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128 회]
즉위 3년.
신임 병조참의 김진기는 어느새 난감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조선의 정세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부와 부여현은 고작 4백리의 거리 밖에 되지 않고 소통이 불편한 것이 아니기에 한성부의 소식을 전해 듣는데 불편함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균이 등장한 이상 정세변동이 그렇게 느릴 리가 없었다.
'이거 부여현에서 친인척들에게 호언장담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군. 언제 조정이 이렇게 바뀌어버린 거지?'
김진기가 아는 조정은 균이 막 즉위했을 때 전후, 즉 방납업자들과 다툼을 벌일 무렵의 일이었다. 이 때 조정의 분위기가 좋지 않게 돌아가면서 잠시 낙향을 했던 것인데 그 사이 조정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조정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으니 예상보다도 조정의 권위가 강했다.
이황과 조식 같은 유명한 대학자와 이준경 같은 명재상을 치지 않더라고 균이 임명한 노수신, 박순 같은 대신들의 대부분은 후대에도 그 이름을 남긴 뛰어난 신하들이다. 특히 선조 때는 인재의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인재가 많아서 그가 병조참의가 되는데도 상당한 운과 뇌물이 소모되어야 했다.
거기다 자신이 병조참의가 되어 알게 된 중앙군의 전력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조선의 현 중앙군은 약 1만 6천의 상비군과 4만의 번상시위군으로 구성되는 총 5만 6천의 대병력이다. 이중 한성부로 올라와서 복무를 하는 번상시위군은 사실상 무력화된 상황이고 실제로는 상비군이 전부인데 이 전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균이 아직 56식 비금도소총이라는 신무기를 공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대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는 상비군이라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조선중앙군은 강력했다. 당장 한성부의 외곽을 지키는 수비대의 모습만 보아도 그전의 병사들과 차이가 났다. 무장이나 복장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병사들의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정예병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나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다. 김진기의 주변에서는 균의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양반들이 많았고 김진기 역시 그런 점에 힘을 입고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한성부의 경우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김진기는 난감했던 것이다.
'내부가 동요하지 않으면 외부의 공격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계란이 좀 많기는 하지만 어떻게 단단한 바위를 깰 수 있다는 말인가?'
김진기는 새로운 왕이 의외로 군대와 정권을 잘 다스리고 있는 것에 당혹스러웠다. 뭐가 빈틈이 있어야지 찔러라도 볼 것인데 조정과 한성부 일대는 예상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고 자신의 준비는 오히려 지지부진했다.
그가 출사를 한 것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동조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일단 균이 훈구파, 영남학파, 남명학파에 우호적인 성향을 보내면서 이들을 지원하고 있어 그가 속한 기호학파가 크게 위축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조정에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입지가 너무 좁았다.
또한 그가 거금을 들여서 영입한 병사들의 경우에는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전직 군인이라는 자들이 하얀 얼굴에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고 칼을 들고 훈련을 하기는커녕 책을 보고 대과를 준비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오합지졸을 중심으로 군대를 만들어보려고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별 수 없군. 일단 세력을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자제하고 왕의 주요정책들을 비판하고 양반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자들의 분위기를 살펴야겠다. 아직 나는 움직인 것이 없으니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다음 기회를 노려도 되겠지. 그럼 한번 왕을 알현하러 가볼까?'
"아니 자네. 병조참의가 아닌가?"
"예. 예판대감. 이제 입궐하시는 길이시옵니까?"
"하하하. 내가 나이가 들다보니 일찍 일어나더라도 따뜻한 아랫목이 좋아서 오늘 입궐이 늦었다네. 그런데 자네 이런 소문은 들었나?"
균을 만나러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김진기를 막아서는 존재가 있었으니 예조판서 이황이었다. 이황은 마침 심심했는지 김진기를 붙들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참 후 김진기는 겨우 해방이 되었지만 곧 다른 사람을 만나야 했다.
"허허허. 병조참의 지금 뭐하나? 바쁜 일이라도 있는가?"
"호…호판대감 아니시옵니까?"
"그래그래. 바쁜 일이 없다면 우리 이야기나 하세."
"…예. 대감."
'이거 미치겠네. 정승판서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해가 다 가니 언제 왕을 만나러 가나…….'
