서 도조법으로 바뀐 것은 내수사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효과는 있으나 농민들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전하께서는 이점을 굽여 살펴주시옵소서."
"도조법은 평년생산량의 삼분지 일을 소작세로 걷는 것이고 병작반수제는 일년생산량의 반을 소작세로 걷는 것이오. 사헌부 장령은 왜 도조법이 백성들의 부담이 큰지 과인에게 말할 수 있겠소?"
"예. 전하. 원래 1결은 400말의 곡식을 걷을 수 있는 토지를 말하옵니다. 하지만 농사가 평년시 실제로 생산되는 양은 240말 정도이옵니다. 농작물의 생산량은 흉년이냐 평년이냐 풍년이냐에 따라서 크게 다른데 세종대왕때 만들어진 연분구등법을 이용하여 계산을 한다면 요즘처럼 대흉년에 1결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의 양은 대략 80말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온데 도조법에 따르면 평년작의 삼분지 일을 거두게 되니 이 또한 80말이옵니다. 이렇게 되며 소작농들은 일년 농사를 힘들게 지어도 남는 것이 거의 없사옵니다.
물론 전하가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농법을 적용한다면 그 소득이 크게 늘어난다고 하오나 많이 늘어나도 고작 2~3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국역이 다시 부여되니 소작농들의 부담은 한 결 커지는 것이옵니다. 일년만 그렇게 시행을 하여도 그 누구도 내수사전을 경작을 하려는 자가 없고 결국에는 득보다 실이 클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역시나 당시 유학의 계파 중에서도 가장 실용적이라는 남명학파의 시조다운 말이었다. 구체적인 수치를 내세워서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조식을 보는 균은 계속되는 질문에 은근히 짜증은 났지만 겉으로는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은 채 말을 했다.
"경의 말대로 수확량이 늘어도 보통은 2~3배 전후가 한계일 것으로 과인도 생각하오. 그래서 심하면 경의 말대로 일년 수확의 대부분을 소작으로 빼앗길 수도 있소. 하지만 내수사가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수 있기에 소작농들에게 간섭을 하는 경우가 줄어서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고취되니 그 효과 역시 만만치 않소. 또한 그간 밭에서나 해오던 그루갈이가 논에서 가능해지고 그루갈이 작물에는 소작세를 걷지 않는다는 점을 경은 간과하는 것 같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신이 그루갈이를 생각하지 못하여 전하께 심려를 끼쳤사옵니다."
"괜찮소. 그간 많은 논들이 가뭄으로 모내기를 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그루갈이를 하는 법을 잊은 경우가 많아 조선에서 그루갈이를 아는 자가 얼마 되지 않을 듯하오. 나중에 내수사에 명하여 그루갈이에 대한 교육을 농민들에게 시켜야겠소."
그루갈이는 이모작을 말한다. 한국에서 이모작의 정확한 기원을 알 수 없으나 최초의 기록은 허균이 지은 한정 록의 치농조에 나오는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다. 그래서 16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대체로 모내기의 역사와 일치했을 것으로 예상이 되며 따라서 조선전기에도 일부지역에서는 행해졌을 것으로 보이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장점은 많은 식량생산이고 단점은 지력이 빨리 상한다는 점이지만 그 정도는 퇴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행해졌는데 이는 이앙법으로 인하여 논에 보리를 기를 시간이 충분해졌기 때문이다. 원래는 4~5월쯤에 보리의 수확기와 벼의 파종시기가 겹치는데 이앙법은 그 기간에 모판에서 벼를 기르기에 보리농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보리에는 소작세가 붙지않아서 모두다 농민들의 소득이 되기에 농가에 더욱 큰 이익이었다.
균과 세 신하의 대화를 들은 영의정 이준경은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직 그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신 농법의 도입이 기쁜 것이 아니라 농사일에 대하여 잘 아는 왕에 대한 기쁨이었다. 농본주의의 나라 조선에서 농업은 국가의 근간이 되는 사업이다. 따라서 왕이 농사일에 밝고 관심이 많다는 것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조선의 현실에 희망이 되는 소식이었다.
조식을 끝으로 더 이상 균에게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신료는 없었다. 신하된 자가 자신이 모시는 왕의 사유재산인 내수사전의 일에 대해서 너무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않았고 농사에 대해서 신료들보다도 더 잘 아는 것 같은 왕에게 어설픈 소리를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은 분위기에 나서기도 뭐했다. 더욱이 상당수의 신료들은 왕의 풍부한 농사지식에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는 터라 내수사전문제는 별 무리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침 상찬에서 신하들을 설득시키느라 진이 빠진 균은 강녕전에서 엄청난 양의 아침보고를 받았다. 이미 내수사전문제는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도승지 정인기가 가지고 온 문서의 양을 본 균은 마치 자신이 카멜레온인줄 아는 냥 얼굴색이 싹 바꾸었다. 하지만 정인기는 그런 균의 표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문서들을 균의 앞에 내려두고 균에게 고했다.
