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228)

 개혁의 시작 "역시 율곡이 추천하는 사람답게 그 풍채나 기품이 다른 상인들과는 다르구려. 이번 거사를 믿고 맡길 만 하겠소이다."

"소생의 생각도 그러하외다. 역시 구도장원공의 안목은 대단하오."

김형중을 보고 여러 선비들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김형중의 거짓된 모습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금을 모아서 김형중에게 전달하였다. 그렇게 기호사림의 여러 선비들이 모임을 가진 뒤 며칠 후 경복궁 강녕전에는 선전관의 옷을 차려임은 나상 도방 김형중이 균을 비밀리에 알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지도 약 3년여, 상단의 꼬마 주인에 불과하던 이는 이제는 이 나라의 주인 이였고 그 상회에서 일하던 이는 이제는 조선에서 유력한 상인중 하나였다. 임금이 된 옛 주인을 만난 김형중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절을 올리자 균은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김도방. 정말 오랜만이군. 이야기를 듣자하니 하는 일마다 잘 되서 턱이 빠지기 직전이라고 하던데, 이번에도 큰일을 따냈다면서?"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인도 최선을 다 해보았으나 실제로 그들에게 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하긴 기호사림은 그 세력은 사림 중에서 가장 크지만 세력을 대표할 만한 인물은 없지. 구도장원공 이이가 아무리 이름을 날린다고 하여도 그 많은 기호사림이 전부 따르지는 않을 것이니 당연히 한계야 있겠지. 그래 그럼 자네가 받은 돈은 구체적으로는 얼마나 되는가?"

"예. 전하. 쌀 2만 섬 정도입니다."

"고작 2만 섬? 아니 그 정도면 겨우 돈으로 10만 냥 수준에 불과하지는 않는가? 과인은 못해도 수십만 냥은 풀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도 이이의 명성이 떨어지거나 이이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구나."

균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10만 냥은 엄청난 돈이다. 균은 비금도 상회를 외수사로 개칭을 하고나서 나주지부를 나상이라는 이름의 상회로 독립시키고 왜국 시마즈에서 수입되는 물품과 비금도의 소금을 주력상품으로 판매를 하게했다. 이제 더 이상 경재명의 도움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상회를 만들면서 동원한 자본금이 약 10만 냥. 이정도만 해도 나상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상단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때마침 한성부의 상단들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이미 소멸했고 나주의 소금거상들은 천일염의 등장으로 소금 값이 하락하자 그 힘을 잃고 쇠퇴기를 맡고 있었다. 그런 시기를 잘 맞추어 등장한 나상의 성장은 무척이나 빨라서 아직 조선 최고의 상단인 송상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호남지방에서는 비교할 자가 없다는 강력한 신흥 상단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이도 송상은 너무 강한 상대라서 손잡기 힘드니 나상의 김형중을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김형중은 균의 가신 중에 하나였다. 때문에 김무중의 첩보가 없어도 균은 이이등 기호사림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이를 역이용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보다도 상대가 약했다. 이정도는 기호사림의 전 세력이 아닌 십분지일도 움직이지 않은 셈이었다.

"푸하하하!"

"...."

김형중의 정보에 잠시 생각을 하던 갑자기 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웃었다. 자신이 너무 사림을 과신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장 균이 동원할 수 있는 가용재산만 나상을 포함하여 백만 냥을 약간 넘는다. 그런데 김무중의 보고에 따르면 그렇게 열광적인 모임에서 걷힌 돈이 고작 10만 냥이라니... 물론 한성부의 그릇시장을 장악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거금이지만 매년 백만 냥을 만지던 균에게는 웃기는 수준이었다.

"일단 김 도방은 이이가 준 돈으로 유기, 사기, 목기 등 모든 그릇을 살 수 있는 대로 사두고 과인의 명이 있을 때까지는 풀지 말도록 하라. 나중에 이이가 왜 그릇을 공급하지 않는지를 따지러 오면 이 서찰을 전해주도록 하고."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하하하. 이번 기회에 공짜로 돈이 생기나 했는데 예상보다 형편이 없구나. 아 그리고, 나중에 그릇을 팔아서 남는 이익금은 모두 나상에서 사용하도록 하게. 앞으로 김 도방과 나상이 할 일이 많을 것이야."

