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2년.
균 즉위 1년인 서기 1566년 12월 14일.(양력으로는 1567년 2월의 일이다.) 중국 명나라 12대 황제인 세종 가정제 주후총이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황자인 유왕 주대후가 황제로 즉위를 하고 연호를 고쳐 융경이라 하니 그가 명 13대 황제 목종 융경제이다. 이러한 사실이 조선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다음해 1월 초의 일이다. 대강 명나라 가정제가 죽을 것을 백과사전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균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통해서 장거정에게 밀서를 전달하게 했다.
하지만 밀서라기보다는 안부편지에 가까운 것이었고 융경제의 등극과 같이 내각에 입각하여 명의 권력자로 부상하는 장거정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확히 그가 언제 동각대학사나 아니면 따른 자리에 오를지 몰랐기에 명으로 향한 조선사신에게는 두개의 편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아직 승진하기 전에 주는 편지이고 또 하나는 승진한 뒤에 주는 편지였다. 아무튼 명이 잠시나마 부강해지는 장거정의 시대가 시작된 이상 균으로써는 장거정과의 관계개선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의원의 약재고를 털어서 산삼도 보내주었을 정도이니 균으로써는 최상의 대접을 한 셈이었다. 거기에다 덤으로 상당한 수준의 선물과 함께 따로 보약도 직접 챙겨서 보냈다. 융경제가 제위에 오른 후 동각대학사로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된 장거정은 수천 리나 떨어져 있는 균이 자신에게 신경을 써서 보내준 선물에 감격했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예상한 균의 능력에 경악했다.
하지만 만일 균이 자신에게 적의가 있었다면 자기 앞에서 황명을 사칭한 증거물을 태워버리지 않았고 그것을 두고두고 이용해 먹으며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협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반대로 증거를 인멸하고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보내주니 장거정은 균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거기다 그 후로도 균이 가끔씩 명나라를 위해서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을 내어 보내주었는데 장거정의 입맛에 딱 맞는 의견들이었다.
사실은 백과사전에 나오는 장거정의 정책들을 균이 조금 변형해서 보내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균의 의견들을 받아본 장거정은 균에 대하여 크게 오판을 했다. 어린 조선왕이 대명제국 황제의 충실한 신하이며 자신과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균의 편지를 전달한 조선사신들은 장거정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고 그 편에 장거정도 편지와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균 즉위 2년인 서기 1567년 1월. 조선의 수도 한성부는 하얀 눈에 뒤덥힌채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균의 처소인 경복궁 강녕전에서도 조선의 왕인 균이 새로운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오냐."
"곧 세숫물을 대령하겠사옵니다."
"....."
그래도 균이 반응이 없자 균을 깨우던 대전내관 정성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후 옆에 있던 양상궁에게 눈빛을 보냈다. 균이 안 일어날 때마다 펼쳐지는 그녀의 필살기가 필요하다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양상궁은 잠시를 기다려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균을 깨우기 시작했다.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헉!"
양상궁의 필살기 꿈속까지 침투하기에 걸린 균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균은 육체의 나이가 어린지 꿈도 많이 꾸는 편이었는데 양상궁의 필살기만 걸리면 모두 악몽이 되어버렸다. 세자시절에 꾸었던 여동생 진이의 모습에 양상궁의 목소리라는 엽기적인 등장인물은 기본이고 심지어는 꿈에 상참을 주제하고 있는데 대신들이 입을 모아서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를 외치기도 했다. 덕분에 늦잠을 자는 일은 없었지만 심장마비가 오지는 않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양상궁덕분에 잠이 확 달아난 균은 먼저 옆에 놓인 냉수를 한 사발 마셨다. 자고 일어나서 목이 마른 탓도 있지만 그러면 건강에 좋다고 하여 내관들이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왕실의 내관들에게는 왕실양생술이라는 건강법이 있었는데 도교적인 색채가 강한 건강법이다. 그래서 균도 알게 모르게 내관들에 의해서 왕실양생술을 행하고 있었다. 아침의 냉수는 물론이고 균이 즐겨먹는 메밀면도 사실은 내관들이 권했던 것인데 메밀이 정력에 좋기 때문이다.
거기다 요즘 균의 수라에 오르는 반찬들을 보면 강정식품이 많았다. 육회나 뱀장어 ,흑염소, 대구, 잉어, 마늘, 검정깨, 검정콩 등 각종 강장 식품이 수라상에 올랐다. 이제 균의 나이도 열여섯. 일반인이라면 호패가 발급되고 정남의 의무를 지게 되는 명실상부한 성인인 것이다. 하지만 균이 왕위에 오른지 1년 반이 지나고 왕으로써 충분하다 못해 과도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예쁜 궁녀가 있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내관들과 상궁들은 수라간에 압력을 넣어서 일부러 그런 음식을 수라상에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내관들과 상궁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균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대전내관들과 상궁나인들 사이에서는 조심스럽게 균이 불능이 아닌지를 걱정하는 소문이 흘러나왔고 소문이 빨리 퍼지는 궁의 특성상 곧 두 대비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그날 아침 균이 왕대비전으로 문안을 갔을 때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가 같이 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본 균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주상. 이 할미가 대비와 오늘 새벽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소. 요즘 대궐에 무슨 소문이 떠도는지 주상은 아시오?"
"잘 모르옵니다. 할마마마."
"요즘 대궐에는 주상이 아기를 생산할 수 없다는 괴소문이 떠돌고 있소. 주상이 왕위에 오른지도 벌써 1년하고도 여러 달이 지났소. 한데 한창 여인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 주상이 가까이 하는 궁녀가 없다는 것이 이러한 괴소문을 만든 주범이라고 사료되오."
"...."
