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친군위는 올해 초 해체된 구 중앙군의 부대중 하나로 주로 함경도 출신의 자제들로 구성된 부대이다. 명분은 함경도가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이고 태종 이방원을 호위하는 병사가 많이 나왔다는 것인데 그런 조선왕실의 함경도 우대정책은 이미 세조 때 이징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세조는 함경도가 자신에게 반발하는 반역의 땅이라고 생각했지만 친군위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친군위는 조선왕실의 대 함경도 정보기관이며 함경도의 유력한 토호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붙잡는 역할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동명의 경우도 친군위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는 균도 마찬가지로 친군위를 해체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해체한 것은 아니었다. 내금위 소속으로 일부 부대들이 이름을 고쳐 존속을 한 것이다. 실질적인 전투력은 없지만 군사개혁에 반발을 최소화하고 그들을 의장대 같은 용도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전관 박규남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구 친군위 소속의 위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쉽다. 조금만 밀어붙이면 되는데……."

비슷한 시간. 나상도방 김형중은 투덜거리면서 경상도의 최대 상단인 경상에 대한 공세를 아쉽게 중단해야 했다. 원래 조선과 왜국간의 국제교역을 바탕으로 발전을 해온 경상은 중종 때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명종 때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조선과 왜국간의 교역이 단절이 되자 급격히 쇠퇴했다.

그래서 균에게서 지원받은 윤원형의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설정이 일부 변경되었습니다. ) 급부상한 나상에게 밀리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예전의 경상이라면 신흥세력인 나상이 아무리 강해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겠지만 대외교역이 거의 중단된 이상 경상은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쓸데없이 규모만 큰 상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에 마음먹고 경상을 몰아치던 김형중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한성부에서 내려온 지령서를 소각했다. 그리고는 예하의 모든 도방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김형중은 자신이 경상을 못 먹게 만든 그 빌어먹을 반역자를 꼭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도방들에게 외쳤다.

"당장 충청도에서 가장 쌀 안 파는 지주 놈 찾아내! 그런 놈은 내 손에서 끝장낸다."

이렇게 충청도와 함경도에 대한 감찰을 강화시킨 균은 아울러 송상에 대한 감찰도 강화했다. 하지만 송상의 본단과 각 지부에 대한 침투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정작 중요한 보부상단에 대한 침투는 거의 실패해서 균과 박규남을 실망시켰다.

보부상단은 원래부터 상당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도움을 주었기도 했고 임진왜란 등 전란 때도 참가하여 강력한 조직력과 뛰어난 체력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급조된 첩자들이 철저하게 소규모 집단으로 운영되는 보부상단에 끼어들기도 힘든데다가 산길을 타고 넘는 강행군에 나가떨어지는 첩자들도 많았다.

덕분에 균은 원래는 송상 보부상단을 뒤쫓아서 손쉽게 요주의 인물들을 찾아낸다는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그냥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이번의 일들이 종료가 되면 송상 보부상단을 대상으로 병사들을 모집해서 특공대를 만들어 보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보기로 했다.

"이봐! 나주부. 벌써 이번 달에만 자네가 쓴 돈이 3만 냥일세. 물론 전하께서 연구비는 마음껏 쓰라고 하셨지만 자금을 관리하는 내 사정도 생각해 줘야지."

그런 일들이 있은 지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병기주부 나원호에게 재정주부 김호진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물론 병기부가 병사들이 쓸 무기를 만들어야 하기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잘 알지만 아직 보름도 채 안 됐는데 3만 냥의 돈을 타갔다는 것은 좀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기주부 나원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손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김호진이 나원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그 옆에는 약 수백 문에 달하는 각종 화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옆에는 큰 바퀴를 단 화포 십여 문이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김호진의 귓전으로 끔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잘 왔네. 전하께서 화포에 바퀴를 다 달라고 하셨네. 거기다가 정확히는 뭐더라……. 포가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것을 만들어 그 위에 포신을 결합하라고 하셨는데 처음인데다가 전하께서 설명하신 자료가 불충분해서 연구비가 많이 들었다네. 그래서 말인데 10만 냥만 더 있으면……."

"10만 냥……."

혹 때러 왔다가 혹 붙인 격이 된 김호진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김호진을 아득하게 만든 균의 계획은 바로 포병전력의 확보였다. 조선은 고려말기 최무선이 개발한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같은 화포를 시작으로 천, 지, 현, 황 화포로 대체되었다가 세종대왕 때 장군화통, 일총통, 이총통, 삼총통 등의 화포가 개량되어 조선의 주력화기가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화포는 명종 10년인 1555년을 기준으로 을묘왜변을 계기로 우리가 알고 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성능이 상당히 우수하여 조선수군이 왜수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의 화포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대로 된 포가가 없다는 것이다.

