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228)

 즉위 2년.

"아이구. 욱신거려라."

"....."

다음날 아침, 균은 제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옆에서 균을 지켜보던 도승지 정인기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균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일국의 지엄하신 왕께서 암행을 나갔다가 술 먹고 패싸움을 벌였다는 소리에 정인기는 난감하기 이를 때 없었다. 물론 암행을 나간 것은 백성들의 삶을 체험한다는 의미라도 있다지만 불량배처럼 술 먹고 싸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균의 용안에 흠이 안간 것이 천만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숙취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균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도승지. 어제 과인과 만났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처리되고 있소?"

"예. 전하. 원래라면 그만한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의금부에서 처결을 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 경우 외부로 알려질 가능성이 높아서 현재는 내금위에서 감금을 하고 있습니다."

"잘했소.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신하들만 좋아서 난리를 칠 터이니 앞으로도 비밀이 세어나가지 않게 조심을 해야 할 것이오."

"예. 전하."

"그건 그렇고 어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

역시나 술에 약한 균은 어제 밤에 일어났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콩나물국밥을 먹으면서 막걸리를 과음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뒤로는 눈을 떠보니 자신의 침소였기 때문이다. 들리는 말로는 동행했던 내관이 크게 다치고 선전관 역시 부상을 입었다는데 자신은 숙취로 머리가 아픈 것을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그래서 어제 패싸움이 있었다는 것도 대전내관 정성우의 보고를 받고서 알았을 정도이니 지금 균이 고개를 기우뚱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도 나지 않는 일을 떠올린다고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균의 일과는 너무 바빴다.

"일단 도승지는 과인과 맞추쳤던 자들의 신원에 대해서 상세히 조사하여 과인에게 보고하시오. 그리고 어제 과인을 호종한 내관과 무관에게도 명을 내려 이 일을 함구하게 하고 여러 정황을 상세히 적어서 과인에게 보고 하게 하시시오."

"예. 전하."

"그럼 과인은 상참을 위해서 사정전으로 향할 것이오. 그동안 도승지는 상참에 참석하지 말고 이번 일을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해주시오."

"예. 전하.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요즘 들어서 정인기는 균이 자신을 도승지로 임명한 이유가 저런 뒷감당을 전문적으로 맡기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이번 일에 비할 수는 없지만 작은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정인기는 그 뒷수습에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맡기는 것 자체가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의미도 되기에 정인기는 균이 지시한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일을 하면 균은 그 대가를 꼭 챙겨주는 인물이었으니 열심히 일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제 이복형인 정창서는 고작 종 4품 군수직을 수행하는데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균을 따랐다고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당상관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것도 대과를 통해서 정식임용된 것도 아닌데 정승판서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도승지의 자리를 단번에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제 숙부라고 조금 잘못한 일은 잘 감싸주고 번번이 하사품도 내려주는 데 그러한 균의 심기를 거스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인기는 균의 명에 따라서 그날 오전을 바쁘게 보냈다.

한편 내금위가 주둔하고 있는 창덕궁근처의 가옥에서는 두 사람이 얼굴이 떡이 된 채 내금위위사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감옥 밖의 위사들은 살벌한 인상으로 경계를 서고 있는데 감옥 안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아니 밝은 표정은 둘째로 치고 여유 만만했다. 이미 어제 밤에 마주친 자들이 암행을 나온 국왕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유만만하게 아침을 달라고 소리를 치니 그 대담함에 위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보시오. 이미 해가 중천인데 아침은 주지 않는 것이오?"

"아니 감히 주상전하를 위해하려한 역적 놈들 주제에 아침밥은 무슨 아침밥이야?"

"허허허, 저승길을 가더라도 든든히 배를 채운 다음에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러니 밥좀 가져다 주시오. 배가 몹시 고프니 많이 가져다 주시면 고맙겠소."

"형님!"

