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2년.
"곽재우."
"예. 전하."
"너는 이제부터 전장의 상황을 망원경으로 보고 관측하도록. 그리고 너의 수하들은 지도를 가져와 전장의 상황을 즉시 보고하라."
"예. 전하."
균의 명이 떨어지자 곽재우와 그가 지휘하는 병사 세 명은 미리 준비해둔 지도를 꺼내서 막사 중앙의 판위에 고정시키고 조그마한 깃발이 달린 말들을 꺼내어 배치했다. 준비가 끝난 곽재우에게 균은 준비해둔 망원경을 내주었다. 깜빡 잊고 유리를 안 만든 바람에 수정을 깎아서 만든 조선 최초이자 최고 가격의 망원경이었다.
'이거 비싼 거니까 깨트리면 알아서해.'
이런 뜻이 담긴 균의 따스한 시선을 받으며 곽재우는 망원경을 받아서 막사 옆의 망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청군과 백군의 배치상황을 막사 내에 알렸다. 그러자 병사들은 긴 막대를 꺼내더니 그것을 이용해서 말들을 움직여 지도상에 현재의 양군 대치 상황을 그대로 재연했다.
"이제 준비가 끝났구려. 경들이 이 상황판을 보고 어떻게 하면 청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기탄없이 이야기를 해보시오."
균의 말이 떨어졌지만 곽재우의 외침만이 들릴 뿐 막사 안의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전장의 지도는 균이 며칠 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비록 현대의 지도에는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선시대 지도치고는 매우 정밀한 것이었다. 거기에 실시간으로 청군과 백군을 상징하는 말들이 오가고 있으니 장수들은 새로운 방식에 놀라서 조용히 침만 삼키고 있었다.
"……."
"청군 주작부대, 현무부대 좌우측으로 각각이동! 청군 백호부대, 청룡부대 중앙의 황룡부대와 주작부대, 현무부대 사이로 각각 이동!"
"……."
"청군 백호부대와 청룡부대 일부가 주작부대와 현무부대와 연결. 일(一)자진 편성중!"
"예상대로 학익진이군."
막사 안의 고요를 깨뜨린 인물은 균이었다. 과연 균의 말대로 막사안의 상황판은 청군이 학익진을 펴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었다. 사실 청군은 아까 전부터 학익진을 펴고 있었는데 역시 훈련이 안된 농민군답게 지금까지도 편성중이었다. 그것을 백군은 너그러운 아량으로, 아니 지금 치면 훈련이 바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아서 참고 기다려주고 있었다.
"적 황룡부대, 주작부대, 현무부대 돌출. 학익진 편성중!"
"청군이 학익진을 짜고 있다. 경들은 왜 말이 없는가? 어서 대책을 말하라."
"전하. 신 한성판윤(정2품) 김수문이 아뢰옵니다. 학익진은 그 말대로 학이 날개를 피고 있는 형상의 진으로 아군이 적군보다 많거나 수군에서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을 하는 유용한 진이옵니다.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은 내금위가 우세하지만 전체 전력은 당연히 청군이 우세하니 청군의 대형은 공격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포위진형이 알맞사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익진은 가장 청군에게 적합한 진이니 빨리 공세를 펴야 합니다."
"전하 신 오위장(종2품) 조안국이 아뢰옵니다. 학익진은 전방의 적에 화력을 집중하기에 공격력은 뛰어나지만 측방이나 후방의 적에는 약점을 지니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학익진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별동대가 필요하지만 백군에 그런 별동대를 운용할 전력이 없으니 학익진의 목을 꺾고 중앙돌파를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옵니다.
특히 청군의 주력은 번상병으로 구성되어 그 능력에 한계가 있어 학의 머리부분에 있는 청군의 정예부대가 빠르게 무너지고 백군이 중앙돌파에 성공한다면 양 날개의 청군은 알아서 괴멸할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내금위장에게 명하여 중앙돌파를 명하시옵소서.