근세시대의 대포의 경우 크게 포신, 포가, 바퀴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중에서 포신은 포탄을 발사하는 긴 원통형의 부분을 말하며 화포의 사정거리와 명중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포가는 포신을 지지하며 포탄 발사시 생기는 충격을 흡수하고 포수에게 적을 조준하는데 편리함을 제공한다.

바퀴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화포에 기동성을 부여하여 야전에서 화포의 사용을 용이하게 만든다. 이렇게 세 부분 중에서 조선의 화포는 포신은 뛰어난 편이지만 포가와 바퀴가 없었다. 물론 조선에 비슷한 역할을 하는 도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 동차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쇼핑카트에 포신만 올려놓고 쏘는 수준이다.

반면 동시대 유럽의 경우는 이런 포가와 바퀴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포병이라는 병과가 독립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선이 수군전선이나 성 같은 한정된 곳에서 화포를 쏘고 있을 때 서양은 포를 끌고 나와 야전에서 사용했고 그만큼 많이 쓰였다. 그런 포병운용기술의 차이가 나중에는 큰 차이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포가를 사용하는 방법이 전수된 것은 약 100년 후인 인조와 효종시대의 일이다. 그 유명한 벨데브레와 하멜일행이 조선에 표류하여 대포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써본 포수들이 조준하기 편리하다고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포가의 제작이 큰 기술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화포의 운용 면에서는 대단한 발전이었다.

"김주부. 농담일세. 농담이야. 어떻게 10만 냥이 다 들어가겠나? 한 5만 냥만 더 있으면 되니 너무 염려 말게."

"아니. 5만 냥도 엄청난 거금이지 않는가? 그냥 바퀴붙이고 포가라는 것 만드는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나?"

"사실은……. 포신에 강선 파다가 잘못 판 게 많아서 화포를 다시 만들어야 돼……."

"……."

강선은 포신 내에 길게 판 홈이다. 이렇게 멀쩡한 포신 내에 홈을 파는 이유는 탄환이 강선을 따라서 돌면서 탄환의 회전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탄환이 비행하면서 공기저항을 받아도 탄환자체의 회전력으로 인해 추진력의 감소가 줄어든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정거리가 늘어나고 명중률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어 18세기 이후로 많이 채택되는 방법이다.

사실 포신에 강선을 파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미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연구되어 아주 일부지역에서 사용되었을 정도니 큰 기술력은 필요 없으면서 효과는 좋다. 하지만 강선은 나선형으로 파야하는데 숙련되지 않은 기술자들이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고 나원호가 난감해 하는 것이다.

거기다 강선을 많이 판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너무 작게 파면 사정거리의 증가폭이 작지만 너무 많이 파면 탄환과 포신과의 마찰력으로 인해 그 역시 사정거리를 제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적당한 수준의 강선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고 덕분에 제법 많은 화포들이 용광로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봐 김주부. 그래도 이러면 얼마나 효과가 좋다고. 사거리가 늘어나서 멀리 공격할 수도 있고 조준하기가 편하니 발사속도도 빠르고 바퀴가 달려서 야전에도 써먹을 수 있고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내금위 장수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차피 전하께서도 마음껏 쓰라고 하셨잖아. 돈 부족하면 알아서 채우실 거야."

상심한 김호진을 달래는 나원호의 말처럼 단 세 가지의 어렵지 않은 조치들이지만 화포의 성능은 월등히 향상되었다. 그래서 그전까지 조선의 화포는 해상전이나 공성전에서 쓰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야전에서 사용가능해졌고 기병과 보병으로만 구성되던 조선군에 포병이라는 병과가 추가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북한산성에 위치한 병기창에서는 매일 1문의 총통을 개조하거나 새로 주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현자총통 10여문과 황자총통 20여문이 개조되어 준비 중입니다."

"그럼 그에 걸맞게 철환도 일부 개조했겠지?"

"예. 전하. 기술력이 부족한 덕분에 돈이 무척 많이 들었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 조선의 장인들이 가진 손 솜씨는 가히 천하제일이옵니다. 이제는 그렇게 많은 연구비를 사용하지 않을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경복궁 후원의 취로정. 원래 균만 들어오던 곳에 오늘은 균과 도승지 정인기, 선전관 박규남, 내금위장 곽흘, 나원호, 김호진, 임꺽정, 서유생 등 균의 거의 모든 심복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도승지 정인기와 내금위장 곽흘의 참석은 이례적인 것으로 균의 원래 심복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균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병기주부 나원호의 보고를 받으면서 마음에 안든 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균의 심복들은 연구비가 많이 들어서 그런지 알았지만 사실은 연구비보다도 새로 만들고 개조된 화포들의 성능이 균의 마음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화포는 고폭탄이 아니라 큰 쇠구슬 즉 철환을 날리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폭탄은 고성능폭탄의 약칭으로 주로 신관을 이용하여 탄체를 폭파시켜 대량의 인마살상을 노리는 폭탄이며 현대에 가장 많이 쓰이는 포탄이다. 그래서 그런 고폭탄이 없다면 균이 만든 야전포 역시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폭탄을 만들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앞으로 포병이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절름발이와 같은 형국이니 균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이다.

