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즉위 3년.

'또냐?'

한창 맛있는 밤참을 기대하며 강녕전으로 돌아온 균은 자신의 앞에 놓은 밤참을 보고는 크게 실망을 했다. 또 균이 가장 싫어하는 강장식품이었던 것이다. 물론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나면 밤에 잠이 안 오는 음식이니 균은 선뜻 수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전하.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면 수라간에 일러 다른 밤참을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됐다."

마음 같아서는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밤참을 가져온 상궁나인들이야 다 대비들의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서 하는 일이니 균은 참기로 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눈앞의 검정깨죽을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오늘 잠은 다 잤군.'

원래부터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대비지만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은 일치하는지 매일 균을 못 살게 괴롭혔다. 여름철이라서 더욱 심해지는 궁녀들의 육탄공세가 왕대비 박씨의 작품이라면 이렇게 매일 올라오는 강장식품은 대비 심씨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 왕실의 번창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만 정작 균은 죽을 맛이었다.

'내가 수절하는 과부도 아니고 매일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니…….'

균의 나이가 이제 17살이니 한창 때이다. 요즘으로 치면 방황하는 청소년이고 당시로 치면 이팔청춘 즉 16살을 넘긴 나이이니 혼기가 꽉 찬 총각인 셈이다. 그런 균에게 강장식품을 먹이는 것은 잠자지 말라는 소리와 다를 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균은 검정깨죽을 다 먹고 나서 한 마디 했다.

"승정원에 일러 숙직을 하는 승지와 사관을 모두 들라고 하라. 그리고 그간 미루어둔 계본, 계목, 상소문들 모두 다 가지고 오라고 하라."

"……전하. 혹시 야근이시옵니까?"

"상선이라면 저런 것을 먹고 잠을 이룰 수 있겠....구나. 흠! 흠! 아무튼, 어서 물도 떠오고 먹도 갈아야지? 상! 선!"

"……."

균은 목소리를 높여서 자신이 처한 입장을 설명해 주려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내시에게 그런 말을 해봐야 제 입만 아픈 것이다. 그래서 균은 다르게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같이 야근을 시키겠다는 균의 말을 들은 내관 정성우은 벌써 며칠째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균은 죽어도 절대 혼자 죽지는 않는다.

"아니. 예판대감께서 밤늦게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시오?"

"허허허. 남명. 자네 산천재에서 은거를 할 때보다 농이 많이 늘었군."

"아무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니 그럴 수밖에……. 그건 그렇고 밤늦게 무슨 일로 왔는가? 아무리 자네가 조정의 중신이지만 이렇게 늦게 돌아다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결코 좋지 않을 것인데……."

"자네도 소문을 들었나 싶어서 찾아왔네."

"무슨 소문 말인가?"

그날 밤 조식의 집에 이황이 아무 말도 없이 들이닥쳤다. 밤늦게 기별도 없이 찾아온 예조판서 이황이 뜬금없이 소문이야기를 꺼내자 호조판서 조식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황은 헛기침을 몇 번 했고 조식은 바로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사람들은 다 물렸네만. 그래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우리 퇴계선생께서 호들갑이신가?"

"방금 막 내 상경한 내 제자들에게서 들은 소문인데, 충청도가 심상치 않다고 하네."

"충청도가? 하긴 충청도의 양반들은 주상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가장 홀대를 당해오기는 했지. 우리야 여러 가지 이유로 주상전하께서 벼슬도 내려주시고 이렇게 집도 장만해 주시는 듯 신경을 써주셨지만 지난번 구도장원공(이이)의 일도 있고 지금도 수미법의 문제로 다투고 있지 않은가?

특히 누구더라……. 아! 병조참의 김진기라고 해서 주상전하가 하는 일에 번번이 회방을 놓는 자가 있는데 그 자도 충청도 출신이라고 했지? 그런데 우리 퇴계선생께서 심각한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보통 소문은 아닌 듯 싶네만?"

"자네도 알겠지만 충청도 양반들이 각 유향소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수미법을 거부하고 그 부담을 백성들에게 떠넘기고 있네."

유향소는 조선시대의 지방자치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원래의 목적은 각 지방 양반들이 모여서 중앙에서 내려온 각 고을 사또를 보좌하고 견제하는 곳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된 적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시애의 난 때는 난이 일어나자마자 유향소의 양반들이 신속하게 반란군에 가담하여 반란군의 함경도 평정을 돕기도 했다.

