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2년.
박수익은 균의 정확한 의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도 없어서 일단 나중에 이야기를 하자는 말로 얼버무리고는 급히 본국으로 서신을 날렸다. 자칭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박수익 자신이라면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겠지만 그의 주군인 균은 그런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균의 의사를 들어보는 것이기에 박수익은 급히 밀서를 보내고 하염없이 균의 답서를 기다리면서 김석현이 숨겨둔 반찬들을 아작 내기 시작했다. 김석현에게는 다행히도 균의 답서는 제법 빨리 도착했다. 그리고 그 답서를 미리 보게 된 박수익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양측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그대의 제안을 과인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훌륭한 후손을 얻기 위해서 중전은 물론이고 후궁을 선발하는 것조차 공개적으로 선발하며 그 조건이 무척 까다롭다. 이번에 새롭게 적용되는 중전 및 후궁 간택규정은 뒷장에 기재했으니 참조 바란다.
이 규정은 조선왕실에 시집을 오려고 하는 모든 처녀들에게 적용되는 규정이며 외국인이나 조선인이라고 해서 차별이나 혜택은 원래 없다. 하지만 그대의 여식이라면 양측의 우호 관계를 고려하여 일부사항에 혜택이 있을 것이다.
조선왕실 간택규정.
1. 키 5자(150Cm)이상 몸무게 80근(48Kg)미만이며 신체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13세에서 17세의 처녀로 남자의 손이 타지 않은 숫처녀만 가능하다.
2. 심성이 곱고 예의가 바르며 외모가 아름답고 처녀의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가 양반사대부 집안이어야 한다. 단 외국인의 경우에는 조선의 관직으로 환산하여 자격을 부여할 수도 있다.
3. 처녀의 부계 또는 모계로 조선왕실에 해를 끼치거나 역모를 꾀한 조상이 있으면 안 되고 기타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내용을 위배하지 않아야 한다.
이상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한성부 경복궁에서 세 차례의 간택시험을 치르게 된다.
초간택: 사서오경 암송. 합격시 궁녀로 입궁.
재간택: 사서오경 및 무경칠서 그리고 국조오례의 암송. 합격시 후궁으로 책봉 삼간택: 사서오경 및 무경칠서 그리고 경국대전 암송. 합격시 중전으로 책봉.
단,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일부 조건은 무시할 수도 있다.'
균이 제시한 일반 조건은 요시히사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먼저 키 150Cm의 13세에서 17세의 왜국소녀라면 당시에는 구경도 하기 힘든 진귀한 존재이다. 거기에 상당한 미모와 예의범절까지 갖춘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시마즈는 원래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로 이름을 날리던 가문이니 요시히사 맞추기 힘든 조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조선의 후궁이나 궁녀 선발규정과 비슷하니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수익은 간택사항을 보고 쓰러질 뻔했다. 사서오경을 다 외울 정도면 당장 관직에 출사를 해도 되는 수준이고 거기에 무경칠서, 국조오례의까지라면 30여권이나 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방대한 법전인 경국대전을 다 외우는 인물이라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암기의 신 급이다. 원래 간택의 과정에 후보자들의 교양을 묻는 시험이 있기는 있지만 이 정도면 왜곡이 너무 심했다.
이런 균의 억지대답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조선전기까지는 후궁들도 금혼령을 내려 간택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는 대체로 궁녀들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전기는 대부분 간택으로 후궁을 맞았다. 실제 선조역시 1580년에 3명의 후궁을 선발한 적이 있으며 명종역시 후사를 두기 위해 순회세자가 죽자 후궁을 선발했다.
그래서 균은 이점을 악용하여 자격조건을 아주 엄하게 세워서 아예 요시히사의 제안을 원천봉쇄를 해버린 것이다. 역시나 균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역시 주상전하께오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
박수익은 이 규정을 받아보고 얼굴빛이 변할 시마즈 요시히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계속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박수익이 균의 답서를 몇 차례 계속해서 읽다보니 이상한 구절이 몇 개 보였다. 일부 해택이나 조건무시 같은 구절이 이상할 정도로 박수익의 눈에 거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박수익은 답서의 뒤쪽에 쓰인 암호문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올커니!"
그 해 초겨울 날씨는 제법 추위가 매서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추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도 한성부의 동문인 흥인지문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는 두 무리의 군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동쪽에 위치한 군대는 약 일만 오천이나 되는 대부대였고 이와 마주하는 서쪽의 군대는 고작 3천에 불과한 소규모 부대였다. 그러나 두 군대의 군복이나 무기가 비슷했기에 각기 청색과 백색의 띠를 두르고 서로를 구별했다.
동쪽의 대부대인 청군은 전형적인 조선군의 포진을 하고 있었다. 각 3천씩 나누어진 다섯 개의 부대가 십자형(十)으로 포진한 청군은 각 부대별로 황룡,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진 깃발 아래모여서 상대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군의 기본진법인데 도교적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미 고려시대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포진이었다.
