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2년.
'일본국 녹아도 성주 도진의구가 조선국 국왕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소인은 일본국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구주(큐슈)남단의 녹아도성(가고시마성)과 그 일대 1천여 리를 다스리는 도진의구라고 하는 자입니다. 그간 문화의 나라 조선국과 그 조선국을 다스리시는 조선국왕 전하를 흠모해 오다가 이제야 글을 올립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일본국은 국왕 족리씨(아시카가)의 힘이 약하고 그 영토가 넒어 약 66개국 전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주에 근거를 둔 왜구가 발호하여 상국의 남부지방을 어지럽히는 한편 본 녹아도성 일대까지 공격을 하여오는 등 그 세력이 왕성합니다.
이에 소인도 3만의 정병을 동원하여 왜구를 뿌리뽑아 상국의 근심을 덜고 저희의 우환거리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저희 근처에서 세력을 잡고 있는 대우씨(오토모)는 그들과 친하여 저희의 토벌을 반대하고 오히려 10만의 대군으로 저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대우씨의 위협을 겨우 견디는 수준이라서 왜구를 토벌할 능력은 없으나 상국 조성과 조선국왕 전하께 저희의 진심을 알리는 뜻에서 약소한 선물을 바치나이다. 전하께서는 소인의 이 선물을 초라하게 여기지 마시옵소서.
융경원년 10월 녹아도 성주 도진의구.'
시마즈 요시히사가 쓰고 중간에 박수익이 조금 손을 본 서계는 원래 예조에서 관장을 해야 하지만 그 사안이 독특하여 전례를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 따라서 비변사를 거쳐 그날 저녁 조강시간에 주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논의 되었다.
"경들도 이미 제주목사의 장계를 보아서 대강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번에 도진의구라는 자가 은과 후추를 바치고 제 딸도 바쳤다면서요?"
"신 호조판서 홍담이 아뢰옵니다. 이번에 도진의구가 바친 공물은 은 1만 냥과 후추 1천근이나 되고 그밖에도 특산물 약간과 함께 왜녀 십여 명이옵니다. 이중에 한 명이 도진의구의 딸이고 나머지는 그 딸을 돌보는 몸종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원래 시마즈 요시히사가 바친 공물은 후추 1천근과 약간의 토산품이 전부였다. 후추 1천근도 상당한 가격인데 거기에 은 1만 냥까지 바치면 균이 약속한 화약의 가격보다도 더 많은 액수라서 오히려 시마즈가 손해였다. 여기에 균이 시마즈의 국력을 과장할 목적으로 도자기 판매대금으로 받은 은 1만 냥을 같이 호조에서 수령하게 했다.
"그 정도면 상당한 양의 조공이구려. 그래 왜녀와 사신일행은 지금 어디쯤에 있다고 하오?"
"일단은 전하의 명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라서 아직 제주도에 머물고 있사옵니다."
"그럼 즉시 그들이 올라올 수 있도록 허락을 내리고 해당지역의 관리들에게 이를 통보하여 사신의 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시오.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저들에게 무시당할 짓을 하는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과인이 엄히 다스릴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고 이번 녹아도성주의 서계를 보아하니 왜국내의 혼란이 심각한 상황인 듯하오. 이미 저들의 왕인 족리씨가 그 세력을 잃어 통제가 안되는 바람에 우리 조선의 남부 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처리하지 못한다니 이는 우리 조선의 안위에도 영향이 있는 문제이니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대처를 해야 할 것이오."
균은 이번 조공문제를 여러 번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하나는 조공을 통하여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선조정이 국내문제뿐만 아니라 국제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시마즈와의 비공식적인 교역을 합법화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균은 저녁이 늦어가는 데도 현 왜국의 정세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하. 신 우의정 홍섬이 아뢰옵니다. 비록 왜국의 문제가 우리 조선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만 왜국은 우리 조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미개한 족속들이 사는 곳이옵니다. 소신이 듣기로 왜인들은 책을 읽고 학문을 논하는 것보다 칼을 들고 상대를 베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니 그런 자들의 일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전하의 위엄에 누가 되는 일이옵니다.
또한 그런 곳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다가는 내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니 동래부사와 경상도의 수군절도사 등에게 이를 알리고 그와 관련된 일을 맡기는 것이 상책 이옵고 이 자리에서는 논의하지 않는 것이 옮습니다."
