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2년.
하지만 주요시설물들이 완공이 되어 제대로 사용될려면 1년은 소요되고 북한산성의 일부 방어시설이 완성되어 제대로 된 군사기지의 역할을 하려면 그 후로 3년은 공사를 해야했다. 거기에 성곽이 완성되려면 6년이 더 소요되니 과히 국책사업이라 할만했다. 어찌보면 일부 군사시설을 위해서 성을 증축하는 것이니 돈낭비로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거기에는 균의 흉계(?)가 몇가지 숨어있었다.
먼저 북한산성이 완공되면 유사시 한성부의 백성들을 바로 대피시킬 수 있었다. 이것만 보면 별껏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 전국적인 도로망을 개설하려는 균의 계획에 보나마나 반기를 들 신하들에게 여차하면 북한산성으로 피하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내금위의 정예병력이 한 번 군사훈련을 해주면 신하들도 반대만 하기는 힘들것이었다. 또한 공사기간 10년동안 인부를 늘린다는 핑계로 병력증원도 용의해진다. 균이 일부로 백성들과 오위도총부의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인데 아마 신하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1만의 정병이 한성부 일대에 포진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한성부내에서 못하던 군사훈련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도성내에서는 56식 소총을 아예 감추어두도록 하여 병사들이 사격훈련을 못 받았는데 북한산성에서는 공사장 소음을 핑계로 사격훈련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산성은 유사시 한성부의 20만 백성들의 모두 피난할 수 있을 만큼 넒은 땅이므로 경계만 잘하면 숨어서 군사를 기르기에는 적합했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사태인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균이 바로 도망갈 수도 있는 곳이니 균에게는 여러모로 이익이 되는 공사였다.
이러한 균의 속셈이 숨어있는 줄도 모른채 신하들은 적극 찬성을 했었는데 얼마 안 되서 갑자기 늘어난 내금위의 병력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하지만 내금위의 유지비는 전적으로 균의 사재로 충당하고 국고에서는 땡전 한 푼의 지원도 받지 않는 데다가 산성공사를 할 인부로 부린다는 핑계까지 있으니 속으로 우려할 뿐 실제로 반대를 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북한산성공사가 시작되고 어느새 봄이 찾아왔다. 그 해 4월 경복궁 강녕전에서는 균과 신하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 올해 전세 수입이 15만섬이나 된다니 이는 작년의 두배가 되는 것이 아니오? 거기다 잡세며 수미법으로 거두어들인 쌀중에서 쓰고 남은 것을 합하면 거의 25만섬에 달한다니 이는 성종대왕때 약 30만섬의 수입을 제하면 최대의 수입이외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다 과인을 믿고 따라준 경들의 노고때문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작년에 전세수입 8만섬과 잡세 2만섬 총 10만섬이던 재정수입이 올해 총 25만섬으로 급증하였다. 그래서 작년 재정지출 20만섬을 5만섬이나 상회하는 재정수입을 거두게 되어 연산군이래 적자행진을 해오던 조선의 재정은 오래간만에 흑자를 보았다. 하지만 이는 작년 농사가 상대적으로 잘되어 그 덕을 본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균의 예상대로 수미법과 향리들에 대한 녹봉지급, 암행어사의 대량파견등 균의 정책들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으나 시행된지 겨우 1년밖에 안 되는 제도가 큰 효과를 발휘하기는 조금 무리였다.
그래서 작년도 만일 흉년이었다면 올해 재정수입은 15만 섬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 경우 20만 섬으로 재정지출을 늘려 향리들에게 녹봉을 지급한 효과가 거의 없기에 균의 개혁정책은 반대에 부딪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평년이 들어서 균은 한숨은 돌렸지만 내년 농사의 결과가 내심 걱정되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과대포장하기 위해서 일부로 크게 웃었다.
'휴~! 올해는 무사히 넘겼지만 내년에는 어떠할지?'
신하들을 내보낸 후 균은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균이 비금도 시절 비축한 재산은 작년 상인들에게 압수한 자금덕분에 아직도 건재했다 하지만 군 유지비가 엄청나서 6천명의 친위군을 유지하는데 만 해도 약 12만 섬의 쌀을 소모해야 하는데 비금도의 염전이 거두어들이는 수입이 12만 섬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소금생산량이 많아져서 소금 값이 1섬당 2.5냥에서 2냥 정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백성들이야 싼 소금을 많이 사 먹을 수 있어서 기쁘겠지만 균의 돈줄이던 염전사업은 한계점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대안이 규슈의 대영주 시마즈 요시히사 와의 교역인데 소금은 그 가격이 다른 교역품에 비해서 낮아 운송비와 보관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서 큰 돈이 되지 못했다. 거기다 아직 밀무역 형태여서 더욱 그런 점이 많았다. 일본에 수출하는 도자기, 인삼, 면포(무명), 저포(모시), 삼베 무기, 화약, 종이, 서적, 화문석, 나전등도 상당한 이익을 내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교역을 하지 않는 한 균의 개인금고를 채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돈은 재정예비비로 사용해야 하기에 다른 곳에 돌리기도 힘들었다.