"예.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형중에게 서찰을 전해주고 다른 명령도 내린 균은 예상보다 기호사림의 경제력에 타격을 주지 못한 것에 잠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기호사림의 단결력이 형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더 큰 수확이었다. 그 엄청난 인원으로 인해 잠시 기호사림세력에 두려움을 느꼈던 균은 다시 한 번 연합체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그런 허술한 세력을 믿고 감히 자신에게 도전해온 이이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을 생각하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도성에 그릇이 부족해?"

"예. 나으리. 소인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요."

"이런. 나상의 김형중은 무엇을 하고 있는게야? 어서 나상으로 사람을 보내라! 어서!" 이이가 김형중의 배신 아닌 배신을 알게 된 것은 보름도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였다. 한성부에 그릇이 바닥났다는 보고에 김형중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김형중은 그릇을 풀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이이는 먼저 개성의 송상에 그릇 공급을 부탁하였지만 10만 냥의 돈은 조선의 그릇시장을 마비시키는 데는 충분한 돈이었다. 송상의 재고량으로도 한성부의 그릇수요를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덕분에 꼼짝없이 당하게 생긴 이이는 나주로 직접 김형중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래서 물건을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출장을 나온 이이는 며칠이 지나서야 천리 밖의 나주에 위치한 나상의 본전에 간신히 도착했다. 그사이 그릇을 공급받지 못한 한성부에서 책임자인 자신을 불러오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지금은 나상도방 김형중을 만나서 왜 약속을 어겼는지를 따지고 다시 그릇을 공급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김형중은 이이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왜 약조대로 그릇을 공급하지 않은 것이야? 자네 때문에 한성부가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를 아는가?"

"예."

".....억!"

이이는 뒤통수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백배사죄를 하고 즉시 그릇을 구해서 공급해도 용서할까 말까하는 판국에 저렇게 당당하게 '예.' 라고 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한껏 끌어 오르던 이이의 분노는 김형중이 건네준 서찰 한통에 한 번에 가라앉았다. 아니 온몸에 싸늘한 느낌마저 든다고 해야 할까?

'경이 불철주야 과인과 백성들을 위해서 수고가 많은 것 같아 과인이 대신 힘을 좀 썼네. 지금쯤은 외수사에서 그릇을 방출하고 있을 것이니 괜히 엄한 사람 탓하지 말고 한성부로 돌아와서 과인을 알현하러 오게.'

이이는 서찰에 쓰여진 '과인'이라는 말을 보고는 절망했다. 자신이 선택한 패가 함정이었다니 '구도장원공'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에 먹칠을 한 격이었다. 고작해야 자기 나이의 반밖에 안된 어린 왕의 손에 놀아났으니 그간 찬사를 보내오던 다른 선비들은 이제는 비웃음을 보내올 것이 뻔했다. 망연자실한 이이를 보던 김형중은 또 균의 마수에 희생되는 사람이 하나 늘어났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일부러 일꾼까지 딸려서 이이를 균이 기다리는 한성부로 보내주었다.

며칠 후 여유 만만한 균과 기가 죽은 이이는 강녕전에 딸린 응지당에서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이미 두 사람의 승패가 났다고 생각한 균은 여유만만하고 제 명성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한 이이는 그 생각에 사로 잡혀서 다른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이이가 제 정신이 들기를 기다리던 균은 먼저 감주(식혜)를 한 잔 마신 후 이야기를 꺼냈다.

"구도장원공이라. 자네는 그 명성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하는 군."

"...."

"자네의 뜻이 왜 실패한 줄 아나? 그것은 모두 자네 때문이야. 구도장원공의 이름은 높지만 그만큼 시기하는 자도 많다는 것을 모르나? 세상에 명성만 높다고 제 마음대로 일이 된다던가? 그런 법이라도 있던가?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세상에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지."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번의 일은 또 어떠한가? 그래 자네가 과인의 뜻에 반하여 신료들을 대신한 것은 나쁘지 않았네. 그런 정책이나 신념의 차이는 언제나 존재를 하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과인은 자네에게 자네들의 움직임에 무척 긴장을 했지. 한데 돌아온 것을 보니 한숨이 나오더군. 물론 십만 냥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상대는 바로 과인이다."