원래 육조의 판서(정 2품), 참판(종 2품), 참의(정 3품)는 계급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발언력에서 차이가 나지 않았다. 판서가 한 말을 참의가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판서들은 소홀히 대했다가는 양반들 사이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비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김진기는 정작 중요한 균을 알현하는 것이 너무나 힘겨웠다.
그렇게 김진기가 힘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을 때 멀리 함경도의 운총만호 이동명도 골치를 썩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균의 조치가 이제야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방군은 우리 조선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부대로 심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그 노고가 많다. 그간 조정에서는 북방군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웠지만 실질적이라기보다는 미봉책이 많았다. 이에 과인은 이번에 군사개혁을 단행하여 군적에 이름만 올린 채 군사비를 축내던 무리를 내쫒고 그 군사비를 북방군의 처우개선에 사용하고자 하노라.'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균의 조치는 한마디로 북방에 파견된 갑사들에게 중앙군과 같은 녹봉을 지급하고 북방군소속의 모든 군관과 병사들에게 상급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공문을 읽어본 이동명은 놀라서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 않았다. 자신이 예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균이 자신의 병사들에게 주는 봉급은 매달 5냥이고 그 정도면 쌀 1섬에 해당한다. 요즘의 쌀 가격으로 따지면 얼마 안 되는 듯하지만 당시 가치로써는 대단하다. 가장이 없는 한 가족의 생활비가 한달에 1냥이고 조선시대의 직업군인인 훈련도감군의 월급이 2냥, 행상을 하는 가난한 상인이 한 달 동안 열심히 물건을 팔면 3냥의 이익이 남았다고 하는데 이것에 비해서 5냥이란 돈은 큰 돈이다.
그만큼 균의 부담이 많아 재정주부 김호진이 곡소리를 내는 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웬만한 자영농(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보다도 나은 수입을 보장해 주워 병사들의 충성심과 사기가 높았는데 이것이 북방군에도 적용이 되면서 균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동명이 놀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으리. 조정에 보내온 소금이 10만 섬이 넘는다고 하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북방군에는 조정에서 충분한 양의 소금을 보내주어 그 노고를 보상해주겠다는 벽서가 곳곳에 붙고 있습니다."
"10만 섬! 그 정도면 수십만 냥이나 되는 거금이지 않느냐? 조정이 그렇게 돈이 많았다는 말이냐? 거기다 북방군 병사들과 가족들에게 소금을 공급하려면 매년 몇 만 섬의 소금이 필요할 텐데 그 돈은 다 어디서 구한다는 말이냐?"
조선에서 가장 소금이 귀한 곳은 바로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간지방이었다. 그래서 이곳 삼수갑산 같은 개마고원 일대에 복무하는 군인들은 소금을 사서 임지로 간 후 그것을 팔아서 생활비로 사용하고는 했을 정도로 소금이 귀했는데 균이 자신의 주력상품인 비금도산 천일염을 풀어버린 것이다.
균은 앞으로도 북방군에 복무하는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소금을 무료로 공급해주겠다고 약속을 하여 인심을 크게 얻었다. 병사들은 귀한 소금을 받은 것도 기뻤지만 멀리 있는 왕이 자신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에 더욱 감격을 하고 있었다. 함경도나 평안도 일대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 조정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처사였는데 그것이 한번에 해소가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흔들리던 갑사들의 동요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갑사들이 동요했던 것은 힘들게 여진족과 싸우는 자신들의 노고를 몰라주는 조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데 이번 공문에서 밝혀진 대로 군대에서 추방당한 것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군사비를 낭비하던 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군사개혁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피땀을 흘리며 적군을 막고 있는데 후방에서 군적에 이름만 올리고 봉급을 타가던 자들이 그들의 동료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공문대로 매달 5냥의 거금이 지급되고 소금을 무상으로 받게 되는 등 이번 군사개혁의 최대수혜자가 되어버린 갑사들이 반란에 참여할 가능성은 없어져 버렸다.
균이야 남는 소금 좀 챙겨주고 갑사들에게 봉급을 현실화 시켜준 것에 불과했지만 덕분에 이동명은 조금 좋은 때를 기다리다가 날벼락을 맞을 꼴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균의 소금수레가 도착하기 전에 난을 일으켰으면 모르지만 이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반란을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빨리 움직이는 것인데……. 오히려 좋은 기회를 놓쳤구나.'
