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시작 "아니 홍문관 대제학(정 2품)께서 고작 사헌부 장령(정 4품)인 저를 다 찾아오시고 이것 참 영광이외다."
"흠! 남명, 나는 지금 가벼운 농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니네."
"허허허. 퇴계. 왜 그렇게 인상이 안 좋은가? 혹 주상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불만이라도 있는 것인가?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주안상을 내오지. 여봐라! 손님이 오셨으니 여기 주안상 좀 내오너라."
한성부 일대에 비상령이 내려지고 내금위와 오위도총부의 병사들이 반역의 무리를 잡는다는 핑계로 거리를 살벌하게 활보하는 때였지만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균에게는 명실 공히 사림세력을 대표하는 두 거목을 쳐낼 능력도 그럴 생각도 없었고 또한 균은 상인과 역관들에게만 철퇴를 가하고 있을 뿐 양반사대부들에게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황은 균의 무자비한 처벌에 많이 실망을 했는지 썩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이황과 조식은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다. 영남사림의 양대 산맥으로 지칭되는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비교되는 면이 많았는데 특히 같은 해에 경상 좌, 우도의 향시(과거의 1차 시험.)에서 각각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을 지녔으나 이황은 대과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고 조식은 은거하여 버린 차이가 있다. 학문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어서 조식이 번번이 이황을 현실성이 없다고 탓한 적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친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균 앞에서는 별 말이 없던 이황이 조식 앞에서는 많은 말을 하였다.
"신하가 된 자로써 어찌 주상전하가 하시는 일에 불만을 가질 수 있게나? 하지만 이것은 아니야. 일부 상인들이 한 일을 가지고 한성부의 모든 상인은 물론 역관들까지 의금부로 끌려갔어. 그것도 끌려가기 전에 반죽음이 되어서 말이야. 아무리 죄가 있다고 한들 저들도 주상전하의 백성들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거늘, 죄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자들에게 저렇게 험하게 대하는 것이 어찌 도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아무래도 이번 일에는 주상전하의 정략이 숨어있는 듯 하네."
"허허허. 퇴계. 자네 말이 맞네. 전하께서 상인들을 혹독하게 대하시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상인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저들이 순박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댄 나라의 기생충이라는 것도 사실이야. 주상전하는 불우한 시절을 보내시고 왕위에 오르신 분이네. 역대 어느 제왕보다도 현실에 밝으신 분이지. 그래서 내가 믿고 출사를 결심했고 또한 이번 일에도 나는 찬성을 하네. 그간 상인들이 백성들의 고혈로 배를 불렸으니 그것을 다시 토해낼 때도 되었지."
"이보게 남명. 만일 주상전하께서 단순히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으로만 이 일을 벌였다면 나도 할 말이 없네. 하지만 주상전하는 그들이 가진 이권에 더 관심이 계신 듯 하네. 정확히는 상인들의 상권과 부자들의 재산이지. 그런 상권과 재력이 주상전하의 손에 쥐어진다면 누구보다도 주상전하의 권력은 보다 더 강대해지네. 문제는 주상전하께서 그것을 노리시고 죄가 없는 상인이나 심지어는 별 상관없는 역관들까지 역모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야."
이황이 균에게 실망한 것은 바로 과다한 처벌이었다. 왕이 강대한 왕권을 원하는 것이야 이해가 된다. 권력을 탐하는 것은 지금 조정으로 진출중인 사림들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권력을 탐하기 위하여 이번 사건을 역모로 부풀리고 죄가 있는 자들 말고도 죄가 없는 상인이나 아예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역관들까지 처벌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황은 생각했다. 하지만 조식은 그런 이황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퇴계. 역시 자네는 내가 누누이 말했던 것처럼 현실감각이 없어."
"남명.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죄 없는 자들까지 죄를 만들어 권력을 탐하는 것이 자네가 말해오던 현실적이고 바른 일이란 말인가?"
