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균이 진주를 풀어버리는 바람에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예상보다 왕실의 재산이 풍족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고 또 하나는 궁내의 일이었다. 먼저 균이 풀어버린 진주의 양은 진주알과 가루를 합쳐 한 해 동안 조선에서 수입한 진주의 양과 맞먹는 수준이었기에 그 액수가 몇 만 냥이 넘었다.

덕분에 많은 신하들이 왕실재산의 규모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내수사가 날고 기어도 그 수익은 뻔한데다가 그 수익의 대부분은 내금위를 운영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니 부족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여러 가지 헛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고 그런 것들은 가만히 나두면 사라지는 것이기에 균은 아예 신경을 껐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균을 제법 괴롭히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균은 올해 나이 17세의 한창때를 맞고 있는 청소년이다. 균은 아기 때부터 건강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빨리 자라보겠다고 발악을 했기 때문에 성장도 빠르고 건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조선의 성인 남자들이 150~160cm이던 무렵에 균의 키는 170cm를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시대로 치면 상당한 장신이었다.

거기에 얼굴도 원판이 왕족이니 좋은 편이고 비금도시절에도 쌀뜬 물로 세수를 하는 등 피부미용에도 신경을 써 척보면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나왔고 더욱이 아기 때부터 워낙 뽈뽈대며 돌아다니다 보니 나름대로 운동이 많이 되어 체구도 튼튼한 편이었다. 비록 미소년은 아니라서 신라의 화랑까지는 아니지만 젊고 늠름한 장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편이 맞았다.

이렇게 제법 쓸만한 외모를 지닌데다가 더욱이 궁 안에 유일한 남자였던 만큼 궁녀들 사이에서 균의 인기는 상당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진주를 궁에 뿌린 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성은도 입고 진주도 하사받자는 생각이 궁녀들을 휘감아 버린 것이다. 거기다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가 자신들이 받은 진주들을 성은을 입는 궁녀에게 하사하겠다고 비밀리에 선포한 상태였으니 궁녀들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음! 양상궁. 요즘 궁녀들은 옷을 입는 법도 모르나?"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인이 나중에 조처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이거야 원.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이래서 과인이 마음껏 대궐을 활보할 수 있겠는가?"

균은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그 날 이후 궁녀들이 자신의 여성미를 보여주겠다고 저고리 고름을 제대로 묶지 않았고 속옷으로 입던 속적삼을 입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 브래지어 안하고 웃옷의 단추를 다 풀어 해지고 다니는 셈이다. 당연히 팔팔한 총각인 균의 용안(임금의 얼굴)은 붉어졌지만 일부일처제가 당연시 되던 세상에 살던 균은 수많은 궁녀들을 거들어야 한다는데 거부감이 많이 들었다. 더욱이 균의 취향에 맞는 궁녀도 없었다.

조선시대 당시 상류층에서 생각하던 미녀의 인상은 요즘과는 많이 다르다.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만 한마디로 중성적인 모습의 여자들은 선호했다. 그래서 조선의 왕비라면 무척 아름다울 듯하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따지면 그렇게 환영받을 존재들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 여자들은 키고 작아서 균이 생각하는 정도로 몸매가 나지 않았고 화장기술이 미비하여 변장도 잘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균의 눈에 찰 리가 없는 것이다.

균의 역정이 계속되고 양상궁의 단속이 계속되었지만 그런 궁녀들의 육탄공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궁녀들에게는 배우자를 선택할 여지가 없는데다가 균의 성격상 심한 처벌을 하지는 않았고 더욱이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가 제조상궁인 양상궁의 처벌로부터 그녀들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상황은 나날이 심각해졌다.

"도저히 밖으로 나가지를 못하겠군."

"망극하옵니다. 전하."

균은 서안을 두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나마 낮에는 궁내에 관리들이 많으니 좀 낫지만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균의 처소인 강녕전 근처는 궁녀들로 벅적거렸다. 가뜩이나 인구밀도가 높은 강녕전인데 쓸데없는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니 균은 도저히 밖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설마, 내 관상이 무협지에나 나오는 여난의 상은 아니겠지? 내 동생 진이도 그렇고, 내 사촌 여동생들도 날 많이 괴롭혔지. 거기다 내 정적이 원래 문정왕후하고 정난정이었고 왕위에 올라서는 대비와 정아 때문에 가슴을 졸였고, 시마즈에 비싼 화약을 주고받은 것도 여자고……. 설마…….'

