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망할 놈의 세상! 내가 더러워서 안한다. 퇘! 퇘! 퇘!"
"죄 없는 상인들 다 때려잡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누가 아니래. 고작 자기도 운 좋게 좋은 자리를 차지한 주제에 누구 밥줄을 끊으려고 난리야."
"맞아. 맞아."
균의 입장에서는 쓸만한 군사들은 받아들이고 필요 없는 자들은 퇴출한 성공적인 군사개편이었지만 그런 균에 의하여 일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욕을 하면서 군영을 떠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의 주변에는 수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고작 이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균은 중앙군 3만 명 중에서 국경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양계갑사와 호랑이 사냥을 맡고 있는 착호갑사 7천여 명을 제외한 2만 3천명을 대상으로 신중앙군 편입취재를 실시했다.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쫓아내고 붙으면 다시 중앙군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그래서 중앙군에 흡수된 사람은 고작 1만여 명. 나머지 1만 3천명에 대한 강제 해산이 단행되었고 저렇게 군대에서 쫓겨나게 된 사람들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도 할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균이 실시한 취재는 중앙군의 주력병종인 갑사의 선발취재와 동일한 규정으로 치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을 데리고 있어봐야 아무 쓸모가 없었다. 평시에는 부족한 국방비를 소모하다가 전시가 되면 '나는 5대 독자요.', '나는 학질(말라리아)에 걸렸소.' 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빠져버리는 무리들이다.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가 군적에 오른 사람들을 찾아가보니 허약한 서생 같은 사람들이 저런 핑계를 대기 바빴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균이 그들을 찾아내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당장 밥줄이 끊어지게 된 자들은 균의 수명을 늘리는데 일조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록 군사로 근무하면 받는 녹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특별한 수입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참 주변과 그들을 살펴보던 사람들은 골목길에서 나와 쫓겨난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창창하던 내 앞길이 막혀서 기분도 나빠 주겠는데 네놈들은 웬 놈들이기에 내 앞길을 막는 거야!"
"이봐! 자네들 일자리 찾고 있지? 많은 품삯을 주는 좋은 일자리가 있네."
"일자리? 일자리야 찾고 있지만 우리는 훈련받은 병사들이라서 농민처럼 농사일은 못하네. 논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찾는다면 잘못 찾아왔네."
"물론 그런 것은 아니야. 요즘 화적 때가 날뛰는 덕분에 우리가 모시는 마님께서 훈련받은 병사들을 대규모로 모집하고 계신다네. 못해도 전에 군대에서 받던 녹봉만큼 품삯을 쳐주시고 모으는 사람들도 많아서 별로 위험하지 않으니 그곳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그게 참말인가? 참말이라면 야 지금 당장가지. 지금 당장 가."
"하하하. 이런 패기 있는 병사들이 버려지다니 이 나라도 암울하구만. 자 날 따라오게."
"하하하. 그 사람 참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구먼. 암, 우리 같은 병사들을 내친 자는 꼭 후회하게 될 거네."
그렇게 한 무리의 전직병사들과 이름모를 사람들은 몇 차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이가 좋아졌는지 서로를 보며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론 가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한성부를 떠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십만석꾼. 이것은 충청도 부여현에 살고 있는 김진기라는 사람의 별호였다. 그런 별칭대로 김진기가 보유하고 있는 토지만 거의 1만결에 이르렀고 따라서 실제 수입은 쌀과 잡곡을 합쳐 매년 10만 섬에 달했다. 그런 그의 수입을 돈으로 환산하면 매년 25만 냥에 이르렀으니 조선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부인 것이다.
현재 잠시 관직을 쉬고 있기는 하지만 정 3품 당상관의 품계를 가지고 있는 김진기는 막대한 재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한 넓은 인맥을 이용해서 언제든지 조정에 출사할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권력과 재력을 한손에 쥐고 그 일대를 호령하였고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부여현감'으로 통하기도 했다.