역시나 두 사람 중에서 형인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냈던 사람답게 능글능글한 얼굴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던 위사들을 거의 놀려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동생인 여해 이순신은 유성룡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 채 답답해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이 호형호제하는 사이었지만 그 입장은 천지 차이었다.

이순신의 경우는 몰락해가는 시골양반에 가깝다. 원래 이순신의 가문도 상당한 명문가였는데 중종 조에 기묘사화의 화를 입고 집안이 몰락했다. 그래서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때는 고작 참하관의 낮은 관직을 하는데 머물렀고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그나마 벼슬자리에 오르지도 못했다. 조선시대에 재산이 없는 양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관직에 나가거나 서당에서 훈장노릇을 하는 정도가 고작인데 이순신의 가문은 뚜렷한 생계수단이 없어서 결국 외가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낙향을 했다.

거기서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처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산에 정착하여 서당훈장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으며 이순신과 형제들도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대과급제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관직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과를 노리는 양반들은 많았고 결국 든든한 연줄이 없는 이순신은 그나마 경쟁이 덜한 무과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거기다 지방에서 살았기에 현재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반면에 유성룡은 아버지가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유중영이고 그 자신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다. 윤원형의 몰락 이후에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이 속속 관직에 출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 인맥도 좋았고 아버지의 후광도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무엇보다도 한성부에 거주하였기에 현재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여유만만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유성룡은 요즘 정세에 어두운 이순신이 걱정을 하는 것을 보고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이보게. 순신아우. 그렇게 걱정은 하지 말게. 주상전하께서는 아마도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실껄세."

"예? 아무리 주상전하께오서 암행중이시라 저희가 못 알아보았다고는 하지만 주상전하의 옥체에 손찌검을 가한 것은 사실이온데 처벌이 없다니요? 유중영대감께오서 손을 써보신다고 해도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허허허. 주상전하는 그런 일쯤에 신경을 쓸 분이 아니야. 그보다는 몇 수 뒤를 따지는 분이지. 우리 같은 피라미들을 처벌하는 것보다는 우리들을 이용할 생각을 할 분이지. 내가 아무리 못난 인물이지만 명색이 퇴계선생의 제자이네. 주상전하께서 나를 처벌하신다면 내 선배들이 주상전하가 암행 중에 술 먹고 패싸움을 벌였다고 난리를 칠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그냥 덮어주신다면 내 스승이신 퇴계선생이 주상전하께 빚을 하나 지게 되는 셈이지.

현재 우리 조선의 정세는 여러 무리로 갈라진 신하들을 주상전하가 적절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이네. 현재 조정에는 크게 다섯 개의 정파가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퇴계선생의 문인들이 주축이 된 우리 영남학파는 주상전하의 새로운 정책들에 대해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네. 이런 상황에서 주상전하가 영남학파에게 호의를 보내시겠는가? 아니면 적의를 보내시겠는가? 주상전하께서는 그냥 용서하시는 것이 최선의 길이네. 그러니 내가 안심하는 것이고. 그런데 아우. 얼굴빛이 왜 그런가?"

"원래는 그대의 말처럼 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것 같군."

한창 이순신에게 안심하라고 설명을 해주던 유성룡은 뒤에서 들리는 색다른 목소리에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균이 띠거운 표정을 지으며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인기의 보고로 자신이 패싸움(?)을 버린 상대가 유성룡과 이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균은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급히 이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자애로운 왕의 모습을 보여줄 계획이었는데 유성룡이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을 보니 균의 심사가 그만 뒤틀려 버렸다.

안 그래도 경비위사들로부터 밥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조금 과장된 말을 전해들은 데다가 실제로도 이황과 영남학파의 후광을 믿고 상황을 낙관하는 유성룡을 보니 균은 그냥 용서해줄 수 없었다. 자신의 기분도 그렇지만 앞으로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될 인재들이 자신을 너무 겁내지 않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균은 백과사전에서 본 두 사람의 약력을 말하면서 뒷부분에 조금 살을 붙였다.

