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2년.
조선과 왜국은 아주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다른 점이 많았다. 그래서 두 나라 간에 교역할 물품도 엄청났다. 먼저 조선이 왜국에 수출을 하는 상품을 본다면 도자기, 인삼, 면포(무명), 저포(모시), 삼베, 무기, 화약, 종이, 서적, 화문석, 나전, 소금 등이고 왜국이 조선에 수출하는 상품은 금, 은, 동, 흑연, 유황, 약재, 향료, 염료 등이었다.
그래서 비공식 거래인 비금도와 시마즈 양측간에도 1년에 상품가격만 백만 냥이 넘는 거래를 하고 있었고 매년 수십만 냥의 이익을 양측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밀거래라 보기에는 엄청난 액수가 오가는 거래였다. 따라서 균은 양식진주를 제외하고도 시마즈와의 교역을 더욱 활성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주고 자신의 측근인 박수익을 파견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가고 싶지만 몇 달이나 걸릴지도 모르는 일에 왕이 직접 매달릴 수는 없으니 박수익을 감언이설로 유혹해 파견한 것인데 예상보다도 박수익은 잘하고 있었다. 무관출신이기는 하지만 지난 7년간 균의 심복인 정보부장이라서 배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참! 이것은 우리 국왕전하께서 영주각하께 하사하시는 물품입니다."
"아니 이건……."
"꿀꺽!"
연회가 끝나고 회의가 시작할 무렵이 되서야 박수익은 균의 선물을 내놓았다. 그가 내놓은 것은 조선에서도 손꼽는 도자기 장인이 만들어낸 최상품 도자기였다. 박수익이 도자기를 내놓자마자 주변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긴 조선왕인 균이 눈물을 머금고 내놓았다는 최상품이다. 조선에서는 백성들이 흔히 쓰는 막사발도 왜인들의 눈에는 대단한 예술품인데 저 정도라면 왜인들에게는 보물 중에 보물이었다.
"아니 박공. 이게 정말 조선국왕 전하께오서 나에게 하사하시는 선물이라는 말이오?"
"예. 전하께서 내리시는 하사품입니다."
"내가 그래도 무역을 많이 한 영주라서 명나라의 도자기를 많이 보아왔는데 명의 도자기는 화려하기는 해도 이토록 기품이 넘치지는 못하오. 하지만 자기라면 조선에서도 귀할 것인데……."
"물론 이 하사품은 조선에서도 최상품에 속하는 도자기이기는 하지만 이것과 비슷할 정도의 명품들도 적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영주께서는 부담을 같지 마십시오."
"조선에 이런 도자기가 적지 않다니 과연 조선은 문명대국이오. 우리 일본에서는 이런 것은 천황폐하나 정이대장군께서도 제대로 접하지 못한 예술품인데 일개 지방영주인 내가 이런 것을 가지게 될 줄이야."
아직 젊은 시마즈 요시히사는 선물에 눈이 멀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타카히사는 탐이 나는 도자기보다 조선 측의 꿍꿍이가 더 궁금했다. 원래 선물이라면 이런 자리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만난 직후에 주는 것이 보통인데 회담을 할 무렵에 깜빡 잊고 늦게 준다는 투로 넘기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아무래도 의도된 행동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별 말씀을. 시마즈는 우리 조선의 믿음직한 거래상대입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대마도주 종의조보다는 시마즈의 도진의구각하에게 더 호의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비록 관직은 낮지만 전하를 측근에서 모시는 제가 밀사로 오게 된 것입니다."
"국왕전하께서 그토록 이 요시히사를 높게 평가하고 계신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 국왕전하께서 그전까지 교역하던 물량을 모두 두 배로 늘려서 교역을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
요시히사는 물론 타카히사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조선과의 교역이 이문이 많이 남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서 상당한 이익이 남아서 중요한 거래선중 하나였는데 거래 규모가 두 배가 된다면 주 거래선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 정도면 조선과 쓰시마 사이의 교역량을 가볍게 상회를 하는 물량입니다. 저희야 그정도 물량을 맞추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조선측의 사정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우리 국왕전하께서는 일구이언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개 영지가 아니라 일국입니다. 도진의구각하."
"제가 잠시 실례했습니다."
"귀측에서 준비가 된다면 수십 개의 수출입품목을 각각 배로 늘려서 교역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주각하."
"우리 측도 이견은 없습니다. 저희 시마즈를 아껴주시는 조선국왕 전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
교역물량증가에 대한 회의는 거의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양측 모두에게 상업이익이 더 많이 생기는 일인데 반대를 하고 자시고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섬의 조차문제는 난항을 거듭했다. 물론 상관과 창고를 짓고도 남을 만한 큰 섬을 내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거기에 조선수비대가 주둔한다는 것에 타카히사와 요시히사 모두 얼굴에 난색을 표시한 채 박수익의 제안에 반대를 했다.
"그렇다면 그 섬에 조선군을 주둔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선경비병들입니다. 각하."
"아무리 본토에서 약간 떨어진 섬이라고는 하지만 이곳 가고시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에 외국군대가 주둔을 한다는 것은 양측의 우호관계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각하. 조선군이라고 해도 해상전력을 보유하지 않은 소수의 육군이 전부입니다. 우리 조선군이 용맹하다고는 하지만 강력한 시마즈가의 무사들이 고작 소수의 조선군을 겁낸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우리 군대가 귀국의 수도 근처에 주둔한다면 박공은 어떻게 나오시겠소?"
"본국은 귀측처럼 적성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귀측은 무려 10만의 대군을 보유한 대우종린(오토모소린)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반면 본국은 북방의 오랑캐들과 남방의 왜구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적대세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거기다 본국의 군사는 정병만 20만에 최대 백만의 대군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귀측과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합니다.
