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너무 걱정할 것들 없소. 병력이 적지 않는 것은 아니나 1만 6천의 군사들 중에서 이미 6천명은 내금위소속의 위사들이니 그 운영비는 모두 과인이 부담하는 것이오. 따라서 국가재정에는 단 한 푼의 손해도 끼치지 않소. 또한 1만 명의 병사들 역시 기존에 오위도총부 3만 명이 쓰던 군사비로 충당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오?
오위도총부를 개편하면서 2만 명의 병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그중에서 용맹한 자를 골라서 군대를 만들지 않는 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이고 병사들의 불만을 사는 일이오. 이번에 과인이 한 일은 군대를 늘린 것이 아니라 방만하게 운용되던 군대를 축소시켜 정예화 시킨 것에 불과하니 경들은 재정문제를 거론하지 마시오."
균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바로 군대를 늘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였다는 데 있다. 기본적인 중앙군만 3만 명인데 이를 1만으로 줄여버렸으니 그 예산이 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하들이 예산문제로 트집을 잡을 구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균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신하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사실 신하들이 걱정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예산문제라기 보다는 문관들의 이익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체아직이라고 하여 일은 시키지 않고 녹봉만 주기 위해 만들어진 벼슬자리가 있다. 이중에서 군함체아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무관들에게 녹봉을 주기위해서 만들어진 벼슬이다. 그런데 이런 군함체아의 상당수가 문관들에게 지급되고 있었다.
이것은 제법 역사가 길어 태종 때부터 이런 일이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거의 당연히 되었다. 즉 조선의 군사비중에서 상당부분이 문관들의 월급을 주는데 사용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것을 균이 군사비로 다시 사용하려 하니 문관들이 중심이 된 조정의 대신들은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하. 신 예조판서 이황이 아뢰옵니다. 오위도총부에 들어가는 예산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족친위, 충의위, 충찬위 같은 부대와 문관들에게 지급되는 체아직을 제하고 나면 1만의 병사를 상시 유지하기에는 너무 부족하옵니다. 하오니 예산문제를 논의하지 않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족친위같이 이름만 군대인 부대들은 군사적인 기능은 없이 군사비만 잡아먹고 있으니 해산할 것이고 문관들에게 지급되던 체아직은 다시 무관들에게 돌릴 것이오. 그렇다면 예산이 더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소?"
"하오나 전하. 족친위 같은 부대들은 유서가 오래되고 공신들의 후손을 우대하기 위한 부대이니 양반들의 반대가 심할 것입니다. 또한 문관들에게서 체아직을 빼앗는다면 그들의 생계는 어찌 할 것이옵니까?"
"군사비는 군대를 기르는데 쓰는 것이 본연의 용도대로 사용하는 것이오. 공신들의 후손에 대한 우대와 문관들의 녹봉을 지급하기 위하여 군사비를 사용한다면 그 돈을 군사비라고 부를 수 있겠소?"
"전하. 이는 태종대왕 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관례이옵니다. 이를 하루아침에 폐지하여 공신들의 후손들과 문관들을 박대한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우고 누가 백성들을 잘 다스려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소신의 충언을 귀담아 들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균이 바라던 대로 균과 신하들 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병조판서 정세필은 무신이니 내심 균의 의견에 동감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신하들은 큰 우려를 나타냈다. 원래부터 기득권층이 자신들이 이익을 알아서 반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싼 양주를 마시던 사람에게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라면 반발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개혁이 좌절되는 것이다.
균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신하들이 다 반대를 해도 탓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신하들 입장이라도 저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균은 지금 자신의 세력을 감추고 있어서 강대한 양반기득권층에 도전하는 하룻강아지로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균은 자신이 생각한 대책을 단호하게 설명했다.
"과인도 그런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현재 호조가 지출하는 예산은 선대왕이신 명종대왕 때의 2배가 넘는 양이오. 비록 지방향리들에게 지출되는 녹봉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문관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많이 늘었는데 어찌 박대한다고 할 수 있겠소? 군함체아를 모두 무관들에게 넘긴다고 해도 전에 비해서 문관들이 받는 녹봉이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 아니오?
