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228)

 즉위 2년.

며칠 후 가고시마성 천수각에서 시마즈 요시히사와 박수익이 만나 회담을 재개했다. 물론 양측 모두 자신들의 속마음은 감춘 채 겉으로만 웃으며 하는 회담이었다. 박수익을 만난 요시히사는 조금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어 자신들의 대답을 내놓았다.

"박공. 본인과 시마즈 일족은 양측의 우호관계가 한층 더 발전하기를 바라며 조선국왕 전하의 요청을 전부 다 수용하기로 결정했소. 따라서 그대들이 원하는 섬을 빌려주는 일은 물론이고 그 섬에 조선군이 주둔하는 것도 허용하오. 하지만 우리 시마즈는 일본국 천황 폐하와 정이대장군 전하의 명을 받드는 충직한 신하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주었으면 하오."

"영주각하. 훌륭하신 선택이십니다. 우리 국왕 전하께서도 만족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조선은 시마즈를 속국으로 삼을 의향은 전혀 없으며 또한 시마즈의 자주적인 의사를 존중합니다. 물론 시마즈에 대한 일본국왕 전하와 대장군 각하의 지배권역시 존중합니다. 다시 한번 일을 수락한 영주각하의 결단에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별말씀을 조선국왕전하께서 우리 시마즈를 위해서 많은 배려를 해주신 일인데 우리 시마즈가 어찌 함부로 거부를 할 수 있겠소? 그래서 어려운 일이지만 결단을 내렸소."

요시히사는 은근히 자신들이 왜국의 지배력 하에 있는 세력이니 조선은 경고망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고 박수익은 그럴 생각도 없지만 너희들은 사실상 독립 세력이 아니냐고 맞받아치는 것으로 회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중요한 결정을 다 내려진 것이기에 곧 바로 요시히사는 박수익에게 축배를 제안했다.

"그럼 중요한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니 같이 축배를 들 일만 남았구려."

"아닙니다. 영주각하. 우리 국왕전하께서 영주각하가 제안을 수락했을 때 전하라고 하는 밀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지요."

"어디……. 음……. 박공. 이 것은 말이 틀리지 않소? 어찌 조선에서 우리 시마즈의 군사행동을 제약하는 것이오? 이는 그대들이 보장한 우리 시마즈의 자주권과 일본 전토를 다스리는 천황폐하와 정이대장군 전하의 통치권을 부정하는 처사이오! 조선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소!"

박수익이 건네 준 균의 또 다른 밀서를 받은 요시히사는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조금 험한 말을 하는지라 중간에서 통역을 하던 김석현은 땀을 흘리면서 그 말을 순화시켜서 박수익에게 전달했다. 요시히사가 보고 화를 낸 두 번째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밀서를 받았다면 그대는 과인의 제안을 수락한 연후일 것이다. 먼저 어려운 결단을 내린 그대의 용기를 크게 칭찬한다. 그리고 과인은 이번 일을 통하여 시마즈가 조선에 우호적인 세력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인이 그대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하고자 한다.

올해는 융경 원년(1567년)이다. 앞으로 삼 년 후인 융경 3년(1570년)까지 오토모와 이토를 자극하는 모든 군사행동을 자제하고 내실을 기하라. 그 이유는 나중에 때가 되면 가르쳐 주겠지만 그대들의 숙원과 우리 조선의 숙원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특히 융경 2년(1569년)쯤에 그대들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그 기회를 살리기에는 힘들 것이다. 이때 경거망동을 한다면 양측 모두에게 큰 해가 될 것이다.

이것은 우호세력인 시마즈가 최선의 기회를 잡기 위하는 과인의 배려이다. 물론 그 실행여부는 시마즈의 자유의사에게 맡기겠지만 과인의 뜻을 따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나의 밀사와 이야기를 하라.'