"본시 왜국의 일을 우리 조정에서 논의하는 법도는 없었으나 이번 일은 그런 전례와는 경우가 다르오. 선대왕이신 명종대왕 시절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라도가 큰 피해를 입었고 과인의 조부이신 중종대왕 시절에는 삼포와 사랑진에 왜구가 침입하는 큰 일이 있었소. 이에 희생된 군사며 백성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조정에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누가 대책을 세우겠소?"
"전하. 신 영의정 이준경이 아뢰옵니다. 국초에 이미 세종대왕께오서는 남부해안을 어지럽히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종무를 파견해 대마도를 정벌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북방으로는 최윤덕과 김종서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정벌하여 북방의 큰 근심을 던 적이 있습니다. 이번 일은 그와 같이 생각해도 무방하옵니다."
"영상의 말이 극히 지당하오. 따지고 보면 지난번 북방의 서해평에서 있었던 일은 그와 같은 근본적인 대비책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겠소? 물론 우상의 말처럼 과인이 그런 오랑캐들의 무리에 신경을 쓰는 것은 좋지 않으나 그 오랑캐들이 우리 백성들을 침노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더욱 좋지 않소.
이번에 도진의구가 서계와 함께 자신이 위치한 구주일대의 여러 세력에 대한 정보를 같이 보내왔소. 헌데 과인은 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경들도 같이 들어보도록 하시오. 도승지는 어서 그것을 읽으라."
조선의 대외관계나 인식은 문제가 많았다. 조선은 국초이래 자신들을 세계에서 2번째 가는 강대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강국인 명나라에는 사대하고 나머지 여진이나 왜는 조선의 아랫줄에 놓이는 세력으로 생각하여 교린책을 펼쳐 사대교린을 외교의 기본방침으로 삼았다.
그런데 명나라에 대한 외교는 앞에 나왔던 것처럼 굴욕적인 모습이 많았고 여진족과 왜에 대한 인식은 균과 신하들의 대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사람도 아닌 것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조선중기 여진과 왜가 국가체제를 확립하여 침공을 해오는데도 예전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가 박살이 나는 것이다.
일예로 조선이 왜국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가 하면은 당시 천황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냥 명나라가 아시카가막부의 쇼군에게 '일본국왕'의 벼슬을 내리니까 '왜국은 일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왜왕은 아시카가 즉 종리씨이다.'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임진왜란 직전 파견된 통신사들이 당시의 일본천황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균이 이번에 시마즈 요시히사의 서계에 별첨으로 규슈일대의 영주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같이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 병사들의 수를 본다면 조금 정신을 차리고 왜국에 대한 경계심을 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예. 전하. 도진의구가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구주에는 크고 작은 세력이 10여개가 존재하지만 서로 동맹을 맺거나 흡수하여 크게는 3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온 도진씨족(시마즈기)으로 약 3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세력은 남쪽에 존재합니다. 서쪽에는 용조사씨족(류조지가)이 있으며 그 군세는 역시 3만 이며 규슈의 북쪽과 동쪽에는 대우씨족(대우가)이 있으며 그 군세는 총 1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십만! 도승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는가? 십만의 군대라니? 일개 영주 따위가 10만의 군대를 보유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좌상대감. 소생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사실이옵니다. 거기다 그들의 말로는 그 외에 종속된 세력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의 군세를 합치면 구주일대의 왜군은 총 20만에 이릅니다. 이런 군대가 뒤를 받치고 있었으니 저들이 우리 조선을 우습게보고 공격을 해 왔던 것이지요. "
"이십만!"
"그나마 왜는 영토가 넒어서 7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지는데 구주는 그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왜국의 전체 군사력은 140만 대군이라는 결론이……."
정인기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아연질색 했다. 조선의 전성기였던 세종과 세조당시의 조선의 군사력이 정병과 보인을 합쳐서 약 80만에서 100만이었다. 그러나 중종이후 조선의 군사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현재는 50만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장부상의 조선군은 약 20만이지만 실제 수는 10만이 안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이웃 나라인 왜국이 내전으로 단련된 140만 대군을 가지고 있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사열로 인해서 조금 피곤해하던 신하들을 이제는 모두 제정신을 차린 듯 균과 정인기의 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명나라의 군대가 명목상으로는 350만, 아국의 군대가 명목상으로는 100만인 것을 감안한다면 별 문제는 아니지만 왜국은 지난 백여 년간 전쟁을 통하여 많이 단련된 정병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군적(징병대상자 명부)이 충실하여 그 군대를 거의 동원할 수 있는 반면에 명나라와 아국의 군대는 그간의 평화로 인해 병사들을 훈련되지 않고 군적에 누락된 자들이 많아서 실제 군사력은 2할이나 3할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가 너무 신경을 끄고 살아서는 곤란하오. 왜국의 군대가 과연 140만이나 되는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하는지 알아보아야 할 때이오. 이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다면 경들은 지체하지 말고 말해보시오."