또한 공신들의 자손들도 마찬가지요. 개국과 더불어 지금껏 많은 공신이 있어왔는데 적게는 100년부터 많게는 180년 동안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름 하에 대접을 받고 있소. 하지만 선대왕들의 피를 이은 종친들은 4~5대가 지나면 더 이상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이것이 더 불공평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만일 반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국가재정으로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는 소인배일 것이오. 그래도 왈가왈부하는 자가 있다면 문관들의 녹봉을 원래대로 환원하고 그 돈으로 오위도총부를 살찌울 것이며 충의위, 충찬위를 유지하는 대신 서해평 탈환에 앞장을 세워 군 본연의 임무를 맡길 것이니 그리들 알라고 전하시오."
"……."
균의 말을 들은 병조판서 정세필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세조대왕 이후로 조선의 임금들은 유약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번의 임금은 군사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많았다. 지난 백여 년간 무관들이 천대받았던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광명이 보이는 것 같다고 표현하면 좀 지나치겠지만 정세필의 경우에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른 대신들도 정세필보다는 못하지만 더 이상 반대를 할 근거가 없어졌다는 것에는 내심 동의하고 있었다. 이제 균의 명분을 내세워 다른 관리들을 설득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왕의 굳은 의지와 설득력 있는 명분을 확인한 이상 시간문제였다. 그 뒤에도 세부계획에 대하여 의논이 있기는 했지만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뒤라서 균이 대신들에게 설명을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있었던 회의가 끝날 무렵 균은 헛기침을 몇 번해서 대신들의 주의를 환기 시켰다.
"흠! 흠! 흠!"
"전하. 신들에게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옵니까?"
"밖에 정내관이 있으면 어서 그것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라. 그리고 이제 국사를 논하는 일을 끝났으니 사관은 자리를 비우라."
"전하. 신 예문관 검열(정9품) 남송정이 아뢰옵니다. 아직 기록할 것이 더 남은 듯하여 신은 자리를 떠날 수가 없사옵니다."
"그럼 과인에게 목례를 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아까 점심 직후부터 이유 없는 인사를 수백 번이나 받으니 과인의 마음이 편지 않다."
"……."
사관은 국왕의 하는 거의 모든 말을 기록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관은 총 8명이 있으며 승지와 함께 숙직을 하면서 균의 주변을 맴돌았다. 역대 국왕들은 사관들을 두려워했는데 가차 없이 모든 사실을 적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태종이 사냥을 하다가 그만 낙마했다. 무안해진 태종이 한 말은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해라.' 였는데 그것도 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었으며 태종이 대신들을 불러 모은 다음 회의를 하기 전에 하는 말이 '사관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하라.' 였다.
하지만 이런 사관들도 사람인만큼 왕 앞에서 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관 이호문이라는 인물이 졸았던 적이 있는데 당시 임금이 언론의 필요성을 인정하던 세종대왕이라서 특별히 죄를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균의 경우도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크게 문제를 삼지는 않았는데 기억력이 좋아서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기를 잘 했다. 그래서 남송정은 균의 말을 쫒아서 균에게 절을 올린 후 방을 나섰다. 아니라면,
'잠시 과인도 쉴 터이니 가서 세수하고 오게.'
'이제 10번만 받으면 인사를 일천 번이나 받는군,'
'아무래도 많이 피곤한 듯 하군. 과인이 대신 써줄까?'
이런 식으로 두고두고 괴롭혔다. 그래서 역대 임금들은 사관을 두려워했는데 균은 사관을 가지고 놀고 있으니 사관들이 가장 싫어하는 임금이었다. 그렇게 사관 남송정이 물러가자 내시부의 최고 책임자이며 대전내관인 상선(종2품) 정성우가 작은 상자를 9개나 가지고 왔다. 그리고 삼정승과 육판서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다 나누어 주었으니 그 상자를 열어보시오."
"예. 전하. ……아니? 이것은 진주가 아니옵니까?"
"그렇소. 과인이 경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이니 가져가서 부인들에게 선물을 하도록 하시오."
"하오나 전하……."
