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그렇게 균이 조선의 국방분야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장단점을 비교분석 해가면서 계획을 다듬고 있을 무렵 드디어 박규남이 시마즈의 사신 일행과 함께 한성부로 입성했다. 정확히는 사신일행이라기 보다는 시마즈 유메와 그녀를 따르는 시녀 약간 명을 중심으로 일부 호위무사가 따라온 정도에 불과하지만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는 항복을 청해오는 사절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균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을 보이고자 동대문으로 입경을 시켜 한성부의 최대 번화가이자 가장 큰 길인 운종로를 따라 경복궁으로 오게 하였고 호위 병력을 엄청나게 동원하여 이동속도마저도 늦추어 버렸다. 거기다 경복궁 앞에서는 일부러 일행을 기다리게 하여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키는 한편 자신이 이들에 비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치밀함을 보였다.
균과 조정은 요시히사의 서계를 이미 전달받았지만 다시 한 번 근정전에서 다시 한번 서계를 받는 의식을 치렀다. 원칙적으로 그런 왜인을 근정전에 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왜인이 스스로 항복을 청하는 의식이었기에 나라와 국왕의 이름을 빛냈다고 하여 특별히 근정전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행했다. 균이 신경을 많이 쓰는 바람에 누가 보면 왜왕이 직접 항복해 온 줄 알았을 정도였다.
그런 의식 뒤에 연회가 빠질 수가 없었고 제법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지만 정작 왜인들과 박규남은 신분이 낮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연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균은 왜인들을 동평관(왜국사신이 머물던 곳)에 보내서 거기서 따로 접대를 하게하고 조용히 박규남을 불러서 그 노고를 치하했다.
"수고가 많았소. 박 선전관이 이번 일을 잘 처리하여 과인은 기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과인이 걸핏하면 제 딸을 시집보내는 왜국의 풍습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제 딸을 화약 값으로 줄지는 몰랐소. 하긴 조그만 더 생각했어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과인의 생각이 짧아서 박 선전관을 고생시켰구려."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도 설마 딸을 내어줄지 몰랐사옵니다. 비록 도진의구가 왜구의 두목이지만 머리는 나쁘지 않은 듯하니 전하께오서 하시는 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하오나 너무 상대가 영리해도 전하의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사오니 소신이 최선을 다하여 도진의구를 감시하겠나이다."
"하하하. 박선전관의 말을 들으니 참 믿음직스럽소. 과인이 하려고 했던 말을 먼저 꺼내니 괄목상대(상대의 실력이 급성장함을 이르는 말)라는 말이 생각나서 매우 흡족하오. 먼 곳을 다녀와 피곤할 터인데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시오. 과인이 은급(하사금)을 두둑이 내릴 터이니 그 돈으로 한성부 근교에서 휴식을 취해도 좋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역시나 돈이 많은 왕인 균은 자신의 심복들에게도 두둔한 상금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권위를 돈으로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딴 생각을 하지 못하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당근 외에도 채찍을 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이렇게 균은 당근과 채찍을 같이 다루어 심복들을 다스렸고 지금까지는 상당히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박규남을 돌려보낸 균은 그 날의 행사로 피곤했는지 하품을 한 번 늘어지게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균은 바로 잠들지 않았다. 이번 일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균이 화약을 무상으로 공급해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중에 시마즈에게 써먹을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화약을 공급해주었기에 너희들이 쉽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러니 그만큼 너희들이 우리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 바로 이런 명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 시마즈는 별 볼일 없지만 앞으로 3년만 지나고 균의 계획이 발동하면 그 세력이 급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장에 일조한 균의 입김이 강하지고 그만큼 더 큰 이익을 시마즈에게서 얻어낼 수 있다. 그래서 짠돌이 균이 아낌없이 총을 거의 헐값에 넘기고 화약은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아니 일종의 투자와도 같았다.