잘 끼워 맞추고 보니 모두 다 그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균의 얼굴은 파래졌다. 하기는 왕위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여난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마다 대소의 차이가 있지만 몇 백 명의 여자들과 같이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오늘따라 전생이 더욱 그리워지는 균이었다.

균이 궁녀들의 공세로 골머리를 썩고 있던 사이 동평관에서 균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시마즈 유메는 조선의 달을 구경하면서 밤을 지세우고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사의 딸로 태어나 근처 영주나 유력한 가신들의 아들에게 시집갈 것으로 생각하던 그녀에게 그녀의 아버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외국의 왕에게 시집을 가라는 말에 고작 열 네 살의 어린 그녀는 절망했다. 아무리 당시에 결혼을 빨리하여 성인의 기준이 낮은 시대였기는 하지만 요즘으로 치면 중학교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 나이인데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정략의 도구가 되어 화약 값 대신으로 팔려가는 신세였으니 소녀의 여린 마음에는 지우기 힘든 상처가 생겨났다.

아무리 자신이 반대를 한다고 해도 바뀔 수 없는 일이기에 전국시대의 여인으로써의 운명에 곧 체념한 그녀는 자신의 낭군이 될 조선의 왕에게 한 번 더 실망해야 했다. 화려한 접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공녀나 포로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은 분위기만 보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녀는 이번 일을 대비하여 조선말을 일부 배워둔 상태이니 자신의 위치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자신과 자신의 시녀들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벌써 한 달째 이곳 동평관에서 묶고 있었다. 물론 동평관에 사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사신들이 묶는 임시숙소에 불과하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사쓰마에서부터 같이 왔던 조선왕의 심복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기는 하지만 벌써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느낌에 그녀는 유난히 밝은 달이 쓸쓸히 자신을 비추는 조선의 긴 겨울밤이 너무나 싫었다.

"밤은 어둡고 나는 외롭습니다. 꿈조차 어두운 껌껌한 밤에 달조차 그런 내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지 고요한 어둠 속에 잠긴답니다. 당신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나를 찾아오시겠지요. 당신의 그림자 속에 나는 그저 꼭두각시처럼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이 지나면 살랑살랑 봄바람이 행복을 실어오고 향기로운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나겠지만 오늘 밤이 찾아오듯 내일 역시 올 것이므로 나는 서글픕니다. 당신은 이제 나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꽃들이 다시 봄날을 기다리듯이 나는 당신을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다 깜박 졸음에 빠졌습니다. 아직도 달콤한 사랑의 말들이 머리맡에 떠도는데 다 돌이킬 수 없는 꿈이라니 가늘게 뜬 눈 속으로 어른거리는 물방울 아마도 비가 내리는 것이겠지요.

저 멀리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아침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나는 기나긴 밤을 오늘도 하루 보냈습니다. 서쪽에선 달이 지고 동쪽에서는 해가 떠오르는데 당신의 모습은 지평선을 넘어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멀리서 들려오는……."

"으악!"

"비명소리만이……."

시마즈 유메는 자신의 감정에 못 이겨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를 읊다가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놀랐다. 그래서 그녀는 옆에 있던 막대기를 가지고 비명소리가 난 곳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유메는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전통의 무가인 시마즈가의 사람답게 겁이 없는 편이었다.

실제 그의 고조모인 시마즈 토키와는 '남해의 진주', '사쓰마의 국모'로 불리며 현 시마즈 가를 일구는데 앞장섰을 정도니 그 핏줄을 이는 유메도 여자아이치고는 용감무쌍했다. 특히나 자신을 박대하는 조선왕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던 그녀는 무단 침입자라면 신나게 두들겨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거의 날다시피 소리가 난 곳으로 접근했다.

"아이고 허리야. 역시 운동을 안 하고 서류만 처리했더니 체력이 많이 약해졌구나."

"위잉~!"

"탁~~~!!!"