반대로 서쪽의 소부대인 백군은 품자(品)대형을 취하고 청군을 노리고 있었다. 청군은 전군을 5개 부대와 25개의 소부대로 나눈 이른 바 오각편제를 취하고 지휘부를 예하부대가 둘러싸는 방어적인 진형을 취하고 반면 백군은 전군을 3개 전투대와 1개 본부대로 나눈 삼각편제를 취한 채 언제든지 돌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병력이 5배나 많은 청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였지만 병사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 많이 틀렸다. 청군은 손에는 조선군의 단창(130Cm길이의 삼지창)과 방패를 쥐고 군복으로 무명바지와 무명저고리 입고 당시 전투모인 벙거지를 쓴 채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의 군복을 다시 입거나 색깔표지를 붙이고 있었다. 5개 부대 모두가 색이 틀렸다.
중앙의 황룡기부대는 황색, 동쪽의 청룡기부대는 청색, 서쪽의 백호기부대는 백색, 남쪽의 주작기부대는 적색, 북쪽의 현무기부대는 흑색으로 일부 통일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통일되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병사들 중에서 병사용 갑옷인 흉갑까지 갖추고 있는 자는 열에 하나, 둘을 넘지 못했다. 거기다 장수들의 지휘가 안 이루어져서인지 아는 사람들끼리 잡담이 심해서 대한민국의 예비군 훈련장을 방불케 했다.
반대로 백군의 수는 훨씬 적었지만 전원이 흉갑을 착용하고 있어 오히려 보유갑옷의 수는 백군이 많을 정도로 장비가 충실하고 복장이 통일되어 그 기세가 엄정했다. 3천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 잡담을 나누는 사람은 고작 몇 명인데 그나마 작전을 짜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소리를 안 내기 위해서 병사들이 입에 무는 나무막대가 필수품이었는데 이 군대만큼은 예외일 정도였다. 그렇게 군기가 엄정하니 그 기세가 한층 더 살벌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앞의 3개 전투부대가 그런 것이고 오히려 그 뒤에 위치한 본부대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청군은 총병력 3만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1만 5천을 전투부대로 투입하고 나머지는 대기병력 및 수송보급부대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백군은 총병력 3천. 전원을 전투부대로 운용중이며 그 수적인 측면에서는 청군의 상대가 아닙니다. 특히 청군의 수장인 영상 이준경대감은 문신이라고 하지만 이미 명묘(명종때)의 왜변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대공을 세운 분이니 일군의 대장으로써는 충분한 사람입니다. 전반적으로 백군이 불리합니다."
"그러나 청군은 농번기를 이용하여 임시 소집된 오위도총부의 번상병이 주축이 된 군대입니다. 이들은 팔번교대를 해서 일단 군대로써 편제는 되어 있으나 고향에서는 농사를 짓고 한성부에 올라오면 성벽을 보수하는 공사에 내몰려 그런 훈련을 받지 않은 반면 백군은 주상전하를 호종하는 내금위로 편제된 막강한 군대입니다. 내금위장 영감도 그 재능이 뛰어나니 겨루어보지 않고는 승패를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되지 않은 병사라고 해도 그들이 쏘는 화살에 맞으면 다치고 창에 질리면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수성전도 아니고 이런 아전이라면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리는 있으나 싸움은 머릿수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병사들을 보더라도 거의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입니다. 만일 영감이라면 백군을 지휘하고 싶겠소? 아니면 청군을 지휘하고 싶겠소?"
"그야……. 당연히 백군이지요. 무장이라면 이런 군대를 지휘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청군이 이긴다. 백군이 이긴다. 자리에 배석한 무신들의 입은 쉴 새가 없이 움직였지만 분위기는 무척 좋기만 했다. 보통이라면 서로 다른 견해에 짜증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모두 다 호피가죽이 깔린 자리에서 전복을 차려입고 무신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는 균 덕분이었다.
조선왕은 조선군의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태종 때까지만 해도 왕이 친정에 나섰고 세종, 문종, 세조때 조선군의 기본 군제가 확립되는 등 조선초기에는 군인가문 출신답게 문치로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때 사림들이 진출하면서 문치주의로 흐르면서 조선의 왕은 유약한 모습으로 남게 된다.