당시 동북아 삼국의 군사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있기는 있지만 그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국의 군대가 140만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수치였다. 이는 모두 균이 꾸며낸 이야기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신하들에게 균이 주는 충격요법이었다.
실제 왜의 군사력은 약 40만 전후로 예상된다. 히데요시가 시마즈 정벌전과 호죠 정벌전에
투입한 군사력이 수십만이나 되었고 또한 그 정도의 병력을 조선침공군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본토를 수비할 수비군을 합치면 약 40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시기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실제 임진왜란 시기의 군사력을 계산해본다면 조선에 침공한 왜군은 모두 지방영주의 군대로 1군에서 9군까지 총병력 15만 8800명이었다. 여기에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에 주둔시킨 군대가 있으니 약 25만의 군대가 있고 거기에 히데요시의 본군이 10만이 후방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으며 히데요시의 거성인 오사카를 수비하는 군대가 3만이었으니 히데요시군만 13만 이상, 덕천가강등 동쪽의 영주들은 참전을 하지 않거나 소규모 참전에 그치는 바람에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거의 50만 정도의 군사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1590년 히데요시가 전국의 토지를 조사한 태합검지에 따르면 왜의 전체 석고는 약 1800만석 정도인데 1만석당 군사 300명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이에 따르면 54만도 가능하다. 따라서 당시 왜의 전체군사력은 총 40만에서 50만정도로 계산되는 것이다. 균은 여기에서 앞쪽에 1을 하나 더 붙여서 공개를 했고 조정의 대신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전하. 신 예조판서 이황이 아뢰옵니다. 본시 왜구의 무리는 속이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라 그들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왜구의 무리가 그 정도의 세력이라면 이미 우리 조선에 해악을 끼쳐도 끼쳤을 것이니 좀더 조사한 연유에 대책을 세우시는 것이 옳을 듯 하옵니다."
"전하 신 이조참판 조식이 아뢰옵니다. 왜구의 무리가 거짓을 고한다고 하여도 140만 대군이라고 말을 하려면 그에 상응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옵니다. 특히 저들은 칼을 들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무리들로 그 싸움실력은 이미 여러 번의 난동때 경험을 한 바가 있습니다. 속히 대책을 세우시옵소서."
"과인의 생각도 이조참판과 같소. 현재 우리 조선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궁핍해져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오. 특히 세조대왕 이후로 많은 신하들이 명나라의 군사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하여 군대를 길러두지 않은 바람에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그 병사가 140만이던지 아니면 14만이던 우리 조선의 피해가 엄청날 것을 자명한 일이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혹 어리석은 신하들은 왜군이 침노하면 명나라의 대병이 구원을 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현재 명나라의 상황은 최악이오. 몇 년 전 명나라 장수 척계광에 의해서 평정이 되기는 했지만 절강성일대가 왜구에게 함락이 된 적이 있었고 현재는 북방의 알탄 칸이라는 자가 세력을 떨치며 명의 만리장성을 공격하고 있소. 따라서 왜군이 대규모로 침공을 해온다고 해도 아국은 자력으로 적을 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균의 말대로 조선 초기의 강력했던 군사력은 세조 때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를 우려한 왕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국인 명나라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앞세운 신하들의 반대와 당시 조선의 국력저하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거기에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과 신하들의 보이지 않은 알력이 있기는 했지만 국가적으로는 큰 실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공세로 조선의 방어선이 계속 남으로 후퇴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왜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 조선의 우방인 명나라도 왜구와 몽골족의 침공으로 도저히 조선을 지켜줄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 왜의 군사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정보가 입수된 이상 신하들도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대열을 보아하니 이를 막아할 우리 조선군이 너무 한심했소. 고작 전장을 조금 이동한 것뿐인데 전열이 흐트러지고 1만 5천의 대군이 3천의 기세에 눌려서 허둥거리는 모습에 과인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소. 이래서는 왜군이 고작 1만 4천이라고 해도 7만의 우리 군대가 밀려버릴 것이니 과인이 어찌 편하게 잠이 들 수 있겠소?
이에 과인은 현재의 오위도총부를 새롭게 개편하여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왜나 여진이 감히 이 나라를 넘볼 수 없게 해야 할 것이오. 이에 대한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