일례로 부여현감이 부임하면 관아에 들어가기도 전에 김진기의 집부터 방문을 했고 인근 고을인 임천군수나 부여목사도 명절 때 직접 찾아오거나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충청도 관찰사나 충청도 병마절도사 같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신경을 써야 하는 거물 중에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윤원형이 전횡을 하던 시기에는 비밀리에 그의 수족으로 일하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윤원형이 몰락할 분위기를 보이자 재빠르게 사림세력으로 변신하여 오히려 윤원형을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그래서 지금은 기호사림의 일부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겉모습만 기호사림일뿐 그 속내는 부패한 훈구파에 지나지 않았다. 제법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 능력을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 데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방납과 군포징수, 환곡 같은 것에 개입하여 적지 않은 부정을 저질렀고 균의 개혁정책으로 돈줄이 끊어지자 크게 불만을 가졌다. 때문에 김진기는 지금 위험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예상보다 지원자가 많다고?"
"예. 영감마님. 소인의 소견으로는 고작 수천 명 정도를 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쫓겨난 병사들이 많고 또 그 불만도 심하여 앞 다투어 지원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천 명은 무난히 채울 듯합니다."
"오천이라. 적은 병력은 아니군. 최소한 충청도의 유방군보다는 훨씬 많은 수가 아닌가?"
"예.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거느린 유방군은 고작 9개 여(중대급 부대), 병력 1125명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네 곳에 분산배치되어 있으니 거병을 하시면 충청도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이옵니다."
"어디 충청도뿐이겠는가? 이번에 모은 군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내 논밭에서 일하는 소작농과 노비들을 모으면 족히 1만의 군사는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호응을 하는 자들을 감안하면 수만의 군사를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아니 삼남의 양반들이 호응하면 10만의 군세는 모을 수 있다. 그 정도라면……."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아서 균의 개혁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고 있었다. 원래 삼남지방은 조선 전체 농경지의 60%가 집중된 데다가 인구도 많고 기후도 좋아서 농업생산력이 좋았다. 그래서 양반들은 이 곳에 거대한 농장을 만들어 막대한 부를 축적해오고 있었다.
겉으로는 고결한 선비인척 하고 있었지만 재물의 단맛을 맛본 양반들은 더욱더 재물에 탐닉하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논밭을 소작하는 농민들을 쥐어짜 더 많은 돈을 갈취했고 관직에 진출해서는 뇌물을 받거나 나랏돈을 빼돌려 재산을 축적했다. 백성들을 괴롭히던 방납상인들의 경우에도 이들에게 뇌물을 받치고 한 일이니 조선시대의 모든 부정부패의 중심에는 양반이 있던 셈이다.
하지만 균의 등장으로 그들의 돈벌이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단 가장 큰 타격은 수미법이었다. 수미법의 실행으로 방납상인들에게서 받던 뇌물이 없어지게 된 것을 물론이고 토지소유자에게 일괄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양반들이 세금을 내야했으니 양반들의 불만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녹봉을 충분히 지급하는 대신 감찰을 강화하여 지방관아의 부패가 줄어드니 그 역시 양반들이 재물을 모으는데 방해가 되었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일련의 조치가 취해지면서 지역사회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양반들의 위치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비록 나라의 살림이 너무 엉망이라서 양반들이 참고 있었기는 했지만 나라의 살림이 호전되는 현상을 보인이상 양반들의 대규모 반발이 한 번쯤은 일어날만한 시점이었다.
김진기가 균에게 쫓겨난 병사들을 모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당시 상황은 누가 앞장서서 반기를 들면 충분한 동조자를 확보할 수 있다. 원래 조선왕조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필요에 의해서 고려를 대신해 수립된 왕조인데다가 태종, 세종 같은 명군들이 완성한 강력한 왕권은 중종반정 이후로 완전히 허울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왕의 양자로 겨우 왕위에 올라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도 시원치 않은 어린 녀석이 양반들의 이익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오니 양반들 중에서 제 2의 중종반정을 생각하는 이들이 생겼고 그중에서 가장 능력 있고 세력이 강한 인물이 바로 김진기였던 것이다.
"영감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지금 우리를 제외하더라도 조정의 조처에 반발하는 양반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장정의 수는 바닷가의 모래보다도 많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힘을 무시하고 여러 가지 개악을 단행하고 있으니 이번 왕도 폐주 연산의 전례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순회세자가 죽자 운 좋게 왕위에 오른 주제에 그렇게 우리 양반들을 우습게보다니 이 나라 조선이 우리 양반들의 것이고 왕은 우리들을 대신해서 일이나 처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군. 다 중앙에 있는 양반들이 제대로 왕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생긴 일이야."
