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28)

 개혁의 시작 의금부의 분위기가 의외로 온화한 것과는 반대로 한성부일대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내금위소속의 이천 위사들과 오위도총부소속의 삼천 갑사등 약 오천여명의 병력이 역모사건을 핑계로 하여 한성부 곳곳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성부의 인구는 15~20만 전후인데 여기에 5천이 넘는 병력이 경계를 펴고 있으니 당연히 분위기는 살벌하였다. 거기에 역모사건이라는 무게감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충분했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끼친 대상인 세력의 몰락을 반갑게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뒤의 물가폭등을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일부 중소상인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장사를 포기하고 몸을 숨기는 바람에 일부 품목에는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거기다 앞으로 한성부의 물가 공급을 담당하게 되는 기관이 호조라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을 차라리 지방으로 이사를 가자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그렇게 민심이 악화되자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호조였다. 호조정랑 이이의 돌출발언으로 한성부라는 거대한 괴물을 책임지게 된 호조의 실무진들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식은땀을 흐렸다. 그간 거래해오던 상단들이 빈사상태에 빠진 지금 호조의 능력으로 한성부 20만 백성들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균의 뜻대로 상인출신자들에게 맡긴다고 해도 잘 될지 미지수인데 호조가 그 일을 맡는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었다.

국가 예산 중에서 궁에 들어가는 예산이 상당하여 중종이후의 역대 왕들은 물자절약을 하라는 어명을 내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 어명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먼저 궁의 특성상 비싼 물건을 많이 쓴다는 점도 있지만 중요한 이유는 호조의 상급관리들은 상업을 모르는 사대부들이라서 상인들에게 속아 비싼 값을 치르고 상업을 아는 실무진인 하급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이를 눈감아 주었다는데 있다.

고작 오백에서 1천명수준의 보급임무에서도 비효율적인 모습을 보여준 호조가 200배가 넘는 한성부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균이 부자들로부터 빼앗은 재산을 상당수 넘겨주어 충분한 재원은 확보했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거기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호조에서 감당해야 한다는 어명도 있었기에 호조판서 홍담이하 호조의 관리들은 이이 보기를 원수처럼 대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그렇게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은 각기 자신과 친분이 있는 자들을 찾아가서 이번 사건에 대한 대처를 논의했다. 그러한 무리들은 크게 다섯 개나 되었는데 첫 번째는 이이가 포함된 경기도 일대의 사림세력이고 두 번째는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세력, 세 번째는 조식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세력, 네 번째는 홍담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잔여세력, 다섯 번째는 이준경등 원로대신들이었다.

이중에서 균의 정책에 가장 반대를 표방한 세력은 이이가 소속되는 기호사림계열이었다. 후일 서인으로 알려지는 그들은 경기와 충청도 일대의 사림세력으로써 그들의 근거지와 한성부가 가까워 중앙정계의 진출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덕분에 지금도 상당수의 신하가 여기에 속했다. 하지만 반대로 균의 왕권이 강화되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균의 정책은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이이가 나서서 한성부의 경제권을 호조에서 맡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이의 심계가 담겨 있었다.

평소에 균이 가끔 방문하여 머리를 식히곤 하던 취로정은 오늘 따라서 무지 시끄러웠다. 대궐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균밖에 올 수 없는 취로정은 주변에 커다란 연못이 있어서 취향교라고 불리는 다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고 그 다리의 입구에는 건장한 내시들이 번을 서서 지켰기에 취로정은 오직 균만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취로정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번을 서던 내시들은 절대로 접근을 하지 말라는 균의 어명 때문에 궁금증을 참아가며 자리를 지켰다.

"제기랄! 그렇게 당하다니...."

"꽝!"

취로정의 모든 물건은 던져도 깨어지지 않는 것으로만 준비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이곳이 균이 화풀이를 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균의 주변에는 수십 가지의 물건이 널부러져 있었지만 수명을 다하고 전사를 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균 자신을 빼고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취로정의 특성상 균의 남은 일과는 취로정의 청소작업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균이 이렇게 광분을 하는 이유는 바로 백과사전을 읽고 나서였다. 균에게는 원래 두개의 백과사전이 있었는데 하나가 균이 세자가 되면서 태운 남사고의 원본이고 또 하나가 비금도에 보관된 균의 필사본이었다. 그래서 균은 자신이 궁궐을 어느 정도 장악하자 비금도에서 보관 중이던 백과사전을 비밀리에 가지고 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곳 취로정에서도 비밀 장소에 보관을 하고 시간이 나면 백과사전을 읽고 지식을 쌓았다. 그런데 오늘도 시간이 나서 백과사전을 읽는 균의 두 눈에 이상한 문장이 보였다.