여기까지 침을 튀기면서 말을 한 균은 목이 말라서 감주를 한 잔 더 마셨다.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계절이라서 그런지 따뜻하던 감주는 어느새 식어있었다. 하지만 한껏 열을 내는 균에게는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자네는 구도장원공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믿어 왔겠지만 부러움보다는 다른 이들의 시기심을 사는 이름이야. 자네가 한 번이라도 급제를 했다면 모르지만 무려 9번이나 장원을 하니 그 과거에 같이 응시한 수많은 유생들이 자네를 싫어할 수밖에 없지. 주변을 보게. 홍문관 대제학(이황)도 대과에서는 급제였고 사헌부 장령(조식)은 아예 대과를 치루지 않았네. 하지만 누구인들 감히 그들에게 존경을 보내지 않는가? 학문이 깊고 그 인격이 뛰어나면 사람들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 헛된 명성으로 사람들을 감복시킬 수는 없어."

균이 이이를 질타하는 이유는 바로 이이의 대인관계 때문이다. 구도장원공으로 이름난 천재인 이이는 그만큼 부러움도 샀지만 시기를 많이 받았다. 거기다 현실과 타협할 줄 몰라서 이황과 의견다툼이 나기도 했다. 그 학문은 깊었지만 조정에서 그 세를 형성하지 못해서 동서분당이후에는 동인과 서인에게 동시에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외로운 천재라고 표현 할만한 사람이다.

이이에 대한 평가는 후대로 갈수록 좋아진다. 조선 후기의 집권층이 학문적인 원류로 이이를 따르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은 인재인 것은 확실하나 과대평가된 것이 많다.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만 해도 소설에 가깝다. 나중에 병조판서가 된 이이는 조선군이 개판인 사실을 보고 선조에게 몇 차례 군사력의 재편을 건의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10만을 언급한 적은 없고 나중에 인조때 '이이가 10년 동안 군대를 기르자.'라고 주장했다더라 하더니 그게 나중에는 10만 양병설이 된다. 또한 선조개수실록에는 그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하지만 그 출처는 서인들의 개인문집이다. 그래서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그렇게 이이는 후대에 이르러 과대평가된 면이 있었다. 거기에 아직 젊은 나이라서 그런지 그 식견도 뛰어난 편이 못 됐고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어 모으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균과 대립을 한 것도 자신의 명성만 믿고 객기를 부린 것에 불과했고 그 결과 무려 14살이나 어린 균의 손에서 놀아나고 충고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한참을 그런 이이의 단점을 지적하던 균은 최후의 협상안을 내놓았다.

"과인의 마음은 자네 고향인 강릉으로 돌려보내서 더욱 수양을 쌓게 하고 싶지만 과인의 머리는 자네만한 인재를 구하기 힘들다고 생각을 하네. 함경도 암행어사로 발령을 낼 테니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게. 나머지 문제는 과인이 다 해결해두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제 이이는 균에게 기댈 수밖에는 없다. 함정에 빠져서 다른 사림들의 돈까지 모아서 다 날려먹은 격이니 더 이상 그들과 같이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호사림에서 사실상 쫓겨났다고 이미 다른 사상으로 학파를 이룬 이황이나 조식에게 기댈 수도 없으니 남는 것은 그전까지는 적이었지만 그래도 우호적인 균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이는 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균의 말대로 조금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 떠나있는 것이 그에게는 최선의 길이다. 자신의 제안에 수긍하고 조용히 물러나는 이이를 보면서 균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치판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더니 기호사림의 대표주자가 이제는 훈구파와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인가? 이제 기호사림에는 성혼이나 정철정도가 고작이겠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이이보다도 덜하니 한동안은 걱정이 없겠구나."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은 균은 다시 강녕전으로 돌아와서 호조판서 홍담을 호출했다. 이이가 항복을 하고 투항을 해왔으니 잘 보살펴주라는 말을 건네면 홍담의 표정이 어쩔지 궁금했기 때문에 균의 발걸음은 빨랐다. 그러한 균을 단풍 옷을 벗어가는 북한산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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