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즉위 3년인 서기 1568년 정월.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올해로 17세가 된 균은 어느새 턱에 하나 둘씩 나기 시작하는 수염을 하나씩 뽑으면서 도승지 정인기가 올려준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염을 뽑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정인기가 올리고 간 문서 때문인지 균의 이마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그러나 수염을 다 뽑은 뒤에도 균의 이마에 있는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균의 손에 들린 문서가 바로 조선의 국방분야에 대한 정보가 잘 정리된 보고서였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를 읽고난 후 균은 조선의 국방분야를 단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고비용 저효율의 표상이군.'
균은 입맛이 무척 썼다. 당시 조선조정의 공식문서상에도 국방의 문제점은 충분히 제기되고 있었고 신하들도 이에 대한 대책을 자주 논의하고 있었지만 균은 박규남(박수익의 이름을 바꾸었음.)이 조사한 정보와 백과사전의 지식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더 객관적으로 조선군의 현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병농일치, 양인개병의 원칙에 따라서 모든 양민들은 16~60세까지 의무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되는데 여기서 나오는 군인들을 정병이라고 한다. 다시 정병은 크게 현역인 정군과 예비인 봉족으로 나누어지는데 정군은 매년 9개월은 농민으로써 일하지만 3개월은 군인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이고 봉족은 평시에는 경제적으로 정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다가 전시에는 병사로 동원되는 사람들이다.
조선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과 지방군인 향군, 그리고 해군인 수군으로 나누어지지만 이 세 부류 모두 정병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으며 더욱이 육군의 경우에는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구분자체가 확실하지 않다. 중앙군이면서도 지방군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다가 중앙군과 지방군을 병사들이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의 중앙군인 오위는 그냥 조선시대에 생긴 군사조직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은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가 변화한 것이 오위이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2군 6위에 자신의 사병을 합해 10위로 편제하고 그 후에 건국 초기의 불안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2위가 추가되어 총 12위로 편제되었다가 문종 때 이를 5사로 편제하고 세조 때 오위제도를 확립하여 조선 전기의 중앙군이 성립되었다.
중앙군인 오위의 병력을 살펴보면 상당한 대병력이다. 먼저 의흥위에 갑사 1만8400명, 용양위에 별시위 1500명, 대졸 3000명, 호분위에 팽배 500명, 충좌위에 파적위 2500명, 충무위에 장용위 600명, 충순위 600명 등 5위의 총병력은 대략 2만 7100명이지만 오위에 편제가 안 된 병력이 일부 존재하기에 모두 합쳐 약 3만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정병 4만 2천명이 중앙군에 소속되어 조선의 중앙군은 총 7만을 넘기는 대병력이다.
물론 병농일치제 덕분에 7만 대군이 향시 주둔하는 것은 아니고 거의 모든 부대가 교대로 복무를 했다. 예를 들면 정군은 8개 부대로 나누어져 근무를 했기에 평시에는 42000/8= 5250명이 한성부에 머물렀던 셈이다. 거기에 지방에 파견되는 병력이 상당하여 실제로는 약 1만 명 정도가 한성부를 지키고 있었다.
조선의 지방군은 크게 유방군과 북방군이 있다. 북방군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최정예 군대로 향시 여진족과 접전을 벌이는 바람에 접경지역의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다 뽑아서 구성한 군대이므로 그 수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 북방군은 조선군중에서도 상당히 정예한데다가 장비도 충실하고 기병의 비율도 높아서 중앙군과 비견할 만한 전력을 자랑한다.
조선초기의 영진군과 수성군을 합하여 만들어진 유방군은 나머지 5도(경기도 제외)를 지키는 군대로 56개여 7천명의 병력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유방군은 4번 교대를 원칙으로 하기에 실제로는 약 2만 8천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과 북방군을 합치면 7~8만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중부와 남부의 지방군은 그 수가 무척 적어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유명한 진관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정군뿐 아니라 봉족들까지 군대에 가세하게 되어 그 병력이 상당하다. 성종 8년에는 정군 14만 6339명, 봉족 36만 2105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중에서 정군은 여러 가지 편제가 있으니 제외하고 나머지 봉족만 진관체계 하에서 동원해도 약 36만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수군의 경우는 그 기원은 기선군이지만 세종 때 시위패의 일부를 편입하여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었고 세조이후로 기선군에서 수군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완전히 독립됐다. 수군의 경우는 다른 정군들처럼 1년에 3개월을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2번 교대를 했기 때문에 1년에 6개월을 근무해야 하는데도 그 대우가 좋지 않았다.