"전하. 이번에 각도에 파견된 암행어사들이 보내온 장계와 이에 따른 인사변동에 관한 계본이옵니다. 또한 가을철을 맞이하여 옥에 있던 사형수들을 처형해야 하오니 그에 관련된 문서도 같이 있사옵니다. 모두 전하의 재가를 기다리는 급한 문서들이옵니다."
"....도승지. 과인의 예상보다는 좀 서류가 많구려."
"전하. 지금 팔도에 암행어사로 나간 이가 무려 20명이옵니다. 비록 문서의 양은 많으나 소신들의 예상보다는 반도 아니 되옵니다. 거기에 연이은 대사면령으로 지난 몇 년간의 사형수들이 밀려서 관리가 어렵기에 올해 가을 맞아서 빨리 처결을 보아야 하는 실정이옵니다. 그럼 소신은 잠시 물러나 금일의 조계(각부서의 업무보고)를 가지고 오겠사옵니다."
암행어사로 나간 신하들이나 암행어사 때문에 관직을 빼앗긴 탐관오리들과 지방향리들, 균의 정책을 반대하는 자들의 상소문을 다 답장해주어야 하는 승정원의 승지들 모두 힘들겠지만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왕인 균이었다. 20명의 암행어사로부터 받는 엄청난 양의 장계와 이에 따른 인사이동은 아직 열다섯의 어린 왕의 한숨소리를 한껏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래서 균의 한숨소리는 마치 인생을 다 살아본 노인의 한숨소리처럼 들렸다. 오늘내로 처리하기에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방대한 양이지만 균은 자신이 꼭해야 하는 일이기에 마음을 다잡아먹고는 주문을 외웠다.
'그래도 나는 명나라 홍무제보다는 낫다. 그래도 나는 명나라 홍무제보다는 낫다. 그래도...'
명나라 태조인 홍무제 주원장은 명이 건국되고 난 후 토사구팽으로 대부분의 공신들을 숙청하고 역대 최강의 황제권을 건설했다. 그 무렵 창설된 금의위와 내관들은 엄청난 규모의 정보망을 구축하여 황제가 대신의 사생활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은 메일 출근할 때 유서를 맡기고 퇴근할 때 받아가면서 살아난 것을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많은 신하들이 죽어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절대군주정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홍무제 자신이었다. 워낙에 신하들을 믿지못하고 중요한 일은 자신이 다 처리를 하는 바람에 하루에 1700건의 일을 처리해야 했는데 문서에 옥새만 찍어대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한번씩은 읽고 생각을 해보아야는 문서였기에 자유시간이라 것이 있었는지도 궁금할 정도이다. 그래도 균은 비변사와 의정부에서 일단 처리한 서류를 결재하는 수준이니 비교도 안 되는 만큼 편한 것이다.
균이 한참을 검토해서 옆에 쌓아둔 문서가 조금 낮아지기 무섭게 정인기가 조계를 올렸다. 다시 문서는 아까보다도 높은 키를 뽐내며 균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균은 다시 주문을 외우며 그 일을 처리해 나갔다. 하지만 윤대관들이 나타나서 해당부서의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 바람에 문서는 정오가 다 되어도 큰 키를 유지한 채 균을 비웃었다. 점심에 낮것상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균은 쉬지도 않고 또 일을 했다. 조금 있으면 또 구본민들이 나타나서 암행어사를 파견하지 말라고 균을 괴롭힐 것이다. 당연히 일을 못한다.
"전하. 신임 사헌부 지평 이지함 입시이옵니다."
"어서 들라하라!"
하지만 오후에 나타난 사람은 구본민 등이 아니었다. 이지함이 자신에게 알현을 청한 것이다. 대전내관의 입에서 이지함의 이름을 들은 균은 크게 반색을 했다. 이지함정도면 미래를 보았을 만한 인물이니 누구보다도 자기를 잘 이해해줄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균은 큰 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균은 이지함이 절을 하는 것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간 과인이 그렇게 애타게 경을 불렀는데 이제 오다니 너무 한 것이 아니오."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마음 같아서는 다른 변명이라도 하고 싶사오나 전하의 혜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라 차마 변명할 말이 없사옵니다."
"하긴 그간 과인도 사람을 자주 보내어 경을 귀찮게 하였으니 과인의 허물도 크오. 이제부터 경은 사헌부 지평(정 5품)으로 근무하면서 과인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일을 잘 챙겨주었으면 하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부족한 소신이 어찌 영명하신 주상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일이옵니다. 신하인 제가 주군이신 전하의 안목을 뛰어넘기는 어려운 일이옵니다."
그냥 들으면 일상적인 임금과 신하의 사이의 대화지만 속뜻은 달랐다. '전하의 혜안'은 균의 정보망을 지칭하는 말이고 '과인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일'은 미래를 보고 좋은 것 있으면 알려달라는 뜻, 그리고 마지막 이지함의 말은 '나는 모른다 니가 알아서 해라.'는 뜻이었다. 말속에 뼈가 있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대화였다. 그 뒤로도 도와달라는 균과 알아서 하라는 이지함의 밀고 당기는 이야기는 계속되었지만 대전내관의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언중유골형 대화는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