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228)

 즉위 2년.

"그대들이 암행중인 과인을 방해한 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정도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이를 탓한다면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과인은 그런 아량도 없는 군주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나라의 군주인 과인보다 자신의 스승을 더 믿고 따르는 그대의 마음가짐이다. 감히 임금의 처벌을 제 스승의 후광으로 막겠다고 공언을 하고 있는 자를 세상에 어떤 군주가 용서를 하겠는가? 안 그런가? 유성룡."

"...."

"옛날에 어떤 약소국이 있었다. 그 나라는 우리 조선처럼 예와 의를 중시하는 나라였지만 국력이 약하여 이웃한 강대국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약한 군대는 전멸하고 그 나라의 수도가 적군의 손에 절반쯤 점령당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병장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도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전 의병을 하나로 모아서 수도를 탈환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일만의 대군이 집결하여 그 나라의 수도로 진격했는데 그 대장이라는 작자가 제 스승의 부음을 받고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갔다. 머리가 없어진 의병은 적군에게 각개각파를 당하고 결국 그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스승을 위해서 나라를 버린 단 한명에 의해서 그 나라의 운명이 바뀌고 수많은 병사들이 허무하게 죽어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조선에도 그런 자들이 주요 관직에 앉아있더군. 물론 그대도 마찬가지이지."

"....."

균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화를 낸 것은 유성룡이 학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조선의 정세나 자신의 입지를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뛰어났지만 학맥과 인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균의 눈에 거슬렸다. 유성룡은 분명히 실력이 있는 인재였지만 그런 유성룡의 성격을 바로 잡지 않고 중책을 맡긴다면 그야말로 나라의 우환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균이 십삼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을 조금 고쳐서 유성룡을 비판한 것이다.

십삼도창의군이란 1907년에 있었던 의병연합군인데 그 수가 1만에 달하고 그중 3천명은 해산당한 대한제국의 군인들이라서 상당히 강력한 의병부대였다. 이들은 서울로 진공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하였지만 일본군의 저항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였고 대장 이인영은 부친의 부고를 핑계로 낙향을 해버려 그대로 해산되버렸다. 물론 그 작전이 성공했어도 조선의 국운을 돌리기에는 불가능했지만 대장이라는 자가 부친의 부음을 받고 전장을 이탈해버리는 어이없는 일은 더욱 유명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격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상 때문이다. 바로 국가의 이익보다 붕당의 이익을 더 생각하던 조선후기의 붕당정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붕당정치가 오늘날의 정당정치에 비견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자랑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학맥과 지연으로 편을 가른 양반들이 권력을 두고 패싸움을 벌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사전에 국익이란 단어는 없었다.

붕당정치가 문제가 된 것은 조선후기이고 조선중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상 최대의 정치조작극 '정여립의 난'을 조작하여 1천명을 사사한 정철, 송익필등이 바로 선조대의 사람들이고 그 뒤에 서인은 인조반정이라는 반란까지 일으킨다. 그런 붕당정치의 문제를 아는 균은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서 각 당파의 세력균형을 조절해서 붕당정치의 장점인 정책의 다양성과 부패방지의 이점을 취하고자 노력 중이었는데 유성룡의 발언을 듣고는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자신의 노력이 헛수고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은 그들을 계속 몰아붙쳤다.

"요즘 신하들은 과인의 신하가 아니야. 다 제 스승의 신하들이지. 그러니 과거를 치루어도 조정에 인맥이 없으면 급제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소문이 떠돌고 실력있는 인재들은 울분과 한탄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대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것이 다 자네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조정에 넘쳐나서 그런 것이야. 그렇게 무리를 짓고 당파를 만들기를 좋아하니 자네 아우같이 힘없는 자들은 대과를 포기하는 것이지.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자들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보았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고는 대신에 과인을 안주로 씹으면서 술을 마셨겠지. 아니 그런가?"

"천부당만부당하시옵니다. 어찌 그런 망극한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균은 띠꺼운 표정을 계속 지으며 유성룡을 계속 공격했다. 균의 살벌한 말을 들으며 유성룡과 이순신은 속으로 '성질 더러운 놈을 잘못 건드렸다'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성룡이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유능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아직 벼슬길에 나서지도 않은 풋내기 유성룡은 백과사전으로 무장된 괴물에게 신나게 혼이 났다. 한참을 꼼꼼하게 따지면서 두 사람을 괴롭히던 균은 본격적인 흉계를 드러냈다.

