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129 회]
즉위 3년.
다시 한성부의 경복궁 취로정. 균은 홀로 유유히 백과사전의 책장을 넘겼다. 곧 두 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여유가 넘치는 표정을 지은 균은 곧 백과사전을 읽다가 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628년 산서지방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굶주린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명나라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에 있던 역참을 폐지하였는데, 갑자기 생계를 잃은 역졸들과 군량미를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도 반란에 가담하게 되어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쯧쯧쯧.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라는 작자도 제 조상을 닮아서 멍청하군. 아무런 대책 없이 군인들을 풀어버리면 반란군이 되라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나처럼 이용해 먹을 생각이라도 했으면……. 하긴 그 정도 생각이 있었다면 자기가 거느린 뛰어난 명장 원숭환을 죽이지도 않았겠지."
균은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한 명나라 의종을 비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히 균은 1만 3천의 군대를 해산하여 불순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왜 그런 자충수를 두고도 저렇게 명나라 의종을 비웃는 것일까?
균이 해산한 약 1만 3천에 해당하는 병사들은 사실 병사가 아니다. 병사라기보다는 군적에 이름만 올린 연약한 서생들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중앙군에는 의외로 이런 자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중앙군이 특정계층을 배려하는 일종의 복지기관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당히 역사가 오래되었다.
족친위, 충의위, 충찬위같이 대놓고 대우를 했던 것 외에도 갑사의 경우에는 이미 태종 때부터 이름만 군사인 자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승문원(외교문서를 담당)의 관리들에게 갑사로 녹봉을 받았고 내금위 위사가 갑사로써 녹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중앙군의 주력이자 정예부대인 갑사는 다른 부대와 문신들에게 잠식되어 무력화되어갔다.
그 결과 지난 을묘왜변에는 파견할 중앙군이 없어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4개월이 걸렸고 임진왜란 때는 늙은이와 아이들까지 모아서 고작 3~4천의 군대가 탄금대로 향했던 것이다. 만일 중앙군의 제대로 된 활약상이 있었다면 균의 생각이 달라졌겠지만 전쟁이 나도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 병사일리는 없다.
그리고 이런 쓸모없는 자들을 계속 유지하는 데 드는 돈은 약 78만 냥이다. 현재 조선 국가재정 225만 냥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이 쓸모없는 곳에 소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정리하여 국가예산을 아낄 필요가 있었지만 이들을 정리해고 할 경우 밥줄이 끊어진 그들의 집단반발이 예상되어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균은 이들을 다른 용도에 사용해 보려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균이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경찰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경우 경찰과 군대가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의 경찰에 해당하는 포졸이 포도청에서 복무하는 군졸의 약칭이니 그 상황을 알만했다. 하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빨리 도둑을 잡지 않고 뭐하는 것이오?"
"헤~! 헤~! 헤~! 선비는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뛰지 않소. 헤~!"
빨리 걷는 것도 힘겨워 헥헥거리는 사람이 다수였다. 이래서 포기, 그 다음으로는 금화군 즉 소방수로 이용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불이 났으니 어서 물을 나르시오!"
"끙~!"
"……."
그렇게 체력이 안 되고 물동이를 잡고 낑낑거려도 소집에 응한 사람들은 소수였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오지도 않았다. 이에 균은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규정대로 갑사시험을 치러 거기서 합격된 사람들만 군인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창과 활을 다루는 시대가 아니라 총을 다루는 시대이기에 그 기준을 조금 낮추어 잡았다.
그 결과 해당자 2만 3천 명중에서 합격자는 1만 명이었고 나머지 1만 3천은 정리해고 당했다. 솔직히 말해서 균의 예상치보다도 정리해고 대상자가 많아서 균의 실망이 컸다. 물론 중앙군을 개편하면서 병력을 축소시키는 덕분에 신하들의 반대가 적어 신속한 개편이 이루어졌다는 장점은 있지만 군사력은 양과 질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기에 균은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균은 소수의 군대로도 최대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은 군사비로 무기개발을 서둘렀다. 나원호가 화포에 포가와 바퀴를 설치하고 강선을 파서 화포의 성능을 증대시키는 일을 한 것도 병력의 부족을 무기의 우세함으로 채우려는 균의 군사강화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나서 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들을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였다. 마침 균은 신하들로부터 제안을 받기 전에 이미 토지, 인구, 군정 전국일제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런 일제조사가 이루어지면 중앙정부는 여러 가지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토지조사를 하게 되면 세금을 내지 않던 토지에 세금이 부가되어 토지세수입이 늘어난다. 이러면 토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방유력자들의 부담은 늘어나고 중앙정부의 세금 수입은 증가한다.