담을 넘다가 떨어져 허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하던 균은 기합소리와 함께 들리는 무시무시한 파공음에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과연 균의 예상대로 몇 초전까지 자신이 있던 땅에는 이제는 부러진 나무막대기의 잔해가 널려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손에는 아직 반 토막난 나무막대기가 들려있었고 균은 바쁘게 피해야 했다.

유메는 침입자의 운동실력에 제법 놀랐다. 담을 넘다가 떨어져 별 볼일 없는 자로 생각하고 자신의 손에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덤빈 것인데, 상대는 유메의 공격을 모두 피해내고 있었다. 이윽고 아직 어린 소녀인 유메는 지쳤지만 침입자의 큰 몸집을 보아하니 나무막대기를 멈추었다가는 자신이 당할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막대기를 휘둘렀고 균은 그 막대기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앗! 빈틈이닷!'

한참 뒤 지친 유메의 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유메가 균을 공격하기 위해서 팔을 뻗는 순간 균은 재빨리 유메의 몸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는 유메의 팔을 잡고는 잠시 업었다가 앞으로 내던져 버렸다. 유도의 업어치기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던지는 순간 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참! 여자아이지.'

균은 날아가는 유메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유메를 안은 채로 옆으로 때굴때굴 굴러갔다. 그렇게 균과 유메는 서로 잠시 껴안은 상태에 있다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코를 막으면서 외쳤다.

"욱~! 마늘냄새 지독해."

"백년 묵은 썩은 된장냄새."

역시 조선의 음식에는 필수적인 양념으로 쓰이는 것이 마늘이고 피로회복에도 좋은 지라 균 은 마늘을 즐겨먹었다. 그리고 왜인들은 낫토(일본 청국장)와 미소시루(된장국)같은 된장을 많이 먹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의 몸에서는 각각 마늘냄새와 된장냄새가 났고 한동안 격렬한 운동을 하다보니 몸에 배여 있던 그 냄새가 더욱 심하게 난 것이다. 박규남이 사쓰마에 가서 고생한 것이 바로 이 된장냄새 때문이었다.

방안에는 냉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지난번 근정전에서 같이 의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높은 계단위에 설치된 옥좌에 앉아있던 균과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메가 서로 얼굴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목소리도 풍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고 더욱이 균의 목소리는 행사용 근엄한 목소리가 따로 있으니 목소리로도 구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만남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흠~! 흠~! 흠~! 왜국은 야만인들의 나라라더니 여인도 흉폭하구나."

"왜국의 법도가 조선보다 거센 것은 사실이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아녀자가 있는 곳을 침입하는 사람에게까지 다소곳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흠~! 이곳은 왜국사신들이 묵는 동평관이지 아녀자들만 사는 곳은 아니지 않느냐?"

"이곳에 저희들을 묵게 하고 한 달이나 아무 소식이 없어서 완전히 저희의 거처로 삼게 하신 줄 알았습니다."

"끙~!"

균은 그래도 남자라고 먼저 입을 열어서 위세를 부려보았지만 도리어 헛기침만 실컷 하고는 바로 밀려버렸다. 아까 덤빌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하는 것인데 균의 뇌리 속에 있는 순종적인 일본여인의 이미지 때문에 시마즈 유메의 본성을 빨리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균은 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이번 일이 워낙 전례에 없던 일이라서 그 대우에 대한 협의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사전지식으로 과인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들어서 알고 있겠지?"

"선왕의 양자로써 왕위에 오르신 유능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조부인 타카히사도 양자로서 시마즈가의 당주에 올랐다고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주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내심 반발하는 무리가 많다고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내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너를 받아드린 것이고 너에게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많이 힘드시겠습니다만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일단 과인에게는 정비가 없어서 후궁을 함부로 들이기는 곤란하다. 특히나 내가 제시한 조건을 들어보았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좀 조건이 과하게 제시된 것은 사실이지만 네가 왜녀라는 점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

균의 말에 유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그녀는 그런 말을 아버지 요시히사에게 들었을 때 장난인줄로만 알았다. 어떻게 법전을 다 암송하는 인간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균의 말은 다 틀린 것은 아니다. 상당한 교양과 지식이 없다면 천박한 왜녀가 존귀한 조선 왕의 후궁이 되는 것을 양반들이 보고만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