"그대들은 이 나라의 군주인 과인의 처벌을 제 스승의 힘으로 막겠다는 불충한 언사를 서슴치 않았으며 암행을 나간 과인과 신하들에게 폭행을 가하여 과인의 행동을 방해하는 등 여러 가지 중죄를 지었도다. 이중 암행을 나간 과인의 행동을 방해한 것은 우발적인 행동으로 보아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과인의 처벌을 스승의 힘으로 막겠다는 언사는 엄밀히 따지면 반역죄에 해당한다."

"....."

"이런 죄는 엄히 처벌하여 일벌백계를 취하는 것이 옳으나 과인은 너그러운 아량으로 그대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한다. 즉 과인이 그대들에게 각각 하나씩의 질문을 던질 테니 이를 답변하도록 하라. 그 답변이 충실하다면 과인이 노여움을 거둘 것이오. 아니라면 엄히 처벌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후후후, 딱 걸렸어.'

물론 균이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유명한 위인들을 반역죄로 처단할리는 없다. 두 사람 모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위인들이며 이렇게 역사적으로 검증된 인재들을 버릴 만큼 균은 멍청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말들은 단지 벼랑 끝까지 밀고 갔다가 용서를 해주는 일명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균이 내릴 포상의 효과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균의 얄팍한 계획이 그럭저럭 맞아 떨어졌는지 균이 한창 화를 낼 때는 사색이 되었던 두 사람의 얼굴에는 어느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균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유성룡에게 묻겠다. 현재 우리 조선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국력이 크게 약해지고 변방에 외적들의 침입이 잦다. 하지만 군사력을 키우고 싶어도 나라의 재정이 부족하여 뚜렷한 방안이 없도다. 그대는 이에 대한 좋은 방책이 있느냐?"

"소인 유성룡 아뢰옵니다. 소인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주상전하께서 시행하시는 수미법이 상책으로 생각되옵니다. 이미 공납이 폐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백성들의 기쁨이 하늘을 찌를 뜻하온데 이보다 어찌 더 좋은 방책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또한 소인이 듣기로 올해부터는 전세수입이외에도 수미법으로 인한 수입이 더 생긴다고 하니 일석이조의 방법이옵니다. 하오나 소인의 생각으로는 각 지방 군영에서 각기 거두어들이는 군포를 중앙관청에서 통괄하여 처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사료되옵니다."

"군포라? 군포를 중앙으로 거두었다가 다시 지방군영에 내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군포를 중앙에서 걷는다고 해서 세수가 늘어나겠느냐?"

"하오나 전하. 지방의 아전들이 관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영에도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아전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시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시다고 하여도 각 병영을 단속하기에는 무리가 있사옵니다. 그래서 지방병영의 군교들이 이를 악용해서 실제로는 군포를 이중삼중으로 걷어 들이고 거짓으로 보고하는 자들이 많으니 군포를 징수하는 체제를 바로 잡는다면 백성이 기뻐하고 국고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균은 유성룡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시대의 세금 중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부담이 된 것이 이미 사라진 공납이고 그 다음이 군포였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방위세인 군포는 국방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진 조선초기에는 군역으로 존재를 하다가 중종때 이르러 방군수포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직접 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군역을 대신하였다.

처음에 농민들은 군역으로 농사철을 놓치는 경우가 많아서 군포를 납부하는 것을 환영하였지만 각 지방병영이 각기 담당을 하다 보니 1명이 이중삼중의 부담을 지는 경우가 많았고 심한 곳은 죽은 사람이나 어린 아기, 도망간 이웃의 군포도 징수를 하여 원성이 높았다. 균이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총력을 기울여 공납제의 폐지에 노력을 하고 있었던 터라 그런 부분에 힘을 쓰지 못하고 나중을 기약한 상황이었다.

"군포에 관한 부정은 과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과인은 수미법의 시행과 지방향리들에 대한 녹봉지급 문제만 해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훈구파와 남명쪽은 그래도 과인의 정책을 잘 따라오는데 기호의 사림들은 언제나 과인의 정책에 반발을 해서 조정의 뜻이 모이지 않고 있다. 거기에 퇴계쪽은 아예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지. 그래서 당장 실행하기가 힘들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아직 조정에 출사를 하지 않은 자치고는 좋은 답변이었다. 그대는 과인이 특별히 덮어두겠다. 차후에 이런 일이 또 있다면 과인은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균은 유성룡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기위해서 일부러 '특별히'에 강세를 주어서 말했다. 정확히는 나중에 까불면 이번의 죄까지 가중처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균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해놓고도 자신이 놀랐다. 마치 자신이 상대의 상처만 집중공격 한다는 아마존의 피라니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균은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자신에게 쓴 웃음을 지으면서고 한편으로는 만족했다. 어차피 자신은 평생을 정치라는 괴물과 싸워야 하는 처지였기에 자기보호를 위해서라도 그런 모습은 필요했다.