인구 조사와 군정 조사의 경우에도 지방유력자들의 부담은 늘어나고 중앙정부의 세금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중종반정 이후에 중앙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유력자인 양반, 토호, 향리들이 백성들로부터 세금은 많이 거두고 중앙에는 조금만 올려보내는 일들이 잦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조사의 경우 균과 중앙정부에게는 유리하지만 지방유력자들의 부담이 증가하기에 강력한 반발이 예상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는 백년에 한번 조사를 하거나 전국 일제조사가 아닌 각 지방별로 알아서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가난한 조선조정은 더욱 가난해졌고 그 부담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넘겨지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균은 역사적으로는 100년에 걸쳐서 시행되는 대동법을 수미법이라는 이름으로 단 1년 만에 시행하고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하여 지방세력과 빈번한 충돌을 벌였다. 거기다 중앙의 경우는 내금위의 강한 군사력과 외수사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사실상 균의 장악력이 강화된 반면 지방의 경우는 중종반정 이후 약화된 중앙통제력을 틈타 향약을 내세운 양반들의 향촌지배체제가 수립된 상황이다.
따라서 왕권주의와 중앙세력을 대표하는 균과 신권주의와 지방세력을 대표하는 지방 유력자들 간에 심각한 충격이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더욱이 저번의 수미법 시행 때는 국가재정이 파탄이 나기 직전이었기에 참았던 지방유력자들이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일제조사. 그것도 균이 원하는 수준의 치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 무렵 균과 양반들의 세력을 비교한다면 단순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의 전체 토지와 인구 중에서 양반들의 세력 하에 있는 것이 약 70~80%로 추정하는 반면 균의 세력을 토지로 환산하면 약 5%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경우 양반들이 일치단결되어 있지 않아 균이 각개각파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미 양반계층은 대가. 세가. 향반. 잔반 등 여러 계층으로 세분화되었고 균과 이익을 다툴만한 양반의 수는 작지만 그 세력은 강했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자칭 명문가들이 뜻을 모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에 균을 지원해야 하는 조정 역시 양반관료들이 사실상 움직이는 조직이니 결론적으로 아직 조선은 균의 나라가 아니라 양반의 나라였다.
따라서 균은 양반전체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행위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인식했고 적을 한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치 이상적인 항암치료를 하듯이 주변의 세포들은 죽이지 않고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방식, 즉 다른 양반들을 선동하여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자들을 공격하여 제거한다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균은 이 두 사건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군대를 해산시켜 쓸데없는 군사비 부담을 덜고 해산된 병사들을 흡수하는 야심가들을 찾아내어 철저한 감시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군대 1만 3천을 해산하는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균이 1만 3천의 군대를 해산하여 얻은 단순한 이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규모 인원감축으로 인한 군사비 절감효과. 둘째, 병력의 감축으로 신하들의 반발이 적어 빠른 속도로 중앙군개혁 달성. 셋째, 남는 군사비를 신무기 개발과 보급에 투입. 군사력의 질적인 강화. 등이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단점은 조선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것도 균이 바라던 바이니 단점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번 일로 추가되는 이익이 더 있으니 그것도 상당하다. 그래서 균은 백과사전에 나오는 명나라의 의종을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군대를 해산하려면 과인처럼 손익을 따진 후에 철저히 움직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긴 그런 멍청한 자들이 명나라의 황제들이니 나중에 우리 조선이 세력을 떨치는 데는 유리하기는 하지.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잘 배우라고. 하긴 네가 즉위할 때까지 명나라가 남아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균의 말처럼 중앙군의 감축은 단지 본 계획을 위한 균의 사전조치였을 뿐이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중앙군의 감축은 왕권이 약해진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특히 지방의 경우에는 쓸만한 갑사들이 지방군의 하급지휘관으로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소수의 정예병만 보고 지방 사람들은 중앙군은 강한 군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심이 있는 자라면 저렇게 강력한 중앙군을 흡수했다가 나중에 정세가 유리해지면 한성부로 진공하여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독을 바른 미끼일 뿐이다. 균의 성격상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했다면 지금쯤 배가 아파서 죽을 지도 모르는 사람이 균이다.
먼저 해산된 병사들 사이에 첩자가 있었다. 균의 정보조직은 고작 경기도 일대를 감찰하는 것이 한계이고 나상의 경우는 정보단체가 아니라 상인집단이다. 거기다 두 단체는 이제 겨우 생긴지 3년이 된 곳으로 하부조직망까지 튼튼하지 못하다. 하지만 박규남은 해산한 병사 1만 3천명의 행방을 거의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도 일이 있은 지 한참 뒤의 일이고 그 범위도 전국적이다.
원래라면 박규남이 1만 3천명을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할 수는 있지만 수천 명의 숙련된 정보원이 그 몇 달 동안 감시를 해야 하는 일이니 지극히 비능률적이다. 그런 박규남이 균에게 충청도와 경기도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흩어진 소수의 인원들에 대해서도 곧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릴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미 그들 사이로 숨어든 첩자들의 보고 덕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한계가 있었다. 직접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정확한 정보를 빼내는 것은 좋았지만 그 정보를 자주 보고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야심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은 첩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감시를 피해야 하기에 한성부의 박규남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정확하지만 한정적이었고 그래서 반란군의 주동자는 다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반란군은 군사비 부담으로 오래 버틸 수 없다. 남부지역의 반란군중 최대 세력가 십만석꾼 김진기를 보면 그 문제가 들어난다. 일단 그가 보유한 군사는 약 5천명이다. 이들에게 현재 중앙군이 받는 녹봉과 비슷한 수준의 봉급을 지급하면 매년 30만 냥의 지출이 생긴다. 참고로 그의 1년 수입은 약 25만 냥이니 매년 5만 냥의 적자가 난다.