"경들의 말이 지당하다. 하지만 영상도 이미 지난 을묘년에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인물이다. 당연히 우리 백군이 손쉽게 청군의 전열을 돌파하는 것을 묵과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고 다른 비책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영상이나 그 밑의 여러 대신들도 그 정도의 이치는 알고 있을 터이니 함부로 돌격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사람의 말대로 현재 학익진을 격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앙돌파였다. 학익진의 장점이자 약점이 바로 중앙의 돌출부인 학의 머리인데 잘하면 상대의 전열을 흔들고 상대를 교착 견제하여 양 날개의 공격이 수월해지는 장점이 있지만 돌출부가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앙돌파를 당하는 약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이순신도 거북선을 학의 머리로 삼아서 전투에 투입하고는 했다.
균이 병력투입을 반대하는 이유도 그와 같아서 보병인 내금위가 열심히 돌격하다가 지쳐서 학의 머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양 날개의 협공을 받아서 포위 섬멸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금위의 주력병기인 56식 소총이 있다면 그런 전술에는 큰 상관없이 그냥 내금위가 이기겠지만 실전도 아니고 훈련 상황에서 총병을 동원하기 힘들고 또한 앞으로 몇 년은 신하들에게 안 보여주는 편이 낫기에 그냥 전투에 임했다가 골치가 썩고 있었다.
"백군. 품자진에서 돌격대형으로 변경중!"
"청군. 학익진 편성완료! 백군 쪽으로 접근중!"
"……."
균의 반대로 중앙돌파가 무산되자 무장들 사이에서는 별 의견이 없었다. 하긴 제대로 된 무장들은 대부분 국경에 나가서 여진족과 왜구를 막고 있었고 한성부에 남은 무장들은 국왕인 균이 한성부를 비운 상황이라서 비상경계를 펴고 있어 상당수가 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현재 균의 휘하에는 쓸만한 장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균은 혀를 차면서 결국 자신이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내금위장에게 전령을 보내고 깃발신호도 보낸다. 백군은 청군과 오백 보(600m)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청군의 돌격이 시작되면 즉시 후퇴하라. 그리고……."
어느새 학익진을 편성한 청군 5개 부대 1만5천의 대군은 백군 3개 부대 3천명을 멀리서 반포위했다. 그러나 청군의 지휘관인 병조참의(정3품) 이희검은 자신들이 진을 완성하고 진출해 왔는데도 백군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서 옆에 있던 오위도총부 도사(종5품) 김도영, 이상헌 등에게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왜 백군의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하나? 이만하면 중앙돌파를 해오는 것이 정석이 아닌가?"
"제 생각도 같습니다. 영감."
"아무래도 우리가 기마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요?"
"설마? 우리의 기마대라고 해봐야 말을 가진 하급지휘관들을 모아서 급조한 부대가 아닌가? 그 사이 첩자가 오갈 리도 없고 다른 물자를 받지 않았으니 눈치를 채기란 보통일이 아닐 것인데……."
영의정 이준경과 대신들이 머리를 모아서 만들어낸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압도적인 병력으로 적을 공격하기 쉬운 학익진으로 백군을 압도하면서 공세를 펼친다. 그러면 백군은 중앙돌파로 이를 해결하려고 할 것인데 돌격으로 지친 백군을 기마대로 저지하면 양날개를 움직여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두 가지를 전제로 한 것이다. 하나는 백군이 학익진을 펼칠 때까지 지켜보아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백군의 별동대가 없다는 가정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대로 백군은 청군의 포진을 기다려주었으며 만약을 대비해서 깔아둔 척후들도 백군의 별동대가 없다는 정보를 전해주고 있었다.
"주상…… 험험험. 아니 내금위장은 무슨 생각으로 돌격을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그대로 접근만 해도 백군은 괴멸할 터인데……. 설마 너무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인가?"
"영감. 이대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공격군이고 백군은 수비군의 설정되어 있으니 백군은 우리를 이 자리에 묶어두기만 하여도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 곳의 지형은 매복이나 기습, 우회기동이 거의 불가능한 평야지대이오니 압도적인 군세를 이용하여 공세를 펴시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저도 이도사의 말에 찬성입니다. 아군이 비록 번상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전쟁은 기세싸움입니다. 우리가 진격하는 모습만 보아도 백군은 위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밀어붙이면 아군의 승리입니다."
"좋다. 전군 속보로 진격하라!"