현재 조선에는 총 11개의 수영이 있지만 이중에서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충청수영, 경기수영 이렇게 6곳을 제외하고는 해당 도의 관찰사가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약한 곳들이다. 그래서 경상, 전라, 충청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조선수군의 총사령관이 되는 것이다.
각 수영별로 판옥선의 숫자를 살펴보면 경상좌수영 75척, 경상우수영 75척, 전라좌수영 25척, 전라우수영 30척, 충청수영 30척, 경기수영 15척 등 총 250여척 정도였고 가타 사후선이나 협선 같은 배까지 합치면 수없이 많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조선수군은 총 5만 명 규모이지만 나중에 주력전선이 작은 맹선에서 큰 판옥선으로 바뀌었기에 편제인원도 조금 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선군은 대략 육군 15만, 수군 5만 이렇게 2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정규군인은 아니지만 대신 방위세를 내는 봉족 같은 인원까지 포함하면 56만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이다. 하지만 이 자료는 균의 시대로부터 훨씬 전의 자료이기에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더욱이 저 자료는 서류상에 편제된 병력의 수일뿐 실제와는 달랐다.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이일과 신립을 파견하여 왜군을 막게 했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이 이끌고 나간 군사가 3백 명이고 삼도순변사 신립이 이끌고 나간 군사가 3~4천명이었다. 그리고 그 군대가 무너지자 선조는 한성부를 지킬 병력이 없다는 핑계로 의주까지 열심히 달아났다. 규정상 평시 1만 정도의 중앙군이 실제로는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중앙군의 상황이 이러니 지방군의 상황은 더욱 심했다. 어떤 군영에 조선군 1만이 편제되어 있다면 이중 5천명은 장부상에나 존재를 하는 병사들이고 나머지 5천중에서도 수천 명은 그냥 군적에 이름만 올린 채 지휘관에게 뇌물을 주고 복무를 하지 않은 자들이며 나머지 수천 명은 뇌물을 바칠 돈이 없어서 군대에 복무를 하는 자들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조선의 군사력은 실제로는 채 반이 안 됐다. 실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최대한 동원해본 병력은 고작 17만이었고 이는 정군, 봉족 심지어는 군역의 의무가 없는 노비들까지 합친 수였다. 세종과 세조 때는 정군과 봉족이 80~100만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못해 애처로운 군사력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의 끝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군의 훈련 수준이었다. 먼저 조선군의 경우 16~60세까지 일 년의 4분의 1을 군인으로 복무한다. 훈련을 많이 받으니 이스라엘의 예비군처럼 강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군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훈련보다 작업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그래도 중앙정부에서 군사비를 지급하여 그 돈으로 군대가 운영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각 군영이 알아서 군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복무하는 병사들이 무기구입비와 복무지까지의 여행경비, 그리고 복무시 자신의 식사비까지 모두 부담하는 상황이니 군영이라고 해서 군자금이 충분할 리가 없다. 그래서 육군은 농사를 지었고 수군은 물고기를 잡는 것이 주 훈련내용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군사훈련이 제대로 될 리는 없다. 거기다 병사들이 일하여 얻은 소득을 군자금으로 사용하면 그보다 나았겠지만 대부분 부패한 지휘관이나 군관들의 호주머니로 사라졌다. 그 결과 무기는 창고에 버려져 녹슬고 비싼 화약은 관리를 소홀히 해 물에 젖어 못 쓰게 되었으며 판옥선은 썩어서 가라앉고 전마(기병이 타는 말)는 짐이나 나르는 신세였으니 감히 군대라 부르기도 힘들었다.