"성명 유성룡. 올해 나이 스물여섯. 전 황해도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경상도 의성 태생. 어렸을 때 한성부 건천동으로 이사해서 이순신의 작은 형인 이요신과 친구로 지내고 어린 이순신을 만나서 친하게 지냈음.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명종 1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 원래는 작년 별시에 응시할 예정이었으나 별시가 역모사건으로 취소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름.

성명 이순신. 올해 나이 스물 셋. 이정의 아들이자 아산현감 방진의 사위이며 한성부 건천동 태생. 열두 살에 외가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낙향하여 스무 살 때 방진의 딸과 혼인함. 그 뒤에 대과를 포기하고 무과를 목표로 하여 작년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원래 친했던 유성룡의 사주를 받고 범행을 저지름. 현재는 장인인 방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중이며 유성룡으로부터 많은 보수를 받기로 약속을 받음.

이만하면 퇴계선생이 직접 나서도 이번 일을 덮어주기는 힘들 듯 한데...."

"...."

균의 왜곡된 정보에 유성룡과 이순신 두 사람 모두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먼저 조선의 왕인 균이 고작 무관무직의 젊은이들의 약력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거기다 자신들의 약력에 상황을 적절히 끼어 맞추는 능력에 더욱 경악을 했다. 그렇게 끼어 맞추어 버리고 증거만 조금 조작을 하면 역모사건으로 조작을 해도 충분했다.

유성룡은 균의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렀다. 상대는 머리 좋기로 소문난 구도장원공 이이도 한 수 접어준다는 인물이다. 또한 자신의 스승인 이황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이다. 거기다 어디서 조사를 했는지 모를 자신들의 정보도 알고 있었다. 이만하면 아직 벼슬길에 나서지도 않은 자신들이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한 존재였다. 유성룡은 그런 괴물과 마주친 자신의 불행을 탓하며 속으로 가장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일단은 이순신만이라도 용서를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

자신이야 퇴계 이황의 문인이니 어떻게든 살아날 방도는 있었다. 하지만 의지할 곳이 없는 이순신은 잘못 걸려들면 멸문지화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몇 년 전 이순신의 아버지인 이정이 죽은 후 병약한 두 형을 대신하여 셋째 아들인 이순신이 가장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화를 당하면 수십 명에 달하는 이순신일가가 화를 입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성룡은 자신이 죄를 다 뒤집어쓰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뼈대 있는 선비집안 출신의 이순신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같이 죄를 청했다.

"전하. 소인들이 전하께 불경을 저지른 것은 백번 죽어 마땅한 일이옵니다. 다 소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우를 시켜 저지른 일이오니 죄는 소인에게만 물으시고 아우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니옵니다. 전하. 전하와 전하를 호종하는 무관들에게 위해를 가한 것은 소인이옵니다. 거기다 제 형은 술에 취하여 그런 일을 시킬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날 술을 마신 이유도 다 소인이 제공한 것이니 소인의 죄가 무겁사옵니다. 부디 소인을 벌해주옵소서."

"아우. 주상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 것은 불충이네. 거기다 자네는 보살펴야 할 식솔들도 많거늘. 이 우형의 죄를 뒤집어 써야 되겠는가? 전하.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아니옵니다. 소인을..."

"그만들 하라. 역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서 그런지 대답 하나는 잘하는군. 하지만 과인이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고 선한 인물이 아니다. 과인이 두 사람의 우애를 보고 용서를 해줄 사람처럼 호락호락하게 보았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크나큰 착각이다."

"...."

원래 죄를 지었다고 해도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죄까지 대신 책임지겠다고 하면 큰 죄가 아닌 이상 용서를 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유성룡은 유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그래서 처세술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서 유성룡은 자신들이 우애를 보여주면서 균이 죄를 사해주기를 바랬는데 불행히도 균은 그 정도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로 용서를 해주었다가는 처세술이 뛰어난 유성룡이 자신을 만만하게 볼 가능성이 높기에 조금 괴롭히다가 용서를 해주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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