그런데 이런 균의 속셈을 눈치라도 챘는지 요시히사는 좋은 패를 꺼냈다. 제 딸을 균에게 보내어 확실하게 계산을 끝낸 것이다. 화약 3만근 대 여자 10여명. 당연히 균이 투자비를 말아먹은 셈이다. 물론 균이 여자를 받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균이 준 화약이나 지원책이 대가성이 없는 것이 되어버려 더 손실이 크다. 차라리 댓가를 받을 것은 받겠다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 나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별 필요 없는 여자들을 받았다. 그리고 머리를 최대한 굴려서 이번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고친 것이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있었던 '왜구 투항사건'의 전말이다. 따지고 보면 균의 흉계를 막아낸 요시히사나 안 좋은 상황을 이용해서 조선의 군사권을 장악한 균이나 보통은 넘는 자들이었다.
'요시히사가 내 계획을 간파한 것인가? 아니면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행태를 따른 것인가? 내가 직접 만나보지 않으니 알 수 없구나. 그렇다고 내가 직접 행차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요시히사를 부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니 조심을 하는 수밖에는 없겠다. 그런 그렇고 몸은 피곤한데 잠이 안 오는구나. 책이나 좀 보다가 자야겠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아까운 화약을 날려버린 것이 자꾸만 떠올라 균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다음날 아침. 균은 부스스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쌓인 서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균이 피곤하던 말던 서류들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요즘 들어 국방문제에 신경을 쓴 나머지 서류처리를 게을리 했더니 이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이 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균은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서류를 하나둘씩 마무리 지어갔다.
작년에도 조선의 작황은 평년작을 기록했다. 요즘처럼 흉년이 밥 먹듯이 돌아오는 시대에 계속해서 평년작이 들어주는 것 만해도 굉장한 것이었고 균의 정책수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풍년이 들어준다면 더욱 좋겠지만 흉년이 들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흉년이 들었다가는 국가의 재정수입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왕이 덕이 없어서 그런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기 때문에 균으로써는 굉장히 난감하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능력보다는 통치기간에 자연재해가 안 일어나는 왕이 좋은 왕이었다. 하늘이 왕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자연재해를 일으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규모 자연재해라도 일어나면 당장 재정손실을 물론이고 균의 개혁정책이 힘을 잃게 되며 전국 방방곡곡의 이름난 명산에 자신의 잘못을 비는 제사를 지내로 다녀야 하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황해도 곡산에 하얀 무지개가 나타나 해와 겹치는 기상이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균이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홍문관에 무슨 징조인지 물어보았는데 홍문관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이는 전하의 덕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옵니다. 무릇 해는 임금을 상징하는데 하얀 무지개는 칼처럼 보이는 것이라 좋은 징조가 아니옵니다. 따라서 이런 징조를 하늘이 보이는 것은 전하의 덕이 부족함을 탓하는 것이니 전하께서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덕을 쌓는다면 이런 일을 자연히 없어질 것이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연에 더욱더 열심히 참석하여 주시옵소서."
"……."
그날 균은 다른 왕들처럼 이번 일을 홍문관에 물어보았다가 쪽만 팔리고 말았다. 이렇게 작은 이변도 그런데 대흉년이라도 들었다가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년작이라도 들어준 것이 균에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더욱이 반가운 일은 올해 재정수입이 폭증했다는 것이다. 아직 1월 달이라서 정확한 수입은 알 수 없지만 비밀정보망과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작년 조선의 총 재정수입은 약 쌀 45만석(225만 냥)으로 추정되었다. 즉위년에 흉년이 들어 즉위 1년에 7만 섬의 토지세 수입을 포함하여 총 쌀 10만석(50만 냥)의 재정수입을 올릴 것에 비하면 4.5배가 넘는 달하는 엄청난 증가폭이다.
이렇게 급격히 세수가 불어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가 전세수입의 증가이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쌀값과 면포의 가격을 대비했을 때 평년작은 흉년작의 2~3배의 수입을 거둘 수 있다. 따라서 평년작인 지금의 전세수입이 흉년의 2~3배나 된다.
둘째가 수미법의 시행으로 인한 새로운 재원의 확보다. 1565년 공납제는 겨우 쌀 1만 섬의 재정수입을 거두는 데 그친 반면 1567년의 수미법은 15만 섬의 재정수입을 안겨주었다. 조선의 전체 토지 200만결 중에 함경도와 평안도는 잉류지역(세금을 중앙에 상납하지 않고 군사비로 사용.)으로 제외하고 또 도저히 세금을 물리기 힘든 농경지를 제외하면 수미법의 대상 토지는 150만결이다. 여기서 쌀 1섬씩 거두면 150만 섬이고 이중 쓰고 남는 것이 1할이 되어 15만 섬의 수입이 생긴다.