이동명은 땅을 치면서 후회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주변에는 많은 부하들이 있었기에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힘들기는 하겠지만 여진족들과의 협력에 사활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예상과는 다른 정세변화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무렵 송상의 행수 안지연은 개성으로 복귀하는 보부상들이 가져온 소문을 들으며 조정의 움직임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니 무엇인가 흐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번 일의 발단은 아무래도 작년 말에 있었던 대규모 군사훈련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왜구의 투항과 조공이 발표되어 전국적으로 소문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힘을 받은 왕은 신하들로부터 군사권을 돌려받고 올해 초 조정의 주요 요직에 명망 있는 신하들을 임명하여 조정의 시책이 힘을 받도록 사전 작업을 실시했다.
이러한 작업이 끝나고 나서도 작년 재정이 큰 흑자를 기록했다는 유리한 소식을 접하고 나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비변사를 해체하여 양반들의 군사권에 대한 간섭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리고 병무청을 신설하여 지방군영들의 재정을 장악하여 지방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여기까지는 분명 왕의 군사권 장악이라는 하나의 정책으로 일관성이 있다. 그런데 군대는 많을수록 좋다는 통설을 깨고 왕은 1만 3천의 군대를 해산해버렸다. 그리고 그만큼 대소신료들에게 군사개혁에 대한 저항을 적게 받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수가 줄어든 군대는 약해지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산된 병사들은 지방 유력자들의 사병이 되었고 북방군에도 불순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분명히 왕의 실책이다. 거기다 군대해산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왕은 신하들의 많은 지적을 무릅쓰고 일을 추진했고 그 자리에서는 군적, 호적, 전적의 일제조사가 결정되었다.
"이상해. 군인, 인구, 토지를 재조사한다면 당연히 지방유력자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왜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면서까지 병사들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최소한 군대를 해산하려면 그 뒤에 해산하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안지연은 균의 즉위 이래 그가 해왔던 정책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초기 균의 정책이 경제분야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왕이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 군사개혁은 의외였고 그녀의 머리로써는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냐옹~~!!!"
"이놈의 도둑고양이! 내가 너를 못 때려잡으면 사람이 아니다!"
"냐옹!!!"
밖에서 안성희가 고양이를 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성희는 안지연의 먼 친척뻘에 해당하는 여자였는데 안지연과 나이가 비슷해서 거의 친구로 지냈다. 그녀가 송상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참 똑똑한 여자였고 안지연은 그런 점을 높이 사서 자신의 부서에서 일하게 했다.
안성희는 자신만큼이나 똑똑하고 부지런하여 안지연에게는 큰 도움이 되어주는 친구였지만 불행히도 성격이 좀 급했다. 그래서 송상에서 일하는 사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여인이었는데 안성희가 사고를 치면 안지연이 뒷수습을 하고는 했다. 그래서 안지연은 안성희를 말리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섰다.
"성희야~! 다 큰 처녀가 조신하지 못하게 그게 무슨 짓이야."
"글쎄 저 놈의 고양이가 얼마나 영악한지 알아? 일단 다리가 아픈 척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기에 불쌍해서 나두었더니 생선창고에 들어가서 생선들을 다 못쓰게 만들었다는 말이야! 그것도 한 마리만 먹으면 모르겠는데 모든 생선을 조금씩 잘라 먹어서 다 버려야 해. 그리고는 저렇게 네 다리가 멀쩡해서 도망도 잘 간다구."
"호호호. 그건 나중에 다시 사면되지. 그렇게 신경질 내면 얼굴에 주름져서 시집 못 간다. 그건 그렇고 참 영악한 고양이……."
안성희의 하소연을 듣던 안지연의 머릿속을 순간적으로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색이 되어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안지연은 즉시 보부상들이 머무는 곳으로 달려갔다. 평소에 침착하기로 유명한 그녀가 보이는 그런 행동에 안성희도 한마디를 하고 사라졌다.
"기집애. 매일 나보고 조신하지 못하다고 하다니 지가 더 하네. 그건 그렇고 요즘은 할일이 너무 많네. 고양이는 나중에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