"허허허. 이 사람 흥분하기는... 누가 보면 우리 둘이 바뀐 줄 알겠네. 원래는 내가 자네의 의견을 비판하면 자네가 '허허허' 하고 넘어가지 않았는가? 자자, 진정하고 내 술이나 한 잔 받게."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시비하나가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여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역시나 자기가 먹을 것은 직접 텃밭에서 길러 먹었다는 조식답게 주안상은 소박한 것이었지만 이황 역시 별 거부감이 없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거친 안주를 집어먹었다. 이황이 술을 마신 후 그의 성질이 조금 누그러들었다고 판단한 조식은 그제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퇴계. 자네는 일부 상인을 제외하고 상인들과 역관들이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돈이 많은 죄."
"푸~~!"
조식의 말을 들은 이황은 입에 들어있던 술을 뿜어내었다. 균이 보았으면 막걸리 브레스라고 웃었겠지만 조식은 그런 이황을 보면서 조용히 시비를 불러서 주변을 정리하게 했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에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거기에 그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모으고 또 부정한 곳에 쓴 죄도 있다네."
"남명.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다수의 상인들이나 역관들이 이번에 문제가 된 방납에 관여했다는 증거도 없거늘, 어찌 그런 죄가 성립한다는 말인가?"
"상인들은 이문이 남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족속들이네. 그런 자들이 방납이라는 큰 돈벌이를 가만히 두겠는가? 또한 우리 조선은 외국과의 교역이 금지되어 일반적인 상업으로는 그렇게 큰 돈을 모을 수 없네. 10배나 되는 이문이 남는 장사가 방납을 빼고 조선천지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이른바 거상이라는 자들은 어느정도는 방납에 손이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네.
설사 방납을 자행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해도 알게 모르게 조정의 부패한 관리들과 손이 닿아서 그들은 상인을 권력으로 보호하고 상인은 뇌물을 바치는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야. 한성부 일대의 상인들을 다 조사해보면 뇌물 한 번 안 쓴 자가 없을 것이네. 이 뇌물이 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백성들을 상대로 한 폭리가 아닌가?
주상전하께서 가난한 노점상들을 처벌하시고 계신가? 저렇게 구린 냄새가 나는 대상인들을 처벌하고자 하는 것이네. 또한 그들이 주상전하께 도전한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감히 천한 상인나부랭이가 자신들의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존귀하신 주상전하의 성지에 도전을 했네. 그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배짱은 어디서 나왔는가? 다 자신들의 돈과 그 돈으로 유지되는 관계와 상계의 인맥이 아닌가?
방납이나 폭리등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죄, 또한 그 돈을 모으기 위하여 부정한 곳에 돈을 쓴 죄가 있는 자들이 그 많은 돈을 믿고 주상전하의 혜안을 속이고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모략을 꾸몄어. 과연 거기서 자유로운 자들이 얼마나 될까? 아마 제대로 된 상도를 걷는 자라면 이미 그들사이에서 시기를 받아서 몰락하고 말았을 거야. 현실이 이러한데 자네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어느새 조식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조식은 상당히 현실적인 사람으로 원래부터 그런 현실에 관심이 많아 아는 것이 많았다. 거기에다 균이 백성들에게 퍼트린 소문까지 조식의 귀에 들어가니 조식의 판단은 균이 하는 일이 옳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를 이황이 부정을 하자 크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균으로는 뜻하지 않은 효과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현실을 모른 채 다른 신하들의 헛소리만 반복하는 이황에게 조식은 크게 화를 냈다.
"역관이라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역관들도 조정에 인맥이 있어야 사행에 나가서 돈을 벌게 되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그런 것을 금지하고 있네. 왜냐하면 역관들이 사오는 것은 모두 사치품일색이니까. 나라의 사정이 어려운 이때에 그런 사치품수입이 가당한 일인가? 그래서 전하께서 금지하시니 역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간 모아둔 돈으로 백성들에게 고리대금을 하거나 저런 방납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백성들을 고혈을 빠는데 동참을 하고 있어.