"경들은 이 나라의 최고의 관료들이고 과인과 함께 국사를 돌보는 중책을 맡고 있소. 그런데 듣자하니 나라에서 주는 녹봉만 받다보니 대체로 그 가세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소. 아무리 청렴하게 나랏일을 하려고 해도 집안이 좋지 않으면 결국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오. 그러니 과인이 내린 진주를 팔아서 가세에 보태던지 아니면 부인들에게 선물로 주어 가장으로써 체면을 차리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당연히 균이 준 보석은 사쓰마 일대에서 양식한 진주 중에서 일부 고른 것들이다. 비금도 상단 사쓰마 지부는 대략 5년 동안이나 진주양식을 연구했는데 균이 준 지식으로는 한계가 많았던 상황이라서 그 기간 동안 대부분 실패를 했고 성공작은 팔아서 연구자금을 충당한 바람에 이번에 박규남이 가지고 돌아온 진주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균은 이중 몇 개를 대신들에게 하사했는데 그 이유는 균이 한 말대로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말고 나랏일에 전념하라는 의미였고 가세가 빈궁하여 생기는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숨은 이유도 있었다. 균이 부인들에게 선물하라고 한 이유는 앞으로 시작될 진주사업을 위한 포석이었다. 일종의 샘플인 셈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흉년으로 무척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일부 부유층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이용해서 명나라의 보석, 금은 세공품, 문방구(단계석으로 만든 최고급벼루, 금가루 넣은 먹, 상아로 만든 붓), 책(금가루 넣은 먹물로 쓴 글이면 당연히 비싸겠지요.) 같은 일종의 사치품을 수입했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당시 국제통화였던 은이 유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막을 길이 없었다. 현재 그런 국제교역은 국법으로는 금지되고 있지만 역관과 상인들에 의한 일종의 밀무역에 가깝기 때문에 단속을 한다고 해도 근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균이 생각한 것이 조선에 진주를 유행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은의 누출도 막고 진주를 사기 위해 사용한 양반들의 돈이 고스란히 균의 금고로 들어오게 된다. 균의 주특기 중 하나인 일거양득인 것이다.
"아참! 이것을 안 주었구려. 정내관, 가서 진주 가루 좀 내오게. 진주가루가 그렇게 노인들에게 좋다고 하는데 과인보다도 경들이 먹고 힘을 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과인이 명하니 꼭 하루에 2번씩 적당량을 타서 먹도록 하시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더라?"
"……."
잠시 후 이준경 등 대신들은 진주가루가 담긴 주머니와 진주알이 든 상자를 양손에 든 채 강녕전을 물러났다. 진주가루는 약재와 화장품재료로 쓰이는 고급재료이다. 하지만 균의 경우에는 실패한 진주를 갈아서 헐값에 만들어낼 수 있으니 균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엄청난 생색을 낸 셈이었다.
하루 종일 대신들과 시간을 보낸 균은 저녁이 되어서는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를 차례로 방문했다. 이번에 균이 가지고 간 것은 가채에 꽂는 장신구인 떨잠이었다. 사극에서 자주 수 있는 떨잠은 갖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어서 가격이 비싼데 균이 이번에 가지고 간 떨잠은 중앙에 큰 진주가 박혀있고 주변에 작은 진주가 촘촘히 박혀서 진주가 나지 않은 조선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다.
"주상. 이것이 다 무엇이오? 이렇게 귀한 진주로 치장이 되어 있다니 나야 좋기는 하지만 너무 비싼 것이 아니오?"
"아니옵니다. 어마마마. 이번에 투항을 해온 도진의구라는 자가 따로 보내온 진주가 있어 소자가 장인을 시켜서 만들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비싼 것은 아니옵니다."
"예쁘기는 하지만 이 비싼 것을 머리에 장식으로 달고 다니다가는 무거워서 걸어 다니지도 못할 것 같소. 차라리 이것을 팔아서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주상과 나라를 위해서 좋지 않겠소? 이 큰 진주를 하나만 팔아도 나라 살림에 큰 보탬이 될 것이오."
"어마마마. 정아를 좀 보시옵소서."
균의 말을 들은 대비 심씨가 제 딸을 보니 정아공주는 진주를 가지고 구슬놀이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균이 준 것은 불량품이라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지만 대비의 입을 딱하고 벌어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옛날에 왕실의 재정이 풍부했던 시기에는 보석으로 구슬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의 왕실은 부실한 국가재정을 매우기 위해 같이 부실화된 터라
상상도 못하는 광경이었다.
왕실의 여인들이 조선 전체의 유행을 주도하는 비중은 굉장했다. 그래서 균은 대비들에게 진주로 된 장신구를 선물하는 한편 일부러 궁내에 진주를 조금 뿌렸다. 아무래도 여자의 심리는 남이 예쁘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조만간에 유행이 생길 것이라고 균은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