시마즈의 숙원은 바로 자신들의 전성기 영토였던 남규슈의 삼주 사츠마, 오오츠미, 휴가를 재탈환하는 삼주통일사업이다. 사츠마는 원래부터 장악을 하고 있었으니 문제가 없고 오오츠미의 키모쯔기는 약소세력이니 조금만 지나면 종속시킬 수가 있다. 휴가의 이토는 키모쯔기에 비해서는 강하지만 그 역시 총력전을 벌인다면 시마즈군의 적수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토는 규슈 최대의 세력인 오토모와 사실상 동맹관계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시마즈가 몇 백 년을 내려온 명문이라고는 하지만 오토모의 공세를 막기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요시히사는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조선과의 교역을 더욱 확대하려고 하고 있었다. 조선과의 교역에서 나오는 상업이익과 조선제 무기들을 도입하여 시마즈군을 작지만 강한 군대로 만들어 절대강자 오토모의 공세에서 일단은 살아남아 삼주통일을 이룬 후 북규슈의 오토모와 규슈의 패권을 두고 싸우자는 것이 시마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균의 두 번째 밀서를 요약하면 '너희들에게도 좋은 일이니 내말 듣고 군사행동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삼주통일을 위해서 조선과 협력을 하고 있던 요시히사로써는 받아드리기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요시히사를 보면서 박수익은 균이 신신당부하면서 암기시킨 대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영주각하. 그렇다면 현재 시마즈군이 오토모와 이토 연합군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불가능하지는 않소. 먼저 이토를 쳐 남규슈를 통일하고 세력을 기른다면 오토모와의 대결도 가능하오."

"영주각하께서 남규슈를 통일하는 것을 오토모 소린이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바로는 오토모 소린도 그렇게 무능한 자는 아닙니다만……."

"음!"

요시히사는 기분이 나빴지만 박수익의 말이 현실이었다. 이토와의 국지전이라면 자신이 있지만 오토모와의 전면전이라면 잘 해야 비기는 정도이다. 그 경우 같은 손실을 입더라도 세력이 오토모의 4할에 불과한 시마즈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다. 결국에는 세력의 차이로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영주각하. 우리 국왕전하께서 제안을 하는 것은 시마즈군의 영구적인 출전금지가 아닙니다. 3년 동안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상전하께서는 영주각하의 동의만 있다면 시마즈에 공급되는 총포의 양을 두 배로 늘려서 공급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삼년만 기다리면 시마즈의 조선철포는 3천정을 가뿐히 초과합니다. 그 정도라면 왜국의 어떤 영주로라도 각하의 철포병을 당하지는 못합니다."

"철……. 철포를 두 배로 공급을 해준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철포를 두 배로 공급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훈련용으로 3만근(18톤)의 화약을 무상으로 지원해줄 용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국왕전하께서는 시마즈군이 강대하지기를 바라는데 영주각하께서는 현재 있는 군사력마저도 소모하고 싶으십니까? 옛말에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늦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기다림을 아는 것도 난세를 살아가는 무장이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그 비싼 화약을……. 3만근이나……. 박공……. 국왕전하의 밀서에 그렇게 깊은 뜻이 숨어있는지는 몰랐소. 내가 너무 조급한 마음에 결례를 저질렀소.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기 바라오."

박수익의 자세한 설명과 조언까지 들은 요시히사는 속으로 감탄했다. 조선이 유약한 유학자들이나 옹기종기 모여서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라인줄 알았는데 예상보다도 더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화약이 3만근이면 엄청난 액수의 군수물자이다. 그것을 무상으로 지원해줄 정도라면 그만한 경제력과 군수물자 생산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그래서 요시히사는 조선의 군사적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물론 조선의 화약이 주재료를 초석밭을 이용하기 공급하기 때문에 왜국의 화약보다 싼 것은 사실이지만 3만근이라면 1만 명의 철포병을 운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조선전체 화약재고량의 1할에 가까운 엄청난 양인 것이다. 그 정도라면 초석밭을 이용해서 화약을 대량생산하는 조선이라도 부담이 갈 정도였다.

철포는 싼값으로 두 배나 판매하고 화약은 아예 무상으로 지원해준다는 말에 방금 전까지 박수익에게 화를 내던 요시히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선의 엄청난 지원에 의문도 생겼다. 조선이 차라리 오토모랑 손잡았으면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하지 않고도 강력한 동맹세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겠다는 것을 거부할 요시히사는 아니기에 그런 생각은 싹 지우고 조선국왕 즉 균에 대한 덕담을 박수익에게 늘어놓았다. 칭찬과 아부는 아무리 많이 해주어도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식사시간이 되어 방에는 화려하기만 하지 먹은 것은 별로 없는 연회상이 차려지고 요시히사와 박수익은 술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차가 나오자 요시히사가 뜬금없이 균의 나이를 물어왔다.

 "조선국왕 전하께서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전하께서는 가정 31년(1552년)에 태어나셨으니 올해 보령이 열여섯이 되시옵니다."