또한 조선수비대가 주둔하는 섬은 본토에서 상당한 거리가 떨어진 곳이고 병력을 많이 주둔시키고 싶어도 식수원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경비대만 존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단의 일꾼들도 물을 마시고 살아야하니 그렇게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하."
"음......"
요시히사는 신음성을 내기 시작했다. 조선과의 교역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공감하는 것이었지만 근거지인 가고시마성 근처에 합법적으로 외국군대가 주둔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일 오토모소린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조선이 변심하여 숨겨둔 군대로 가고시마를 공략한다면 시마즈로써는 큰 낭패였다.
요시히사의 고민을 박수익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강화도에 다른 나라의 군대가 1천명쯤 주둔하자고 요청한다면 당장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균과 그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그 것이 아니었다.
"물론 도진의구 각하의 고민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앞으로의 교역에 장애가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외국군대를 본거지 근처에 주둔시킨다는 것은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껄끄러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당장 현재 전력을 비교하면 시마즈는 오토모의 40%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런 정보를 접한 본국으로써는 우호세력인 시마즈가 오토모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걱정 마시오. 우리 시마즈의 무사들은 일본 최강이오. 아니 시마즈의 일개 아시가루(병사)라도 오토모의 사무라이(무사)랑 싸울 정도이니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이오."
"물론 시마즈의 철포병은 본국의 고급 철포로 무장되어 있으니 왜국제 저급철포로 무장된 오토모의 철포병정도는 가볍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동수일 때나 가능한 일이지 세배차이가 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 전쟁은 철포병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토모가는 기병전력도 우세하고 수군전력도 우세하니 보병만으로 승리를 거두기에는 힘든 일이지요. 거기다 대우종린이 남만제 대포까지 수입했다는 첩보도 있고……."
"오토모소린이 대포를?"
박수익이 슬쩍 흘린 말에 요시히사와 타카히사는 이번에는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아직 왜국에는 자체 기술로 대포를 만들 수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만들 수는 있지만 장식품이었다. 이는 당시 왜국의 철 제련기술이나 주조기술이 너무 낙후했기 때문이다. 실제 왜국에서 대포의 자체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며 덕분에 임진왜란 때 화포로 무장한 조선수군에게 조총으로 대항하다가 혼쭐이 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대포의 위력은 이 무렵에도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왜구들을 이용해서 조선의 남해안을 약탈해 보았던 규슈일대의 영주라면 대포의 위력을 모르는 이가 없다. 거기다 철포의 전래로 화약무기의 위력에 매료가 됐던 왜인들은 대포도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부분적인 기술력을 획득하는 수준에 그쳤고 대부분 서양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무기류를 쉽게 넘겨주지 않았다. 철포만 해도 2정을 사는데 금 이천 냥을 주었을 정도이니 (그것도 전투용이 아닌 사냥용 총이었다고 한다.) 대포는 얼마나 비싼 값에 팔아먹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마즈의 경우도 대포에 관심은 있지만 그 살인적인 고가에 제대로 도입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토모가 도입을 했다면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오?"
"본국의 정보망에 따르면 오토모는 개보리(켈버린)이라고 불리는 대포를 몇 문 구입했다고 합니다. 이 개보리는 사정거리가 약 1800보(2.2Km)에 13근(8Kg) 탄환을 날릴 수 있는 남만에서도 아주 뛰어난 무기라고 합니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농성전이라면 포탄에 성벽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마즈로써는 야전을 벌여야하는데 아시다시피 오토모의 군사가 세배는 많습니다."
"음……."
오토모소린이 에스파냐제 대포를 구입하여 보유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수익이 제공한 정보대로 컬버린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컬버린은 에스파냐의 적국인 영국의 헨리 8세가 만든 장거리 대포이고 조선의 정보망은 자국내의 유력한 양반들을 감시하기도 벅찼다. 따라서 전적으로 균이 만들어낸 거짓정보였다.
오토모가 실제로 수입했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세이커(사거리1.5Km)가 정도인데 그 정도라면 동급의 조선 황자총통(사거리1.3Km: 피령전 기준)과 비슷한 수준이다. 거기다 가격은 무척 비싸서 실제 도입했더라도 소량에 불과하고 숙련된 포병이 없어서 실제로 큰 위협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수익은 소형대포 몇 문을 최신식 중형대포 십여 문으로 부풀려서 시마즈 측에 불안감을 안겼다.
"먼저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 알아보아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 시마즈의 기마무사들의 실력은 대단하오. 아무리 오토모의 대포가 좋다고 해도 용맹한 우리 무사들이 돌격을 하면 어렵지 않게 처리를 할 수 있을 것이오."
"시마즈의 기마무사들이 용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몇 배의 적군을 물리치면서 1800보나 떨어진 적의 대포를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국은 가고시마성 인근에 화포로 무장한 조선군 포병대를 경비대로 삼아서 주둔을 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유사시 우리가 화력을 시마즈군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우리 조선의 화포들이라면 포격전으로 상대의 개보리를 격파할 능력이 있습니다."
"음~!"
"사실 저희측도 유지비를 들여가면서 군대를 꼭 주둔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믿을만한 거래선이 사라지는 것이 두고 볼 수만은 없기에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셨으나 절대 강요는 하지 말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마즈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무역상의 불이익은 없을 것이니 이는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영주각하께서는 부디 최선의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마친 박수익은 여유 있게 물러났다. 그리고는 성내의 숙소에서 묵으라는 요시히사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석현을 대동하고 상관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요시히사는 아버지 타카히사와 동생들을 모두 천수각으로 불러 모아서 박수익의 제한과 그가 흘린 정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