머리를 조아리는 유성룡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드린 균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긴장했다. 상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아직은 무과에 급제도 하지 못한 초라한 행색의 청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의 균의 계획에 있어서 그의 비중은 중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긴장을 하고 균은 한참을 머리를 굴려서 질문을 던졌다.

"다음은 이순신이라고 했지? 그대는 무과시험을 준비한다니 다른 것을 물어보겠다. 우리 조선은 아직 큰 외침을 받지 않았으나 전쟁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법이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과인은 그대에게 필승의 전략을 묻고자 한다."

"송구하오나 전하. 필승의 전략은 없사옵니다."

"......"

균은 이순신의 대답에 얼어버렸다. 자기 생각에는 '화력과 병력의 우세, 내선작전과 외선작전. 보급철저, 각개각파. 전략기동예비대의 운용.' 등등 엄청 어려운 군사용어가 난무하는 답이 나올 줄 알았다. 특히 상대가 이순신이니 얼마나 어려운 말로 대답할지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당당하게 없다고 답하는 이순신을 보니 균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천리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한마디로 황당했다.

"그대는 과인을 놀리자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전하. 전장의 환경이란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 장수되는 자가 따져야 할 것이 많사옵니다. 통상적으로 적보다 많은 전력을 투입하면 이길 확률이 높아지나 꼭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천문과 지리,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 심지어는 그 장수의 성격에 따라서도 승패가 다르옵니다. 따라서 그런 조건에 따라 승리를 하는 방법도 다르옵니다. 그래서 소인이 감히 필승의 전략이란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옵니다."

"그러니 승진을 못하지..."

"송구하오나 전하. 전하의 옥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아니다. 들을 것 없다."

균은 이번에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역시나 죽더라도 할 말은 다하고 죽는다는 이순신다웠다. 앞서 유성룡은 먼저 균의 정책을 한참이나 극찬을 한 후에 뒤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런 방법은 나이가 많은 노대 신들도 많이 썼는데 균에게 건의를 한때 먼저 균을 한참 칭찬한 후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경우가 많아서 조회 때마다 균의 양쪽 귀가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뛰어난 처세술이었고 조정의 대신들이라면 거의 다 써먹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앞서 유성룡이 그런 방법을 시범까지 보여주었는데도 그런 것을 쓰기는커녕 질문을 바로 부정해버려서 균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조금 돌려서 말을 해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인데 직설적으로 '그런 거 답 없다.' 라고 해버리니 균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유성룡까지 눈치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말이 사실이기에 당당했다.

이순신의 장점이자 단점이 원리원칙적 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일화인 오동나무사건이나 다른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이순신은 원리원칙을 많이 따지는 편이었다. 덕분에 상관이나 동료들과 친한 편은 아니었고 벼슬길도 순탄치 못했다. 대신 그런 이순신의 스타일이 도망병이 많던 조선군의 사정에는 딱 맞아서 승리를 하는 데 보탬이 되기도 했다. 일례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다 도망쳐 버렸는데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도망치기는커녕 압도적으로 불리한 명랑해전에서 끝까지 싸웠다.

"휴~!"

균은 벌써 이순신의 인사배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성격상 아무리 상관의 명이라고 해도 원칙에 안 맞는다면 가만히 안 있을 것이고 이순신의 상관과 동료들의 파직요청 상소가 빗발을 칠 것이니 신중하게 보직을 결정해야 했다. 잠시 이순신의 보직을 생각해보던 균은 더 이상 물고 늘어져봐야 자신의 골치만 아플 것 같아서 간단히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순신의 답변도 맞는 말이다. 과인이 질문을 잘못했구나."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순신은 균이 자신이 질문을 잘못했다고 인정을 하는데도 '예. 질문 잘못하셨습니다.' 라는 뜻으로 들리는 대답을 했다. 만일 지금 이순신에게 눈치를 주고 있는 유성룡이었다면 '아니옵니다. 소인이 전하의 질문에 담긴 깊으신 뜻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이런 식으로 답변을 하였을 것인데 '망극하옵니다' 라고 답을 하는 이순신을 보니 균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균이 할 말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예상보다 그대들의 답변이 출중하여 과인은 만족스럽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얼마 후에 별시가 있을 것이다. 문과와 무과 모두 시행이 되는 것이니 자네들은 각각 해당되는 곳에 응시하라. 그리고 어제 과인과 만난 일은 절대 함구하도록. 이 소문이 퍼지면 그대들이 곤란해질 것이다. 알겠는가?"

"명심하겠사옵니다."

"좋다. 곧 풀어줄터이니 과거준비나 철저히 하도록 하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