"나주부. 수고가 많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화포의 개량에 총력을 다하라."

"예. 전하.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대강의 보고들을 들었으니 과인이 그대들을 이 곳까지 불러 모은 이유를 알려주도록 하겠다. 조만간에 우리 조선에 반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

균과 박규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상황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반란이라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이 임금의 입에서 나온 이상 쉽게 넘어 갈 사안이 아니다. 특히 자신들은 임금의 측근으로 반란이 성공하면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꼴이니 더욱 심했다.

"반란의 예정지는 충청도와 함경도 일대로 추정된다. 충청도는 과인의 정책에 반대하는 기호사림들의 근거지인 만큼 어느 정도 반발이 예상되던 곳이다. 그러던 것이 이번 군사개혁으로 해산된 병사들을 흡수하여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충청도 일대에 헛소문이 돌아 민심이 동요한다는 암행어사들의 보고도 있었다.

함경도는 원래부터 백성들의 기질이 강하던 곳이다. 이에 선대왕들께서는 갑사들을 파견하여 북방군의 허리를 장악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다스렸지만 그 갑사들은 이번 군사개혁으로 동요하고 있고 토호들 중에서 딴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는 듯하다. 이래서 유사시 우리는 남과 북 두 곳의 반란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박 선전관."

"예. 전하. 일단 저는 주상전하의 밀명을 받들어 우리 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시하여 전하께 보고하는 일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군사개혁으로 불충한 무리들이 준동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고 자세한 사항은 아니지만 대강의 준동계획에 대하여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그럼 모두 탁자의 지도를 보시지요."

어느새 탁자에는 상세하고 정밀한 수준의 조선전도가 새겨져 있었다. 현대의 지도처럼 무척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는 아니지만 균의 옛 기억과 기존의 조선 지도를 바탕으로 만들어 당시로써는 아무 정확한 지도였다. 특히 조선팔도의 주요 군사거점과 교통로가 잘 표시되어 있었다.

"먼저 충청도의 경우에는 해미에 있는 충청병영에 3개 여 375명, 비인, 남포, 태안에 각각 2개 여 250명. 이렇게 9개 여 총 1125명의 유방군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유방군은 겨우 도적 떼나 막는 수준이고 정해진 숫자를 채우고 있는지도 미지수 입니다. 거기에 충청도에서 진관체제를 통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4만 명은 되지만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 이들을 동원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빨리 불충한 무리들을 찾아내어 제거하지 않는 이상 충청도 자체의 군사력으로 반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히 이번 반군에는 해산당한 전직군인 7천 명이 가세하고 있어 일반적인 농민들의 반란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우리 내금위를 비롯하여 중앙군은 예전과 다른 상당한 정예병이네. 전직군인 7천이 있다고 해도 그 세력은 별 볼일 없을 터 나중에 1만 정도의 토벌군을 파병해도 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금위장 영감. 영감의 말씀대로 그런 농민군이 수만 아니 오만이 나타나고 거기에 이번에 해산된 병사들이 모두 가세해도 우리 중앙군의 상대는 아닙니다. 정작 문제는 그 파급효과입니다.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하거나 설사 반란이 일어났을 때 초동에 제거를 하지 못한다면 불충한 무리들은 얼마든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사후처리 문제로 많은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이 괴로울 것입니다. 더욱이 북방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 문제는 정말 큰일입니다. 북방군의 대규모 기병단이 남하해 온다면 중앙군으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충청도의 반란을 언급할 때는 별 걱정이 없었던 사람들이 북방의 문제를 언급하자 거의 사색이 되었다. 북방군. 그 끈질기고 위험한 여진족을 막아내는 조선의 방패. 그리고 조선 최정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들과 싸운다면 정말 큰일이다. 싸워서 이기기도 힘들고 또 이기더라도 조선의 북방방어는 구멍이 난다.

북방군이 언급되자 누구보다도 사색으로 변한 사람은 내금위장 곽흘이다. 그는 균이 비금도에 있을 때 전라우수사로 있었다가 그 능력을 인정받아 무관들의 꿈이라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근무한 전력이 있다. 그다음에 한성부로 돌아와 내금위장이 된 사람인만큼 북방군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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