'할일은 많은데 돈은 부족하군. 어디서 돈 벼락이라도 안 떨어지나?'
돈이 부족하다도 징징거려도 균은 역대 어느 왕들보다도 부유했다. 그나마 균과 비견할만한 재산을 보유한 왕이라면 태조 이성계가 고작일 것이다. 당장 조선의 조세를 모두 합치고 이를 상평전으로 환산하면 대략적으로 최소 500만 냥에서 최대 600만 냥 전후라고 하는데 균의 1년 수입은 무려 100만 냥. 하지만 그중 대부분이 군 유지비로 지출되고 여유자금은 30만 냥 남짓했다. 30만 냥 정도면 굉장한 거금이지만 국책사업을 벌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군 유지비를 줄일 수도 없었다. 균의 6천 친위군이 받는 녹봉이 매년 쌀 12섬으로 최하위 관리인 종9품관의 봉급보다 조금 작은 정도이며 보너스를 포함하면 거의 동급이다. 이는 조선후기 훈련도감군의 녹봉에 비해서 거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균은 많은 봉급을 내리는 대신 군기를 철저히 잡았다. 조선후기의 훈련도감군처럼 조총을 팔아서 쌀 사먹고 그것도 부족해서 가족들은 장사를 해야 했던 군대가 충성심과 전투력이 강할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녹봉지급에 훈련비 같은 것들이 더 포함되니 병사 1명당 유지비는 매년 100냥에 달했고 거기에 무기개발과 군사시설의 유지보수 등을 포함하니 군사비로 매년 70만 냥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조정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홍담이 알면 까무러치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그래서 균은 이런 막대한 지출을 지탱할 새로운 재원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음날은 균의 사촌동생인 정아공주의 돌잔치 날이었다. 균은 일부러 돌잔치를 크게 열어서 종친들은 물론 주요 대신들까지 모두 불러들여 경회루에서 화려하게 연회를 열었다. 원래 이런 궁중연회는 조선의 임금들도 제대로 열지 않았다. 진연도감이라는 임시관청을 설치해서 관리를 해야 할 만큼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고려의 왕인 원종의 경우에는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몽골장군들을 위해서 연회를 매일 베풀어주었는데 그 결과 국고가 바닥이 나서 세곡이 올라올 때까지 밥을 굶은 유일한 현직 왕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의 경우에는 여진족 추장들의 입경시 연회에 쓰이는 돈이 많아서 국고가 바닥날 지경이라 해서 여진족추장들의 입경을 최소화시키기도 했다. 연산군이 쫓겨난 이유중에 하나가 연회를 너무 많이 베풀어 국고를 탕진했다는 것이었으니 궁중연회에 소모되는 돈이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연회를 짠돌이인 균이 크게 연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의 치세로 인해 풍족해진 재정을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때문이다. '내가 나라를 잘 다스려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 연회도 베풀 수 있으니 내 말 잘 들어라.' 하는 의미가 강한 것이다. 거기다 아무리 신하들이 미워도 그들과 사사껀껀 대립만 할 수도 없으니 국정을 돌보는 신하들을 위로해주는 효과도 있고 자신이 대비 심씨를 잘 대해주는 효자라는 생색도 낼 수 있으니 일석삼조에 가까운 일이기에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연회를 연 것이다.
"우리 정아공주의 돌날이라는 것을 하늘이 아시고 날씨도 무척이나 화창하구려. 영상. 이리와서 과인의 술 한 잔 받으시구려. 요즘 들어 부족한 과인을 도와 조정의 대소사를 책임지느라 노고가 많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좌상도 한잔 받으시구려. 언제 보아도 좌상은 나이보다 정정해 보이는 것이 참으로 보기 가 좋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우상. 거기서 뭐하시는게요. 과인의 팔이 떨어지겠소."
균은 정승, 판서등 당상관급의 신하들에게 일일이 어주를 따라주었다. 그런 당상관들이야 균의 아버지, 할아버지뻘에 해당하는 노대신들이니 아무리 왕인 균이라도 우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균은 평소에도 그들에게는 하오체를 써서 말했다. 그런 당상관들뿐만 아니라 균은 나이가 많은 신하들은 모두 일일이 어주를 따라주었다. 연장자를 우대하는 예의바른 왕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궁중연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춤이다. 궁중연회는 노래, 춤, 음악, 글씨, 예법, 음식 ,술 등을 포함해 전통문화의 정수라고 할만한데 그중에서도 궁중무용은 연회에서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었다. 궁중무용은 정재라고 부르는데 크게 우리나라 고유의 무용인 향약정재와 중국에서 건너온 당악정재가 있으나 당악정재의 경우에는 세종대왕때 이르러 대부분 조선화되었다. 또한 향약정제의 상당수는 조선후기때 정립되어 선조당시에는 당악정재를 주로 행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향약정재이든 당악정재이든 균의 눈에는 다 비슷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오랜만의 대연회에 신하들과 종친들은 무척이나 좋아야했다. 균은 겉으로는 같이 즐거워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하루종일을 연회로 보내야 한다는 것에 절망감마저 느꼈다. 별 재미도 없는 연회 때문에 내일의 일거리는 두배로 불어나서 자신을 기다릴 것이고 돈은 돈대로 깨질 것을 생각하니 쫌생이 균은 두통이 생기는 듯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던 균의 귀에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의 대화가 들려왔다. 원래는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균이지만 균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명에서 직수입한 진주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말이오?"