이희검의 명령에 따라서 청군은 약 1천보거리의 백군을 향해서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리 걷는 걸음일 뿐이고 단숨에 공격하지는 못했다. 거의 1.2Km의 거리를 사람이 달렸다가는 지쳐 쓰러질 가능성이 높은데다가 무엇보다도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의 대열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의 진형도 한참의 시간을 소비해서 만들어 낸 것인데 백군앞에서 진형을 짜다가는 백군의 돌격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청군은 신중히 그리고 비장의 한 수인 기마대를 숨기면서 백군에게 접근했다.
"대단한 위압감이군."
"영감. 동감입니다."
내금위장 곽흘과 부장 남창완의 말처럼 1만5천명이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었다. 말이 일만 5천이지 한 명의 병사가 1m를 차지한다고 해도 5열 횡대라고 하면 3Km이다. 3Km에 달하는 인간장벽이 대오를 맞추어 접근해 오는 모습은 위에서 보면 좋은 구경거리였지만 백군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내금위는 조선군 최정예의 병사들이었고 실전이 아니라 훈련 상황이었기에 병사들의 동요는 덜했다. 오히려 장수들이 학익진 파해의 정석인 중앙돌파를 하지 않는 것에 불안해 하고 있었다.
"청군. 거리 800보까지 접근."
"청군. 거리 600보까지 접근."
"청군. 거리 500보까지 접근."
"전군은 대오를 유지하면서 속보로 후퇴하라! 절대로 진형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곽흘의 지시에 따라 백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동한다고 진형이 상당히 무너져버린 청군과는 달리 백군의 후퇴는 빠르지만 진형은 흩뜨려짐이 없었다. 한편 청군의 지휘부는 백군의 질서정연한 철수에 당혹해 했다. 그들은 청군이 진격해서 간격을 줄이면 백군의 중앙돌파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우리의 진격을 저지하여 승리하려는 지연작전인가?"
"아무래도 우리는 공격군입니다. 저런 식으로 백군이 시간을 끌어도 판정은 백군의 방어전 성공이 됩니다."
"아군의 이동속도를 더 빨리 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부정적입니다. 그러다가는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진이 무너집니다."
"그렇다고 기마대를 출격시켰다가는 단번에 무너져 버릴 텐데……."
청군은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백군의 뒤를 비슷한 속도로 추격했다. 그러다 보니 백군과의 거리를 조금씩 줄일 수 있었고 그 대신 청군의 대열은 많이 흩어져 버렸다. 백군과의 거리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한 청군의 이희검은 돌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양군의 거리는 약 300보. 그 정도면 기마대가 먼저 돌격하고 보병대가 뒤를 따르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인들이 현재에 비해서는 단신이었다고는 하지만 밥을 많이 먹고 힘든 농사일로 단련된 만큼 그 체력은 더 뛰어났다. 그래서 그 정도의 거리라면 돌격을 해도 싸울 힘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이희검은 그냥 활로 처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화살촉이 없는 훈련용 화살을 쏘아봐야 백군에게 별 피해는 못줄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기마대 돌격으로 백군의 후퇴를 저지하고 보병대로 끝장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거기다 훈련 예정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서 이희검 등의 마음은 급했다. 결국 청군의 지휘부는 전군 돌격을 명령했다.
"전군 돌격!"
"와아아아!!!"
1만5천의 병사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달려나가자 지축이 흔들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큰 울림이 있었다. 어느새 청군과 백군은 훈련장의 서쪽 끝에 가까운 균의 막사 인근까지 와 있었기에 그 소리에 전황판을 보고 있던 균과 무장들이 모두 막사 밖으로 나와서 양군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청군의 진형에서 출발한 이백여기의 기마대는 순식간에 백군의 뒤를 따라붙었다. 기마대는 시속 8Km의 속보로 후퇴하던 백군을 시속 40Km 속도로 따라왔다. 순식간에 기마대는 순식간에 백군의 최후미에 육박했지만 그 대신 청군 보병대와는 수백 보의 차이를 보였다.
"던져라!"
"치이이이~. 꽝!"
후퇴하던 백군이 반전해서 던진 것은 죽폭(대나무 폭탄)이었다. 이미 균이 비금도 시절에 쓴 바가 있는 죽폭은 청군 기마대의 앞쪽에서 맹렬하게 폭발했다. 하지만 청군 기마대에서 한참 앞쪽에 던지는 바람에 기마대에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못했다. 그러나 간접적인 피해는 상당했다.