거기에 병사들을 이끌어 주어야 할 군사지휘관들 역시 문제가 많았다. 문치주의 국가 조선은 대대로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천시하는 바람에 군사권마저 문관들이 쥐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를 모르는 문관이 군사권을 쥐게 된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군자금을 빼돌려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물론 유능한 지휘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는 말처럼 당시 사회풍조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지휘관은 좌천되고 뇌물을 많이 바치는 지휘관이 승진을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능한 지휘관들이 그 뜻을 피지 못하게 되니 가뜩이나 약화된 조선군은 '이보다 더 약할 수는 없다.' 고 할 만큼 약해져 버렸다.
이렇게 조선군은 병력의 양과 질, 그리고 지휘관의 자질부족으로 인하여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괜히 섬나라 도적 떼에게 전라도가 유린당하고 번번이 여진족에게 패하여 영토를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만 해도 거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한심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비용도 엄청났다. 먼저 현역군인으로 복무하는 정군의 경우 일정기간 동안 생업을 포기해야 하고 그 경비까지 대야하기에 그 경제적 부담이 컸다. 그런데 정군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봉족들이 뇌물을 써서 그 의무에서 벗어나 정군의 부담이 커졌고 군대에서 군사훈련대신 힘든 노역을 강요하자 불만이 커졌다.
이에 정군들은 사람을 사서 대신 군대에 보내고 자신은 농사를 짓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시행하였는데 이것이 수포대역이다. 또한 지휘관이 돈을 받고 임의로 군역을 면제하는 방군수포가 유행하면서 조선의 군사제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대립할 사람이 부족하여 대립가격이 치솟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중종 때 이르러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된 조정에서는 방군수포를 양성화하여 매년 군포 2필을 받고 군역을 면제하기로 하였는데 이를 해당자 개개인에게 부담시킨 것이 아니고 군현단위로 부과한 것이 문제였다. 예를 들면 도망간 이웃집의 군포도 내야 했다는 말이다. 거기에 중앙에서 군포를 통합관리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군영에서 마음대로 군포를 걷어 군영에 군포를 납부해야 했기에 실제 부담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군포마저도 새로운 돈줄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 횡포를 부렸다.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와 60세가 넘은 사람의 서류를 조작하여 군포를 납부하게한 강년체,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던 황구첨정, 도망간 사람의 친척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던 족징 등이 그것이다. 얼핏 보면 조선 후기에나 있었던 일 같지만 이미 중종 때부터 조선은 후기의 특징을 들어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는 군역을 지고 있는 사람 중에 일부는 옛날처럼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농사짓고 고기잡이를 했고 대부분은 군포를 수십 필이나 부담하는 것이 예삿일이었고 공납제가 균의 개혁으로 폐지된 이후에 백성들의 가장 큰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민들에게 국방비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는 그 돈을 관리들이 중간에서 다 떼먹고 고철을 최신무기라고 사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니 균이 고비용저효율이라고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국방분야를 점검한 균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비금도에서 혹시나 조정의 토벌군이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이던 자신이 더욱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비금도의 3천 병력이면 토벌군을 격파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성부까지 진격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균이 즉위한지 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조선의 군사력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내금위라는 막강한 군사력이 확보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수는 고작 6천명. 최소 1만은 돼야지 중앙군 노릇이라도 대신할 텐데 아직은 국경에서 백성들이 외적에게 살해당해도 구경만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너무 심하군. 그냥 기존의 군대를 다 해산시켜 버리고 새로 만드는 것이 편하겠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신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난리가 날 테니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이번에도 단계적으로 개혁해 나가야겠지? 휴~!"
균의 개혁에 제동을 거는 것은 비단 신하들 뿐만은 아니다. 개혁으로 인해 손해를 입게 되는 기득권층과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을 모른 채 기득권층의 망언에 현혹이 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다.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가도 몸이 말들 듣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일 수 없다. 지금의 조선이 딱 그런 상황이다.
하긴 균이 하는 행동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는 해도 너무 파격적인 것이 많다. 요즘으로 치면 급진파를 넘어서 엽기적인 수준이다. 균이 보기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사회의 변화속도가 지금보다 느리던 4백여 년 전 사람들에게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른 행보였다. 그러니 균은 전통을 중시하는 당시 사회풍조에 맞추어 완급을 조절하면서 개혁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