"어디 아름답다뿐이겠습니까? 진주만큼이나 귀한 보석도 흔치 않지요. 금이 귀하네, 은이 귀하네 해도 구슬만한 진주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지요."
'아차! 싸츠마지부!'
두 사람의 진주이야기를 들은 균은 싸츠마지부에 내려둔 밀명이 생각났다. 구 비금도상회의싸츠마지부는 벌써 5년전인 1562년에 건설된 유일한 해외지부이다. 지부장은 김석현이라는 인물인데 원래 박수익의 수하에 있던 정보요원중의 하나였다가 왜어에 밝다고하여 싸츠마의 지부장이 되었다. 이 싸츠마지부의 임무는 크게 세가지였다. 비금도와 시마즈간의 교역감시, 왜국내 세력동향분석, 그리고 양식진주의 개발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균의 주력사업은 천일염생산이다. 이는 조선의 부족한 소금사정과 가격경쟁력이 없는 자염의 약점을 파고들어 균을 갑부로 만들었지만 국내의 수요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다. 소금으로 돈을 벌려면 해외로 수출을 해야 하는데 명나라는 암염광산도 있고 천일제염법을 이미 알고 있어서 수출이 불가능하고 남는 것은 여진족과 왜국인데 조선의 배가 작다보니 운송비가 많이 들어서 큰 돈이 안 된다. 거기다 큰 배를 만들고 싶어도 조선기술의 발달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 다른 자금원이 필요했다.
균은 이미 비금도 시절부터 그것을 알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두 가지를 선택했다. 하나는 명, 왜, 여진, 서양등과의 대외교역과 명과 일본사이의 중계교역 등 무역업이고 또 하나가 바로 양식진주사업이다. 하지만 무역업은 국가 정책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있어서 균 혼자서 쉽사리 움직일 성질이 아니였고 양식진주사업은 조선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양식진주에는 담수진주와 해수진주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담수진주는 조선의 하천에서도 가능하지만 그 모양이 천차만별이라서 상품가치가 낮다. 그냥 가루로 만들어 한약재로 쓰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해수진주는 따뜻한 바다에서만 가능하다. 조선의 남해안에서 가능하기는 하지만 상당수의 진주조개가 패사하거나 진주알이 작아서 그 가치가 낮다. 진주는 그 알이 클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가치가 높아지는데 진주조개의 북방한계선인 남해일대에서 양식진주를 해봐야 큰 돈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따뜻한 규슈의 싸츠마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아코야라는 진주 모패를 이용하여 크기는 작지만 광택은 가장 좋은 진주가 생산된다. 더욱이 진주알은 따뜻한 바다일수록 알이 커지는 특성이 있기에 규슈나 유구왕국정도라면 충분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균은 시마즈 가와 손을 잡을 때부터 양식진주사업을 추진하도록 지부장 김석현에게 명을 내려 양식진주를 개발하도록 명을 내린 적이 있었다. 물론 백과사전에 방법은 나와 있지만 양식진주개발이 한 해, 두 해만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결과가 쉽사리 나오지 않아서 균이 까먹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두 대비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간신히 떠올렸으니 균은 '앗차!' 하는 생각에 머리를 탁하고 쳤다. 옆에 있던 대비들이 균이 이상한 행동에 놀라서 물었다.
"주상. 이상한 행동을 다 하시다니 자리가 불편하시오?"
"아닙니다. 어마마마. 제 동생의 돌잔치인데 어찌 불편하겠습니까? 잠시 소자가 딴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무엇들 하느냐? 기녀들은 계속 춤을 추고 악공들은 음악을 연주하라."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 때문에 균은 뒷수습을 한다고 중간에 빠져나오려던 계획은 포기한 채 하루종일 연회석에 잡혀 있었다. 술도 못 먹는 균에게 하루종일 다른 사람들 비위를 맞추어 주면서 재미없는 춤과 음악을 즐기는 것은 곤욕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돈벌이가 생각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서 균은 가끔씩은 히쭉히쭉 웃었다.
"주상전하께서 팔불출이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군. 저렇게 하루종일 좋아서 웃으시다니 말이야."
"역시 주상전하는 소문대로 효자신가보군. 정아공주마마야 정확히는 사촌동생인데 저렇게 기뻐하시다니."
그런 이야기가 대신과 종친들 사이에 오가는 지도 모른 채 균은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머릿속으로 돈을 벌 궁리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정아공주의 돌잔치는 끝나고 다음날이 되자 균은 박수익을 불러서 즉시 싸츠마지부로 연락을 보내게 하였다. 양식진주개발이 얼마나 진척이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