'홍담(1509~1576): 본관은 남양, 자는 태허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영의정 홍섬의 동생이며 여러 가지 관직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훈구파의 거두로 김개와 함께 정철등 사림파와 대립하였다.'

그와 동시에 생각나는 박수익의 정보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현재 조정의 대신들은 크게 다섯 무리로 나누어져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가 이이, 정철등 젊은 선비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이고 또 퇴계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자들과 남명선생을 따르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립적인 원로대신들과 호조판서 홍담을 중심으로 하는 자들이....'

"차도살인계."

방금 본 백과사전과 아까 전의 정보보고를 머릿속으로 취합해 본 균은 '차도살인계'이라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그때부터 혼자 화를 내면서 주변의 물건을 다 집어던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처럼 취로정의 물건들이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다.

며칠 전의 어전회의에서 균은 한성부의 상인세력을 처벌하면서 그 상권을 외수사에 맡기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이이가 호조에 맡기자고 하였고 균은 호조의 한계를 알기에 호조정랑인 이이와 주요 사림세력에게 타격을 입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호조의 수장인 호조판서는 홍담으로 훈구파의 거두였다. 아무리 주장은 이이가 했다고는 하지만 호조의 경제정책이 실패를 하면 얼떨결에 총 책임자가 된 호조판서 홍담의 피해가 가장 클 것이고 이는 훈구파의 약세로 이어지게 된다.

훈구파는 조선이 건국될 때 이성계를 도왔던 공신들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사림파는 반대로 조선왕조에 반대하고 은거한 학자들로부터 시작하는 세력이다. 두 세력의 차이를 본다면 훈구파는 왕권을 중시하고 실용적인 면이 있으나 부패가 심하며 사림파는 신권을 중시하고 의례적인 성향이 강하고 깨끗한 편이다. 물론 정확하게 규정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균의 입장에서는 훈구파가 구미에 당기는 것이 사실이다. 부패만 잘 다스리면 균의 성향과 일치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구세력의 위축을 염려하여 자신의 원수인 척신 윤원형의 처벌문제에 반대했던 균이다. 하지만 이이는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훈구파의 거두인 홍담에게 타격을 입히려고 하였고 훈구파의 수장이 윤원형밖에 없다고 오판을 한 균은 오늘에서야 이이의 심계를 알게 된 것이다.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훈구파는 완전히 괴멸하고 이이 자신은 정치적인 타격은 받겠지만 조만감에 다른 동료들의 지원을 받으며 정계에 재등장할 것이다. 한마디로 균은 자신의 지지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은 훈구파를 스스로 제거하는 꼴이 된다. 이이는 자신을 이용해서 훈구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는 차도살인계를 실행하고 균은 이에 걸려든 것이다.

'그때 그냥 외수사에게 맡기겠다고 밀어 붙이는 것인데, 이이와 다른 사대부들의 경제력을 소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내가 당하는 셈이 아닌가? 보나마나 호조는 경제정책에 실패를 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성부 백성들과 훈구파에 가게 된다. 이이가 호조정랑이라는 점에 흥분하여 정작 중요한 호조판서 홍담이 어느 정파에 속하는지도 몰랐다니... 이이도 보통은 넘는 인물이구나.'

잠시 물건을 집어던지면서 화를 냈던 균은 어느정도 화가 풀리자 다시 이성을 되찾고 대비책을 생각했다. 이미 지나간 일을 생각해 봐야 시간낭비였다. 자신과 이이등 기호사림세력간에 뜻이 일치되는 부분이라도 이번 기회에 해결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가 최선이었다.

'일단은 죄질이 나쁜 대상인과 역관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벌을 내리는 것은 둘 다 비슷한 생각이니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한성부의 상권이다. 한성부의 상권을 떠맡을 세력이 없다. 고작해야 외수사인데 신하들 앞에서 그렇게 공언을 한 상태에서 말을 바꾸기도 힘들고 또한 외수사를 이용해서 호조가 하는 일을 도와주어 호조가 성공을 거둔다면 최초의 제안자인 이이가 그 공을 다 가지게 된다. 최소한 홍담에게 피해가 안가는 상황에서 호조가 적당한 수준의 실패를 하는 것이 최선인가? 아니다. 그래봐야 내 손해다.'

