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유메도 그런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시마즈가라면 왜구와 관련이 깊어 조선 내에 원한을 진 사람이 많았다. 을묘왜변이 고작 13년 전의 일이었으니 조선에서 왜인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기였다. 유메가 수긍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균은 단호한 목소리로 유메에게 말했다.
"과인이 아는 바로는 네가 그 조건에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다고 들었다. 그러기에 너희들은 과인이 사는 궁에는 들어올 수 없다. 적어도 과인에게 중전이 생기어 너희들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거나 네가 처신을 잘하여 좋은 평판을 얻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
"물론 대신들의 반발을 염려하는 것도 있지만 궁중이란 암투가 심한 곳이니 네가 궁에 들어오면 필히 죽을 것이다. 특히 두 분 대비마마들이라면 왜인을 궁으로 들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실 분들이니 과인으로써도 너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너를 보호해 줄 중전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궁내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전하."
"과인이 한성부 내에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다.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는 그곳에서 지내거라. 그리고 아무래도 그 편이 네 마음도 편할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균은 일부로 시마즈 유메를 바라보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몇 걸음을 걸어서 방문을 열고는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물론 균의 유메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유메의 두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불쌍한 것……."
유메는 그런 균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이 난무하는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의 여인들에게 행복이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단지 정략적인 가치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친정과 시집 간의 관계가 악화되거나 나이가 들어 성적인 매력과 출산능력을 잃어버리면 대부분의 일본 상류층 여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버림을 받아 쓸쓸히 늙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으로 시집을 온 유메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아무리 평화롭고 예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자신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오늘 처음 보는 남편이 단 하룻밤도 같이 있어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그녀도 여느 일본 상류층 여인들처럼 외진 곳에서 쓸쓸히 늙어가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여느 여인들보다 빠른 열 네 살의 나이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균은 방을 나오면서 조용히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동평관을 나섰고 곧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내금위 위사들이 균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선전관 남형의도 포함되어 있었고 균을 그를 보자마자 대뜸 질문을 던졌다.
"별 다른 반응은 있나?"
"아니옵니다. 전하. 백여 명의 위사들을 모두 풀어서 그 징후를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징후를 느끼지는 못하였나이다. 거기에 동평관에 드나드는 사람들과 왜녀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을 모두 감시하고 있사오나 그 역시 뚜렷한 문제는 없사옵니다."
"그럼 일단은 안심해도 좋을 듯 하군.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남형의의 보고를 받은 균은 그제서야 인상을 풀었다. 균이 시마즈 유메를 궁으로 들이지 못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미 유메에게 설명을 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장된 것으로 균이 즉위하자마자 가장 공을 들인 것이 궁내의 세력을 확보한 것인데 궁에서 유메가 죽는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대비와 대신들의 반대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균이 사실상 못할 일은 없고 유메를 후궁으로 맞는 것은 큰 일이 아니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메의 임무 때문이다. 정략결혼을 하는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시집의 정보를 조사하여 친정으로 넘기는 첩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 오다 노부나가의 아내인 노히메의 경우 결혼 전에 제 아버지로부터 기회를 보아 남편을 죽이라는 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노히메는 거기에 따르지 않았지만 당시 왜국의 정략결혼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하여 균의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첩자의 역할을 하고 심하면 암살자의 역할을 할지도 모르는 유메를 궁내에 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과인이 나중에 정내관에게 언질을 줄 터이니 그대는 적당한 거처를 물색하도록 하라. 최소한 1년 동안은 저들을 잘 감시할 필요가 있느니라. 물론 과인의 후궁에 준하는 대우를 하는 것은 잊지 말고."
그러나 균은 유메를 버릴 수도 없었다. 유메는 외부적으로는 시마즈와 동맹을 상징하는 존재이며 내부적으로는 균의 대외정책 추진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균은 일단 유메를 더 관찰한 후에야 대궐로 불러드리기로 결심하고 남형의에게 명하여 비밀리에 철저한 감시를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예. 전하. 그런데 허리는 괜찮으시옵니까? 아까 전에 망극한 일이 생겨 신들의 걱정이 많았사옵니다."
"음! 과인이 잠시 실수를 한 것뿐이다."
"주상전하의 옥체는 전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만백성들의 것이옵니다. 특히 허리는 남자에게는 중요한 것이니 부디 옥체에 무리가 가는 일을 하지 마시옵소서."
"음! 음! 음! 동쪽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니 곧 해가 떠오르겠군. 모두들 환궁할 채비를 하라."
남형의의 말에 균은 손으로 허리를 만지면서 딴청을 피웠다. 균이 담을 직접 뛰어넘는 행동을 보인 것은 처음 보는 시마즈 유메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유메가 시를 읊는 모습을 본 균이 담을 훌쩍 뛰어넘는 모습으로 멋지게 등장하려고 했던 것인데 대실패라고 끝나는 바람에 도리어 망신만 당한 셈이었다.
그러나 말을 그렇게 했지만 균은 환궁하기 싫었다. 가뜩이나 답답한 곳이 궁궐이었고 요즘 궁녀들이 요동을 치는 바람에 균은 궁이 무척 싫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인달방의 사저로 돌아가고 싶지만 왕이라고 마음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균은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따라서 왜 이렇게 궁녀들이 많나?"
"글쎄? 원래 강녕전이 사람이 많기는 해도 꼭 시장통 같군."