균은 이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이제 16세로 한창 때였고 매끼를 강장식품으로 먹어도 궁녀들을 보고 반응이 없다면 의심해 볼만했다. 선대왕 명종만 해도 자식은 없어도 후궁은 많았다. 지금은 다 궁에서 쫓겨나서 비구니가 되었지만 이미 균의 나이 때는 몇몇 궁녀들을 건들고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균은 명종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건강하지만 미녀보기를 돌같이 하니 왕실의 어른들인 두 대비가 걱정할 만했다.
"주상. 총명하신 주상도 잘 알고 있겠지만 임금의 책무는 한두 가지가 아니오. 만백성의 어버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책무도 있지만 후사를 얻어서 대통을 이어야 할 책무도 있는 것이오. 든든한 후계자가 없는 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주상도 잘 아실 것이오. 주상이 다른 생각이 있어서 중전을 맞아드리는 것을 피하는 것 같으나 먼저 후궁만이라도 맞아드려 주상의 건재함을 보여야 할 것이오."
대비의 말에 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균은 성불구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다. 기운이 펄펄나는 평범한 청소년이다. 하지만 문제는 균은 후계자가 빨리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든든한 후계자는 균의 왕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선조의 수명대로라면 나중에 장성한 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이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선조가 서기 1608년 죽으니 56세에 사망한 것이다. 만일 균이 결혼해서 1년 후 왕자가 태어나면 거의 마흔이 다 된 아들이 자신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문제는 균의 눈이 높다는 것이다. 옛날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궁녀라고 해도 예쁘지 않다. 그 시대가 지금보다 화장기술이나 피부 관리법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대마다 미인의 기준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러니 조선시대에 최고의 미녀라고 해도 균의 눈에 차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거기에 여러 가지 작은 이유가 겹치니 균의 눈에 들어올 만한 여자가 없었다. 그래서 균은 성불구라는 오명을 받으면서도 궁녀들을 건드리고 다니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균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 대비는 속이 탔다. 일반 평민들도 자식이 없으면 전생에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왕실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일중에 큰일이다. 그래서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이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안부인사를 온 균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간신히 두 대비의 공격에서 벗어나 강녕전으로 돌아온 균에게 아침 참으로 기다리는 것은 검정깨죽이었다. 아침참은 해뜰 무렵에 먹는 식사로 가볍게 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다. 균도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검정깨죽을 보니 아까전 왕대비전의 일이 생각나서 수저를 들기 어려웠다.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에 주둔하고 있는 내금위 제 2부와 제 3부는 금군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도성 내에 주둔하는데 별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후 병력을 더 늘리게 되면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크게 우려를 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따라서 도성근처에 숙영지를 건설하거나 아니면 비금도의 비금부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옳다고..."
"꼬르륵....."
"....전하. 아침 수라를 올리라고 전하겠사옵니다."
도승지 정인기의 아침보고를 받던 균의 내장은 결국에 제 주인에게 반항을 했다. 그래서 한창 열을 올리며 보고를 차던 정인기은 김이 빠져버렸고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은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과인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을 들으신 두 분 대비마마들께오서 과인을 붙잡고 반시진(한 시간)동안 빨리 후궁이라도 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침 아침에 나온 죽이 정력에 좋다는 검정깨죽이니 도저히 과인이 수저를 들 수가 없었소."
"풋! ...송구하옵니다. 전하."
"휴~! 괜찮소. 숙부."
아침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이야기를 하면서도 진절머리를 치는 균을 보고 정인기는 실수로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거기다 지금 균은 무척이나 편식하고 있었다. 수라상 곳곳에 놓여진 강장식품들을 피해서 골라 먹다보니 균이 먹을 만한 음식은 극히 소수였다. 그것을 깨작깨작 먹으며 균이 한탄을 하니 옆에서 보던 정인기는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균의 측근인 제조상궁과 대전내관만 있었기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전하. 사실은 얼마 전에 하원군에게 청혼이 들어왔사옵니다. 하온데 그 반응이 전하와 비슷하여 그만 소신이 불경을 저지른 것이니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괜찮소. 형님에게 청혼이라....? 그래 상대집안은 어디오?"
"전에 이조참판을 지낸 안태랑 대감의 여식이옵니다."
"휴~! 집안은 별 문제가 없구려. 과인이 나서서 형님의 뒤를 봐주고 싶으나 신하들이 반대를 할 것이니 숙부가 좀 신경을 써주시오."
"예. 전하.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정인기로부터 큰 형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균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큰 형이 장가를 들었으니 둘째 형도 곧 장가를 갈 것이고 제 동생 진이도 시집을 갈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자기 때문에 남매가 처녀 총각으로 늙어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균의 입장에서는 안 좋은 소식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대비들과 정인기로부터 연달아 안 좋은 소식을 들은 균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의정 이준경과 좌의정 이명 등이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전하. 예로부터 임금이란 만백성의 어버이로 나라를 잘 다스릴 책무를 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잘 다스린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줄 책무도 있는 것이옵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이미 춘추가 열여섯이 되시어 능히 왕자를 생산하실 만한데도 정무에 바쁘시다는 말로 이를 회피하시니 이는 임금의 바른 행동이 아니옵니다. 만백성의 어머니이신 중전께서 안 계신지도 벌써 이년이 다 되어가니 문무백관들과 만백성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휴~!"
이준경의 말이 계속되고 있지만 균의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냥 역모나 하나 꾸며내서 그런 말이 안 나오도록 해볼까를 고민하기도 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왕위에 올라서 매일 역모사건으로 시끄럽다면 결국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균은 마음에 무척 답답했다. 마침 일도 빨리 마무리 된 터라 시간이 많이 남은 균은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을 하다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