균은 무척 난감했다. 가장 편한 방법은 홍담을 다른 보직으로 옮기는 것인데 균 자신이 한말도 있고 신하들의 반대가 심할 것이다. 홍담에게 밀명을 내려 병으로 관직을 관두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훈구파의 방패인 그가 관직을 그만두면 훈구파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홍담은 건재하고 이이는 타격을 입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날 저녁까지 대충 생각을 정리한 균은 다음 날 강녕전으로 호조판서 홍담을 불렀다. 홍담은 갑작스러운 균의 호출에 의아하면서도 얼굴에 난감한 표정을 지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함을 균에게 알렸다.

"전하. 신 호조판서 홍담,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사옵니다."

"요즘 호판의 노고가 많다고 들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홍담이 입으로는 저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너 때문에 죽겠다.' 라고 하는 것 같아서 균은 속으로 무척 미안했다. 이이를 친다는 것이 홍담을 친 격이 돼 버렸으니 두 사람 다 난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균은 의례적으로 간단히 업무보고를 받았다. 즉 이번 일이 세부적으로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긴장된 얼굴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담의 보고가 끝나자 균의 얼굴을 밝아졌다.

"호판의 준비가 참으로 철저하구려. 역시 과인이 믿고 맡길 만 하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호판, 과인이 생각한 것이 있는데 호판의 생각은 어떠할지 모르겠소?"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경의 말을 듣자하니, 참하관들에게는 각각 담당하는 품목이 하나씩 있어 그 책임소재가 명백하니 그 전의 악습이 많이 사라질 것으로 과인은 생각하오. 하나 과인의 생각에는 참상관들에게도 몇 가지 품목을 지정하여 참상관과 참하관이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즉 참하관들이 각각 보리, 매밀, 조, 기장, 수수를 하나씩 책임진다면 참상관 한명이 곡류전체를 책임지면서 참하관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오. 그러면 더욱 그 책임이 명확해지니 좋은 일이 있지 않겠소?"

"....정말 명안이옵니다. 전하."

홍담은 잠시 후에야 균의 속뜻을 알아냈다. 균의 말은 '너의 책임을 밑으로 떠넘겨라' 는 소리였다. 원래 홍담은 상업을 잘 아는 참하관급 실무진에게는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고 상업에 어두운 참상관이상의 관리들은 한꺼번에 한 품목씩 돌아가면서 감시하는 방법을 쓰려고 했다. 이 경우 총책임자인 홍담의 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홍담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균이 말한 대로 피라미드식으로 책임소재를 정한다면 홍담이 마음대로 호조를 움직이기는 힘들지만 책임소재는 분산이 된다. 즉 이이가 맡은 분야가 엉망이 나더라도 다른 분야가 성공을 거둔다면 결과적으로 홍담은 책임질 것이 없다는 소리다. 홍담도 이런 점은 알았지만 이 경우 기호사림이 경제력을 동원하여 이이를 밀어줄 경우에는 이이가 맡은 분야만 성공을 거두게 되어 자신이 입을 타격이 컸다. 그래서 자신이 최선을 다 해보기 위하여 첫 번째 방법을 택했던 것인데 균이 지원해 주겠다는 의사를 은근히 보내오니 홍담으로써는 한숨 돌린 셈이었다.

"호판은 한성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시오. 하지만 귀하디귀한 약재들의 수급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 되오. 모든 일은 중도를 가야하는 법이오. 아시겠소. 호판?"

"예. 전하. 신이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균의 말을 들은 홍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균의 말은 경기도와 충청도의 기름진 땅을 가지고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기호사림세력과 경제력으로 맞짱을 뜨겠으니 너는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일부 품목을 이이에게 책임지게 하고 그 품목이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도 또한 노골적으로 비싼 품목도 하지 말고 그 중간쯤 되는 품목을 선정하라는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보고는 빠를수록 좋겠소. 호판은 이점을 명심하시오."

홍담은 지난번 상참에서 균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이의 심계에 휘말려 오히려 자신에게 피해가 온 사실을 깨달고는 아직 어리고 성질이 급한 왕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균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호사림과 정면으로 경제력 대결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홍담은 균의 무모함에 놀라면서도 균이 자신의 적대세력인 사림세력을 꺾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홍담은 최선을 다하여 균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실각할지도 모르는데 균의 도움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예. 전하. 소신 호조판서 홍담, 성심을 다하여 전하의 성지를 받들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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