"그렇습니다. 영감. 이씨가 왕씨를 물리치고 조선을 세운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다 정도전의 써준 대본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옵니까? 그런데 이방원이란 작자가 왕권을 강화시키고 나서는 자신들이 이 나라의 주인인양 착각하고 있고 그래서 뜻있는 양반들이 반정으로 한번 혼을 내주었는데도 이제 50년이나 흘렀다고 다시 나서고 있으니 이번에야 말로 혼을 내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옳습니다. 영감께서 뜻을 세우신다면 저희들은 영감을 따라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소생들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이번에 모은 병사들의 재편이 끝나는 대로 거사를 일으키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김진기의 주변에는 병사들의 모집상황을 보고하던 집사를 제외하고도 김진기의 친인척 수십 명이 같이 앉아있었다. 이들이야 말로 김진기의 심복들로 김진기의 논밭 중에서 일부를 위임받아 풍족한 생활을 보장받는 대신 김진기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존재들이다. 거기다 김진기는 그들 말고도 수백 명의 식객이 있고 김진기의 농토를 경작하는 소작인들과 노비들이 수만이나 되어 비금도시절의 균을 연상하게 했다.
그런 그들을 보는 김진기는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마냥 흡족하지 많은 않았다. 그들은 충성심은 대단한 편이지만 그 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기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쓸 사람은 없는 '풍요속의 빈곤'을 실감하면서 그들에게 세세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이번에 운 좋게 많은 병사들을 우리가 흡수할 수는 있지만 이번에 흡수된 병사들은 그 능력이 관군에 비해서 많이 떨어져 훈련이 필요하다. 더욱이 나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 장수가 없는데 어찌 승산이 있겠나?"
"…….그러나 영감. 지금 봉기를 하지 않다가 다른 자가 봉기를 해서 영감의 공을 가로채면 어찌 하시렵니까?"
"그렇습니다. 거기다 우리가 흡수한 자들이 예상보다 많아서 5천이나 되는데 그러면 조정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가능성이 있어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와해가 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선수를 치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보았나. 우리가 흡수한 병사가 5천이나 되기는 하지만 소규모로 나누어서 비밀리에 이동시키는데다가 내가 다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분산해서 배치하면 그렇게 많은 티가 나지 않다. 또한 나를 제외하고도 병사들을 흡수하는 양반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는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야.
거기다 너무 먼저 나서도 오히려 관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을 염려가 있다. 차라리 다른 자들이 관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죽어가는 것을 기다려 뒤통수를 치는 것이 더욱 상책이다. 그리고 그 동안 병사들을 화적떼 토벌과 호랑이 사냥에 투입하는 척하면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유능한 장수를 받아드려 강한 군대를 기른다면 약화된 관군이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김진기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방안의 유생들은 이해를 했다는 듯 웅성거리더니 여기저기서 김진기의 뜻에 찬성을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렇게 한동안 분위기를 지켜보던 김진기는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따를 의사를 나타내자 다음 말을 이었다.
"더욱이 이 나라는 양반들의 나라이다. 거사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양반들이 우리를 따르느냐는 것이며 다른 양반들을 회유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양반들이 똘똘 뭉쳐 수십만의 대군을 만든다면 한성부의 어린 아이가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겠느냐?"
"옳습니다! 영감."
"그래서 나는 곧 한성부에 올라가서 관직을 얻으려고 한다. 거기서 양반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많은 동조자와 명성을 쌓을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멍청이들이 관군에게 토벌당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성부로 진군하여 하룻강아지를 왕좌에서 몰아낼 것이다."
"과연, 영감다우신 생각이십니다. 언제나 소생들의 아둔한 머리를 깨우쳐 주시는 영감의 지혜에 저희들은 감탄 또 감탄할 뿐입니다."
심복부하들은 무능했지만 김진기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컨닝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지 해먹는 말처럼 그가 무능하다면 아무리 뇌물을 받고 공금을 횡령하고 소작인들을 괴롭혀도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그의 생각도 틀리지 않아서 그대로만 된다면 균에게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