셋째가 상업세의 부과기준 강화였다.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너무 적게 거두어도 많이 거두어도 문제가 생겨 호조가 세금을 거두는데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균은 외수사라는 막강한 상인집단을 거느리고 있었고 이들을 동원하여 적당한 수준의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향리들의 부정부패가 감소했다는 것이다. 작년에 재정흑자를 거둔 균은 그 자금을 비축하자는 신하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전량 관리들의 녹봉을 인상하는 데 사용했다. 그 결과 작년 재정지출은 역대최고 수준인 30만 섬(150만 냥)을 넘겨버렸다. 그러니 원래는 흑자인줄 알았는데 되려 5만 섬의 재정적자를 본 것이다.
덕분에 호조판서 홍담이 비금도 시절의 김호진처럼 쓰러질 뻔했지만 두둑한 녹봉이 지급되자 향리들의 생계형 비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녹봉만 받아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위험하게 비리를 저지를 필요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재정상황은 나날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올해 재정흑자만 15만 섬인데……. 신하들 다 쓰러지겠군. 후후후. 이제야 내 돈 가지고 재정적자를 매울 필요가 없어지는 구나. 하지만 이렇게 넋 놓고 좋아할 일은 아니지. 내년에 흉년이라도 들면 단번에 재정은 부실해질 것인데……. 더욱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지 하늘만 믿고 있다가는 큰 코를 다칠 꺼다.'
균은 방구석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지밀상궁들이 혼자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상당한 재정흑자에 크게 기뻐했다. 그러다가 그 요인을 분석해보고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지밀상궁들의 표정에도 난처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 균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었고 지밀상궁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올해 외수사 순 이익만 쌀 22만 섬(110만 냥)이라고 하던데 그 정도면 어떻게든 군사비는 감당할 수 있으니 재정부담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 아니겠어? 군사비부담만 덜어도 문제 없음. 그건 그렇고 일도 끝났는데 우리 정아나 보러 갈까나?'
"대비전으로 들것이다. 상선은 채비를 하라."
"예. 전하."
균은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면서도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깔아서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힘차게 걸어나갔다. 그러나 그런 균을 수행해야할 지밀상궁들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며칠 후 균은 새해맞이 인사변동을 단행했다. 정확히는 새해맞이가 아니라 즉위 1년 초에 임명했던 관리들의 임기가 거의 다 차서 미리미리 새로운 벼슬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앙의 관리들의 임기는 30개월이다. 하지만 관찰사나 절도사 같은 외관직의 임기는 24개월이므로 고위관직은 못해도 2년마다 한번씩은 교체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균은 당시 덕망이 높던 사람들을 다 골라서 고위직에 임명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영의정인 이준경은 그대로 유임했지만 좌의정인 이명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결국 기로소로 들어갔다. 좌의정에는 우의정 홍섬이 우의정은 이조판서 권철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조판서에는 홍담, 병조판서에는 정세필, 공조판서에는 노수신, 형조판서에는 박순, 호조판서에는 조식이 임명되고 예조판서에는 이황이 유임되었다.
균의 심복들도 직급에 조금씩 올라서 황재훈, 나원호, 김호진이 종 6품 주부로 승진하여 참상관이 되었다. 박규남의 경우에는 종5품으로 승차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조금씩 관직이 올랐다. 하지만 도승지 정인기와 내금위장 곽흘 등은 벼슬은 그대로 유임시켜 자신의 주변을 지키게 했고 그들도 오히려 그쪽을 선호했다.
균의 이번 인사조치는 신하들과 선비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임명된 신하들이 모두 명망 높고 유능한 인물들이라서 '임금이 인재를 잘 본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특히 이황이나 조식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을 조정의 요직에 포진시켜 앞으로 개혁에 방해가 될지 모르는 양반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려하는 등 본격적인 개혁조치에 앞서서 사전준비의 성격이 강한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