"열여섯이라 나의 예상보다도 한참은 젊으시군요. 그 정도만 한창 좋을 나이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왕비 전하께서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직 전하께서는 중전마마는 물론이고 후궁들도 단 한 분도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라면 능히 일가를 이룰만하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조선국왕 전하의 후사문제를 걱정할 텐데……."

"영주각하. 그것은 조선국내의 문제이니 각하께서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 자리는 조선과 시마즈의 현안을 해결하는 자리인데 국왕전하의 혼인문제가 오간다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박수익의 날카로운 지적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사는 헛기침을 하여 일단 논지를 흐려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를 꺼냈다.

"험험. 밖에 유메 있느냐?"

"네. 아버님."

요시히사의 말에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한 10살 정도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기모노를 잘 차려입은 소녀였다. 물론 기골이 장대한 조선인 박수익이 본 기준이니 소녀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많겠지만 조선인이라면 아무리 많이 보아도 십대 초반의 소녀에 불과했다.

하기는 당시 조선군의 평균 신장이 150센티미터 전후라는 소리가 있는 반면 왜인은 130센티 전후라는 말도 있는데 그런 기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소리다. 물론 당시의 기록과 도량형이 부정확하여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10센티 정도는 차이가 났던 것 같다.

아무튼 소녀는 어리지만 조금 자라면 제법 미인소리를 들을 만큼 예쁜 편이었다. 아름답다고 하기보다는 귀엽다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지만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는 이국의 소녀를 보니 박수익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박수익의 모습을 보는 요시히사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걸렸다.

"박공. 나의 딸인 시마즈 미츠키라고 하오. 뭐하느냐 미츠키야, 조선국왕 전하의 총신이신 박공이다."

"시마즈 미츠키라고 합니다. 아버님에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영주각하의 따님이십니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조선국 사신인 박수익이라고 합니다."

요시히사는 제 딸이라고 소녀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박수익은 중요한 회의자리에 어린 딸을 불러내는 요시히사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가 균에게 듣기로 왜국은 조선과 가까운 나라이지만 풍속은 무척 다르니 신중하게 대처하라는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녀의 등장으로 잠시 두 사람간의 대화는 중단되었는데 그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고 입을 연 것은 요시히사였다.

"박공."

"예. 영주각하."

"내가 박공에게 부탁할 것이 있소."

"부탁이라 하시면……."

"내 딸을 국왕전하께 보내주시오."

"푸~! 콜록콜록."

요시히사의 말에 통역을 하고 있던 김석현은 마시고 있던 찻물을 내뿜었다. 그리고는 계속 콜록거렸는데 덕분에 시녀들이 들어와서 방안을 정리하고 박수익을 잠시 돌보아야 했다. 잠시 후 마음을 진정시킨 김석현의 통역에 박수익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영주각하.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박공. 농담이 아니오. 몇 해 전에 내 동생 이에히사가 국왕전하께 혼쭐이 난적이 있소이다. 그때 박공도 같이 계셨다고 하니 잘 아실 것이오. 본가로 돌아온 이에히사가 국왕전하의 모습에 감탄을 했는지 틈만 나면 집안의 아이들에게 전하의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그런 무용담(?)을 듣고 자라서인지 내 딸이 자라자마자 국왕전하께 시집을 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고심하던 끝에 딸아이를 국왕전하께 보내려고 생각하였는데 우리 무사들이 호위를 해서 조선 땅에 데려다 주었다가는 왜구로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서 무척 난감하였소. 그런데 마침 박공이 와서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 것이오. 박공이라면 국왕전하의 측근이니 안심하고 내 딸을 국왕전하께 데려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니 내 청을 들어주시오."

"……."

요시히사의 대답에 박수익은 속이 타는 것을 느꼈다. 요시히사가 균의 중요한 동맹세력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딸이라면 왜국에서는 고귀한 신분의 처녀이겠지만 조선에서는 왜구의 천박한 계집에 불과했다. 먼일 이 자리에 박수익이 아닌 조정대신이 있었다면 요시히사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왜구의 두목인 요시히사를 토벌해야한다고 난리를 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균이 이런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깜빡 잊고 제대로 가르쳐주기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균의 어명은 왜국은 우리와 풍습이 다르니 그들이 호의를 보이면 함부로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박수익은 균을 원망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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