그런데 죄가 없는가? 선대왕마마의 경우야 그런 제반사정을 잘 모르니 조금만 반대가 있어도 포기하고는 했지만 주상전하는 그들의 머리위에 계시는 분이네. 주상전하께서 그런 자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겠다는데 신하된 자들이 하는 소리가 겨우 그것인가? 자네들에게는 뇌물을 바치고 그런 악행을 행하는 자들만 백성이고 그런 자들에게 고통 받는 말 못하는 민초들은 백성이 아닌가?"
"남명, 내말은..."
"자네도 보았지. 잡혀가는 부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백성들을? 민심은 곧 천심이야. 백성들이 주상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환영하는데 조정의 녹을 먹는 자들이 하는 일이란 전하의 대권이 강해져 자신들의 권력이 줄어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대는 꼴이라니. 특히 이이인가 하는 젊은이는 옛날에 보았을 때는 안 그랬는데 영 못 쓰게 되어버렸어.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왕실의 안위보다는 백성들의 안위를 더 생각하는 사람이네. 왕실의 존재이유가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믿는 사람이네. 내가 그간 선대왕마마와 왕실을 비판해온 이유는 왕실이 중심을 잡지 못하여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 신료들이 앞장서서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기를 원했네.
그런데 지금 보니 주상전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싶은데 신하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어. 나라를 혼란시키는 자들이 바로 조정의 비싼 녹을 먹는 무리들이란 말일세. 뻔히 한성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서 한성부의 상권을 호조가 맡겠다라니... 정말 전하의 만류만 없었어도 당장 낙향하고 싶네. 정말 조정의 관리들에게 실망이 크네."
"이보게 남명."
"그럼 그만 가보게.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네. 배웅은 안 할 테니 그리 알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내뱉은 조식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황을 반갑게 맞아주던 처음과는 달리 차가운 바람을 휭휭 날리며 사랑채를 나섰다. 평소에 왕실을 경원시하던 조식이 적극적으로 국왕인 균을 지지하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나자 이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명에 의해서 죄인을 추국하는 의금부는 연산군시대 이래 최고의 호황을 맞고 있었다. 연산군 당시 추국을 받는 선비들과 조정신료들로 가득했던 의금부는 이제는 한성부에서 손꼽히는 부자들로 가득했는데 거기에 이들을 치료하는 혜민서의 의관들까지 가세하니 이곳이 엄정한 사법기관인지 동네 시장터인지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의금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살벌한 의금부의 분위기를 더욱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아니 이런 독한 놈이 있나? 그렇게 많은 고문을 당했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다니... 계속해라!"
"예."
"음~~ ..그만.. 간지러...하하하."
고문을 당하는 죄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웃자 금부도사 하수성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제기랄, 내금위 녀석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죄인들을 반쯤 죽여서 데리고 온 거야? 이거 추국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금부도사 하수성이 저렇게 내금위를 욕하는 이유는 물건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자신의 주특기인 주리 틀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인두로 지지기나 물통에 머리를 담그는 제대로 된 고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물건들은 반쯤은 저승문턱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죄인들을 죽이지 않고 추국을 할 수 있는 고문은 가장 가벼운 고문인 간지럽게 하기가 고작이었다.
주로 보리이삭의 털로 죄인의 입을 간지럽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보리 가시랭이로 입 문지르기' 라고 불리는 이 형벌은 원래는 의금부에서 잘 쓰이지 않았는데 일반적인 고문을 조금만 받아도 죽을 죄인들이 즐비한 지라 부득이하게 이런 유치한 고문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죄가 없는 자도 있으니 판결이 나기 전에 죽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는 어명도 내려온 상황이라서 금부도사 하수성은 한숨을 내쉬며 명령을 했다.
"죄인을 더욱 간지럽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