"히이잉~!"
죽폭이 터지는 소리와 바람에 풍겨오는 화약냄새에 말들이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한 것이다. 말은 의외로 겁이 많은 동물이라서 군마로 쓰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아니면 결정적인 순간에 혼란에 빠지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청군의 군마도 화약의 소리와 냄새에 견디는 훈련을 받아야 했지만 아직도 조선군의 일반부대에는 화약을 구경하지 못한 병사가 태반이었다.
왜구를 막는 수군이나 여진족을 막는 북방군이 아니라면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수들도 화약무기에 대해서 무지한 시점이었으니 말에게 비싼 화약을 소모해가며 화약에 놀라지 않게 하는 훈련을 시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죽폭 몇 십 개에 청군 기마대가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전군 돌격대형!"
어느새 정예한 백군은 도망가기 전의 돌격대형으로 다시 돌아왔다. 역시나 상비군다운 움직임이었다. 속보로 도망갈 때도 대오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군대이니 그 정도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전열을 정비한 백군은 구령에 맞추어 앞으로 나갔다.
"왼발! 왼발!"
고급 병장기를 갖추고 복장까지 완전히 통일된 백군이 지휘관의 구령에 맞추어 청군쪽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청군 기마대는 전멸로 판정되어 옆으로 밀려났고 기마대의 전멸을 지켜보던 보병대는 군기가 엄정한 백군이 위압적인 자세로 다가오자 크게 당황했다. 내금위가 한성부내 폭동에 대비해서 연습한 폭동진압진의 위력이었다.
거기다 청군은 방금전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을 옆에서 다독거리고 지휘해야할 하급 지휘관들을 기마대로 차출했다가 다 잃어버린 상태였다. 3천의 병사들이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서 점차 다가오자 청군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지고 지휘관들도 당황했다.
"영감. 폭약을 사용한 것은 규정에 어긋난 것이 아닙니까?"
"화약이 부족하고 사고가 많아서 그동안 암묵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지 그런 규정은 없네."
"하지만!"
"무얼 하는가?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돌격시키게! 1만5천의 대군이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서 무너질 수는 없지 않은가?"
"영감, 하지만 병사들을 통제하는 것도 벅찬데 돌격이라니요."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무너지는 것.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휘관의 책무야. 전군 돌격!"
"……."
이희검은 비장하게 돌격을 외쳤지만 병사들은 혹시나 내금위가 다시 죽폭을 던져서 몸을 상하지 않을까? 또는 접근했다가 실수로 맞아서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몸을 사렸다. 더욱이 옆에서 병사들을 지휘할 하급지휘관들이 다 사라진 상황이고 모두들 돌격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먼저 나설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희검 등은 진지하게 후퇴를 고려했지만 그 역시 힘들었다. 먼저 백군의 추격을 뿌리치기도 힘든데다가 훈련이 안된 병사들이 달아나다가 서로 밝아서 죽는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임진왜란의 용인전투나 병자호란의 쌍령전투에서도 적군에 의한 사망자보다 아군에 의한 압사사고가 더 많은 조선군이다. 아무리 훈련이라도 부대통제가 안되면 그런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실전부대 지휘관 이희검이 군의 진퇴를 두고 주저하고 있을 때 훈련장 동쪽 끝의 막사에서는 영의정 이준경등 조정대신들이 뒤늦은 전황보고를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훈련이 서쪽에서 벌어진데다가 균처럼 망원경도 좋은 지도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쪽에 보고 된 정보는 매우 늦은 것이었다.
"뭐? 병조참의가 돌격을 하고 있다고?"
"예. 대감. 병조참의 영감은 기마대로 백군의 후퇴를 방해한 후 전군을 투입하여 섬멸하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휴~! 함정이군."
전령의 보고를 받은 이준경은 한숨을 쉬며 함정이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덕양군 이기가 물었다. 참고로 덕양군 이기는 중종의 다섯 번째 서왕자로 균의 숙부이다. 균과 제법 사이가 좋아서 현재 종친부를 관장하는 자리에 있었고 또한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직을 겸직하고 있었다.