거기다 병사들에게 무장을 갖추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비밀리에 5천 명의 무장을 챙긴다는 것은 일명 웃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한 지출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김진기가 병사들을 간단히 창과 활로 무장을 해도 균이 중앙군을 총과 화포로 무장시키는 것 보다 더 많은 돈이 들고 시간도 더 걸릴 수 있다.
이렇게 김진기 등은 군자금문제에 봉착을 하게 되는데 이러면 완벽한 준비를 위해 오래 기다릴 수 없다. 따라서 반란군은 불충분한 준비를 한 상태로 봉기를 해야 하고 내부의 첩자가 혼란을 일으키고 기다리고 있었던 중앙군이 바로 행동을 개시한다면 반란은 아주 쉽게 마무리가 된다.
이렇게 중앙군의 감축으로 인해서 균은 추가적으로 주요 반란세력을 모조리 알아내고 그들의 상황을 안팎에서 감시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부담을 반란군의 부담으로 돌려버려 그들의 자금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것이 이번 군사개혁으로 인해 추가되는 이익이다. 이정도만 해도 균은 무척 이득이 많지만 그의 계획이 끝난 것은 아니다.
반란군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그 세력이 커지고 또는 작아진다는 점이다. 이는 반란군이 기존의 체제를 물리치고 자신들의 이익을 얻고자 일어나는 집단이기 때문인데 반란군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다면 그 세력이 강해지지만 아니라면 약해진다.
역대 많은 반란들이 실패한 이유가 여기 있다. 먼저 많은 자들이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여 많은 세력을 확보하지 못해서 무너졌다. 또 많은 세력을 모으더라도 반란군 자신이 이익을 쫓는 자들의 모임이기에 손익을 다시 계산하고 마음을 바꾼 내부의 배반자가 발생하여 자멸하는 길을 걸었다.
따라서 조선의 정세가 바뀌어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설정이 되느냐가 반란의 규모를 결정하고 그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하지만 조선의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조선국왕 이균이다. 균은 자신의 행동여하에 따라 반군세력의 행동을 조정할 수도 있는 유리한 입장을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먼저 균이 양반들에게 불리한 법을 정한다고 하면 양반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그들의 불만을 이용하려는 주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주동자들이 지금의 김진기 등이다. 그런 양반들의 불만을 듣고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한 김진기 등은 그들을 믿고 야망을 키운다.
이때 균이 실책을 하는 척한다. 그러면 김진기 등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킬 기회로 삼고 조용히 군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균이 한 번 더 양반들에게 불리한 법을 정하면 양반들은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실력행사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이때 김진기 등이 등장하여 불만을 부추기고 불만세력을 모은다. 그리고는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반란의 주동자로 자리를 잡는다.
이 무렵이 되면 균이 양반들을 무척 풀어준다. 양반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공언하고 다니고 양반의 양반에 의한 양반을 위한 정치를 떠들어 댄다. 동시에 양반들은 균을 따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반란에서 손을 떼고 홀로 남은 주동자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한다.
특히 해산당한 중앙군 병사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가지고 있던 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야망을 달성해줄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목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고 만다. 대규모의 사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제적인 파탄상태가 되고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거기다 배신한 양반들의 일부는 발 빠르게 균에게 자신이 본 것들을 실토한다.
남은 것은 반란 주동자들에게 최후의 발악이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중앙군에게 처참히 박살난다. 특히 그들이 믿고 있던 해산된 병사들이라는 것이 신분만 양반이지 군사적인 가치는 전혀 없는 자들이니 중앙군은 쌍방간에 거의 피해 없이 반란을 진압한다. 이렇게 균이 정책결정을 적당히 조절하면 조선에서 균을 위협할 자들은 거의 씨가 마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조선을 기다리는 것은 반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의 대대적인 사정한파와 전국일제조사가 된다. 이에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반역자로 몰리게 되니 조선의 토지, 인구, 군정이 정확히 파악되고 그 전까지 중앙집권적인 전제왕권을 표방만 하던 조선은 실제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기틀을 잡는다.
이로써 균은 내전으로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양반들 중 극소수만 제거하는 상황에서 1차 개혁을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피를 거의 보지 않는 상태에서 양반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균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승패는 싸우기 전에 결정된다고 했다. 이왕 싸울 꺼라면 최소의 피해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편이 낫겠지. 양반들이 밉기는 해도 그들 역시 얼마든지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엘리트들이니까. 그건 그렇고 오늘 밤참은 뭐더라?"
균은 성장기 청소년답게 맛있는 밤참을 기대하면서 콧노래를 응얼거리며 취로정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