조선왕이 군사를 실전에서 지휘한 경우는 드물지만 매년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은 기본적인 군왕의 책무였다. 그래서 매년 1회 대규모 군사훈련인 '대열'과 매년 2회 사냥대회를 겸한 '강무'를 통해서 군사적인 소양을 배양했으나 후대로 갈수록 그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동원병력이 10만이나 되는 훈련을 국가재정으로 뒷받침하지 못했고 병사들이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지방에서 올라와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후대의 연산군은 제법 군사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중종반정으로 밀려나고 그 뒤를 이은 중종, 인종, 명종은 무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더욱이 조정의 주요요직을 문관들이 차지하고 무반들의 벼슬자리가 문반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자리로 변질되면서 조선의 무반들은 문반에 비해서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균의 경우는 당시 급박한 국제정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인물인지라 조선군의 지나친 약체화를 우려하여 추수가 끝나자 바로 내금위와 오위도총부의 군사를 같이 동원하여 대규모 군사훈련인 '대열'을 시행하였다. 균의 결정덕분에 오랜만에 무용을 뽐내게 된 무반들은 크게 기뻐하며 논쟁을 즐겁게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일에 존재하는 균의 흉계(?)는 무반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번 일에도 개입해 있었다. 원래 대열은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하는 군사훈련이라서 문반과 무반이 모두 참가하는 훈련이다. 그러면 문반과 무관을 적당히 섞어서 배치를 해야 하는데 이번 대열은 오위도총부의 1만5천의 청군을 지휘하는 자들은 전부 문반이고 내금위의 3천 병력을 지휘하는 인물은 전부 무반들이었던 것이다.
무관들은 은근히 숫자가 많은 청군의 승리를 점치는 분위기였지만 균의 생각은 백군즉 내금위의 압승이었다. 균은 새로운 조선군의 기간조직으로 삼으려는 내금위가 훈련도 안 되고 사기도 낮은 오합지졸들에게 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균이 이번 기회에 무반들의 백군이 문관들의 청군을 완파해 군부요직을 문반들이 아닌 무반들에게 맡기려고 꾸민 일이었다.
그래서 균은 뒤에서 각 무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자신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조만간에 공석이 될 군부의 요직에 임명할만한 유능한 무장을 찾아내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청군이 전투대형을 바꾸면서 균이 있는 백군지휘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주상전하. 청군이 진형을 학익진으로 바꾸고 있사옵니다. 그것을 보아 조만간에 청군이 공세를 취해올 듯합니다."
"과인의 생각도 내금위장과 같소. 다섯 배의 압도적인 군세를 이용해서 아군을 반 포위를 하여 섬멸하려는 의도로 보이오."
"예. 전하. 소장의 생각도 같사옵니다. 아무리 청군이 번상병으로 이루어진 군사이고 우리가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군사라고는 하지만 수적인 우위는 무시할 수가 없나이다. 특히나 5배라면 승패를 장담하는 것은 문제가 있사옵니다."
"아군은 질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고 청군은 양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단순히 그 전력만 보면 거의 백중지세라 해야 할 것이오. 그럴수록 내금위장의 지휘력이 필요한 때이니 내금위장은 과인의 의사를 묻지 말고 병사를 움직여 신속히 대처하시오."
"하오나 전하. 이번 훈련은 전하께서 지휘하시는 훈련이 아니옵니까?"
원래 청군의 수장은 영의정 이준경이고 백군의 수장은 바로 조선왕인 균이었다. 훈련은 청군이 한성부로 진공하는 것을 백군이 막아내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었는데 유사시 반란에 대비한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그래서 균이 직접 지휘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군대를 움직이기 바로 직전에 균은 지휘권을 곽흘에게 넘겼다. 그러자 곽흘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실례를 무릅쓰고 그 이유를 물었다.
"내금위장. 과인도 도면으로 전술을 짜본 적이 있으나 삼천의 병사들을 실제로 지휘해본 경험은 없소. 병사들의 사기는 지휘관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법인데 과인이 직접 지휘한다고 해도 내금위장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소.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과인이 뒤에서 전체적인 형세를 살펴볼 터이니 내금위장은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라는 말이오."
"예. 전하."
균은 조선의 왕이며 조선군의 최고사령관이다. 그런 위치의 인물이라면 군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전선은 일선지휘관에게 맡기고 자신은 뒤에서 전략적인 시야로 전투를 지켜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거기다 균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하면 부하장수들이 공을 세울 수도 없어서 불만을 품을 수도 있으니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나서 총 지휘를 맡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일단 일선부대는 내금위의 장수들이 있으니 그들이 병사들을 지휘하도록 할 것이오. 하지만 그들은 눈앞의 청군과 싸우느라 대국적인 움직임을 볼 수 없으니 그들의 눈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과인과 경들이오. 곧 훈련이 시작되면 경들은 청군과 백군의 움직임을 보고 과인에게 여러 가지 작전을 제안하시오. 비록 일선지휘관은 아니라고 하나 훌륭한 제안이라면 크게 상을 내릴 것이오. 다들 알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럼 내금위장은 어서 전군을 지휘하여 훈련을 승리로 이끌라."
"예. 전하. 소장 충심을 다하겠나이다."
균의 지시에 의해서 백군은 크게 2개로 나누어졌다. 내금위장 곽흘이 지휘하는 전투부대와 균이 지휘하는 일종의 총사령부였다. 이 무렵 이준경이 지휘하는 청군역시 노대신들이 지휘하는 사령부와 젊은 신료들이 지휘하는 전투부대로 나누어졌으니 별 차이는 없는 듯하지만 이쪽의 사령관인 균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은 엄청난 차이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