"영상대감. 제가 듣기로는 청군의 압승인 듯한데 왜 그렇게 한숨을 쉬십니까?"
"무른 군사란 진퇴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오. 청군은 수는 많지만 훈련받지 못한 병사들이 많고 그들을 다스릴 군관들을 기마대로 차출했으니 군 기강이 많이 흐트러질 것은 뻔한 일. 가만히 있었으면 모르지만 군대가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대오가 무너지고 낙오병이 생기는 것이오. 하지만 상대는 훈련이 잘 된 정병이니 같은 거리를 움직였다고 하면 청군이 불리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소이다."
"영상대감의 말씀을 들으니 무척 큰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즉시 전령을 파견해야 되지 않을까요?"
"덕양군대감의 말씀도 옳소이다. 하지만 그곳과 이 막사는 거리가 멀어 이미 승패가 났을 것이오. 이제 훈련도 끝났으니 우리도 그만 돌아갑시다. 아마도 주상전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내주실 것이니 술과 음식이나 먹으로 갑시다. 허허허."
이준경과 대신들이 막사를 떠날 무렵에 이미 백군은 청군의 바로 앞까지 진출했다. 결국 이희검이 훈련종료의 지령을 전군에 내리면서 그 해의 대열은 사망자는 없이 부상 370여명의 피해만 보고 막을 내렸다. 평소라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으로 매년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내던 것에 비하면 접전이 없던 관계로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훈련이 끝나자 균은 자비를 털어서 훈련에 참가한 병사들를 배불리 먹이게 하고 훈련장 근처에서 대신들과 무장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작은 연회를 베풀었다. 하지만 균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자신의 친위군인 백군이 이긴 것은 기쁘지만 청군역시 자신의 군대인 조선군이었다. 반에 반도 안 되는 군대에 눌려서 자멸하는 그 군대가 조선의 주력군이었으니 균은 이들을 어떻게 훈련시킬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술이 아닌 감주를 마시는 데도 균은 멍한 느낌이 들었고 기름진 안주로 쓴 맛이 났다. 밖에 나와서 그것도 훈련 때문에 늦게 먹는 음식들인데도 그랬으니 균은 입맛이 쓰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자기의 기분 안 좋다고 연회를 망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균은 애써 웃으며 신하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날씨가 춥고 또 야외라는 장소의 한계가 있는지라 그들의 연회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따뜻한 술과 음식으로 몸을 데운 균과 신하들은 빨리 연회를 파하고 한성부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막 행차가 출발하려는 순간 한성부 쪽에서 한 필의 말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말에 타고 있던 선전관 도지철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서 서찰을 도승지 정인기에게 전했다. 그 서찰을 천천히 읽던 정인기는 크게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지더니 다시 한번 서찰을 빠르게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들으라는 듯 균에게 큰 소리로 고했다.
"전하. 제주목사 이진의 장계가 비변사에 접수되었사온데 왜구의 수장인 도진의구라는 자가 제 딸과 재물을 조공으로 바쳐왔다고 하옵니다. 전하의 지극한 위엄에 왜구의 무리가 알아서 머리를 숙이고 조공을 바쳐왔으니 이는 국가의 큰 홍복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신하들은 자세한 제반 사정을 모르지만 일단은 정인기의 선창에 따라서 균에게 축하인사를 했다. 하지만 정인기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균은 이번 일을 꾸민 주모자이니 이때쯤 이번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균은 그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하여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이번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환도를 서둘렀다.
그렇게 균과 대신들이 급히 떠난 후에도 왜구가 자신들의 왕에게 조공을 받치고 머리를 숙였다는 소문은 훈련장에 남아있던 병사들 사이에 무섭게 번져나갔다. 그래서 소문은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3만의 병사들에게 퍼졌으며 심지어는 부상을 입은 병사들도 잠꼬대로 중얼거릴 만큼 그들의 입에 올랐다.
이것이 균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면서 전국에서 3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한성부로 불러들여 대열을 연 이유 중에 하나였다. 훈련을 마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방방곡곡에 왜구를 위엄으로 항복하게 만든 자신의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균은 잔머리 하나만큼은 조선 최고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