외수사의 병기주부 나원호와 재정주부 김호진은 균의 부름을 받고 급히 입궁을 했다가 강녕전 근처에서 버글거리는 궁녀들의 모습에 많이 놀랐다. 그나마 낮이라서 복장도 단정하고 수도 적은 편이었지만 척보아도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알현한 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얼굴빛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전하. 신들을 불러계셨사옵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요즘 이곳을 벗어날 처지가 되지 않아서 그대들을 이곳으로 불렀소."
"전하. 내관들이나 상궁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내치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소신들이 강녕전에 자주 드나들면 조정에서 말이 많을 것이옵니다."
"과인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들 뒤에는 두 분 대비마마가 계시오. 중전이 없어 내명부를 다스리는 것은 두 분 대비마마의 권한인데 과인이 함부로 침범을 하는 것은 모양새가 나지 않소. 특히 과인이 대비마마와 사이가 벌어지면 좋아할 사람들이 많은 이때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불가하오."
원래 균이 자신의 심복들과 잘 만나는 곳은 후원에 위치한 취로정이다. 강녕전은 공식적인 국왕의 처소답게 보는 눈이 많아서 제 심복들과 독대를 하기 힘든 면이 많아서 사람이 적은 취로정 근처에서 만나서 지시를 내리고는 했는데 요즘은 궁녀들이 균을 워낙 많이 쫓아다니는 바람에 도저히 움직일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하게 단속을 하자니 그 뒤에 있는 대비들과의 관계가 걸렸다. 아무래도 대비들과 분쟁이 생기면 가장 좋아할 사람들은 반개혁적인 양반들이다. 균과 대비와의 불화를 물고 늘어지면 균도 이에 대처할 뾰족한 수가 없기에 균은 참을 인자를 세 개씩 그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그렇고. 나주부. 그 일은 잘 되어 가오?"
"예. 전하. 심려를 놓으시옵소서.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들은 어느 정도 개발은 다 끝나가고 있사옵니다. 조그만 더 기다리시면 전하께 그 결과를 보여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좋소, 나주부. 과인이 크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하시오. 연구비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좋은 물건을 만들기를 바라겠소."
"예. 전하. 성심을 다하여 실망시켜 들이지 않겠나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이 잘 되어 간다는 말에 균은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확 돌려서 김호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이 크게 김호진을 불렀다. 덕분에 김호진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균의 얼굴을 보는 무례를 저질렀다가 급히 방바닥에 코가 닿을 정도로 몸을 숙였다.
"김주부!"
"예. 전하. 하교하시옵소서."
"김주부도 알겠지만 이번에 과인은 중앙군을 새로 조직하여 과인의 휘하에 거느리려고 하오. 하지만 아직 조정의 재정이 부족하니 쌀 50만 섬(250만 냥)을 준비하여 과인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시오."
"하오나 전하. 그 정도면 외수사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의 절반이나 되는 거금입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사용하시다가는 외수사의 자금력에 무리가 따르오니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과인이 이 나라의 군사권을 한손에 쥐게 되는 일이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군사비를 투자하는 대신 나중에 덕을 보는 일이 있을 것이니 좀 부담이 되더라도 과인의 명을 따르시오. 이것은 어명이오."
"예. 전하. 지체 없이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균은 궁녀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차근차근 중앙군의 재창설작업에 매달렸다. 중앙군을 장악하느냐 못하느냐가 전체적인 개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절대왕권의 삼대요소는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금력이다. 이중 자금력은 비금도 상단을 만들어 어느 정도 확보를 한 후였고 자신의 정책을 지지할 관료조직으로는 홍담의 훈구파, 조식의 남명학파, 이황의 영남학파가 있어서 정책을 수행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균이 지금까지 가장 못 갖추고 있었던 것이 바로 군사력인데 고작 6천의 병력으로는 한성부 일대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한성부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중요한 곳이기는 하지만 엄청난 문제점이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여 다른 지방으로부터 수입을 해야 하는 소비도시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반란군이 곡창인 남부지방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균은 원정군을 파병할 여력이 없기에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금위를 더욱 확대하거나 중앙군을 접수하는 방식으로 지방의 반란에도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꿈꾸고 있었는데 이제야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해 4월 균은 병무청의 창설과 중앙군제의 변화를 공식 선포했다. 이미 주요 대신들이 다른 신하들을 설득한 후이고 병력의 규모가 전에 비하여 줄어든 셈이라 신하들 사이에서 큰 반발은 없었지만 이번 조치로 해산되는 오위도총부의 여러 부대에 소속한 병사와 장수들의 반발은 제법 컸다.
균은 기존 오위도총부 소속의 장수와 병사들을 버리지 않고 일정한 시험을 치루어 합격한 이들은 다시 새로운 군대로 흡수하였는데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이 반발을 한 것이었다. 기존에 지급되던 녹봉이 완전히 끊어지는데다가 새로운 군대에서 주는 녹봉은 당시로써는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이런 수혜를 자신들만 입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단체로 반발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반대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조정 신료들이 군대를 3만에서 1만6천으로 줄이는 조치에 찬성을 하고 있었던 데다가 균이 실시한 일정한 시험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따라서 군대에서 쫓겨난 자들은 노약자로써 군적에 이름만 올리고 녹봉을 받아먹던 자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의 반발은 호응을 받지 못하여 곧 잠잠해지고 오위도총부는 균이 의도하던 대로 약 1만6천의 상비군과 지방에서 동원되는 농민군 4만 명을 포함하여 총 5만6천의 규모로 성공적으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