나중에는 유향소 대신 서원이 양반들의 각 지역 거점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고 현재는 유향소를 중심으로 한 양반들의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조정의 시책에 반대를 하는 경향이 심한 충청도에서는 각 고을 사또들과 유향소의 양반들 간에 다툼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우리 호조에서도 알고 있네. 원래 수미법을 관장하는 부서가 우리 호조가 아니던가? 그런데 일이 그렇게 심했다는 말인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각 고을 수령들이 보내오는 공문과 암행어사들로부터 수집한 정보가 고작일세. 그래서 지방의 사정은 다 모르고 있다네."

"듣자하니 보통 일이 아닌 듯싶네. 처음에는 일부 양반들이 거부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난번 중앙군의 감축 이후 많은 병사들이 충청도로 흘러들었고 그 뒤로 그들의 반발이 나날이 심해져 지방관아의 명령이 제대로 서지 않고 있다네. 거기다 여러 가지 헛소문들마저 돌아 민심이 동요하고 있으니 나중에 큰 화가 될지도 모르네."

"정세가 좋지 않으니 야심을 품는 자들이 생기겠군. 그래. 퇴계 자네는 그것이 걱정이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인가?"

"이 사람 남명. 왜 그렇게 태평인가? 까딱하면 나라에 큰 변고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판국에 조정의 중신인 자네는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네."

"남명! 나라의 중신인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당장 대책을 세워 주상전하께 상주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퇴계 이황의 학풍은 왕권주의에 가깝다. 왕이 잘하던 못하던 무조건 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평안히 하는 것이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의 학풍이다. 그래서 이황은 남인들의 시조답게 이렇게 남명 조식을 찾아와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식은 태연한 표정에서 전혀 바뀌지 않았다.

원래 조식의 학풍은 실리주의이다. 어느 정도로 실리적이냐고 묻는다면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면 왕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조식이 태연한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현재 조정의 중신들 중에서 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조식이기 때문이다.

"퇴계. 자네도 알겠지만 내 제자 중에 곽재우라는 아이가 있네."

"영천군수를 지낸 곽월공의 자식말인가? 꽤 영특하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것이 이번 일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 아이가 지금 내금위에 소속되어 주상전하를 호종하는 일을 맞고 있다네. 그러다가 가끔 시간이 나면 이 곳에 와서 쉬고는 하는데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 전하께서는 숨쉬는 것도 계산하고 쉬신다고……."

"……?"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손꼽히며 예조판서의 자리에 있는 퇴계 이황은 조식의 말에 숨은 뜻을 몰라서인지 몰라서 주름진 얼굴에 한 가득 물음표를 그렸다. 그러자 조식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휴~! 내가 알고 있는 말로는 전하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네. 자네 제자중 하나가 사관으로 있다지? 그 아이에게 한번 물어보게. 아마 그 아이도 단언을 내리지는 못할게야."

평시 대궐 내에서 숙직을 하는 사람은 여러 명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숙직은 바로 임금의 옆을 지켜야 하는 지밀상궁들이다. 지밀상궁들은 임금과 같은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방에 딸린 작은 방에서 근무를 하는데 추운 겨울철이라도 이불이 제공되지 않는다. 항시 임금의 신변에 위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감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숙직자들처럼 잠시 눈을 붙칠 수도 없고 배가 고파도 무엇을 먹을 수도 없으며 용변이 급해도 다음 교대근무자가 올 때까지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런 지밀상궁들에게도 요즘 낙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균의 야근에 같이 고생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였다.

"상선. 먹물 튀기네."

"망극하옵니다. 전하."

"동부승지. 먹물이 아닌 침으로 글씨를 쓰면 상선이 밤을 세워서 먹을 간 보람이 없지 않은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렇게 졸고 있던 두 사람에게 주의를 준 균은 가만히 졸고 있던 사관에게도 그 마수를 뻗었다. 때마침 잠이 들락말락한 상태에 놓여있던 예문관 검열(정9품) 유성룡은 귓가에서 들려오는 큰 박수소리에 놀라서 졸음에서 깨어났다.

"짝~! 짝~! 여름이라서 그런지 모기가 많군. 아니 사관. 이제 일어난 것인가?"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이 어찌 감히 전하가 계시는 곳에서 잠을 청하는 망극한 일을 저지르겠사옵니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저께 자네 동기가 장가를 갔다며?"

"예. 전하. 저와 함께 출사하여 같이 예문관 검열로 있던 심재호가 그저께 장가를 들었사옵니다."

"심재호라……. 아~! 과인이 강녕전에 사초를 쓰러오는 것인지 세수를 하러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 사람 말이군……. 신부는 이쁘던가?"

유성룡은 졸려서 죽겠는데도 균의 수다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잠시 후 균은 한참을 일하다가 그들이 다시 잠들만 하면 깨우고 잠들만 하면 깨우는 일들을 반복했다. 제 딴에는 자기는 잠도 못 이루고 힘들게 일하는데 제 신하라는 자들은 다 졸고 있으니 심술이 생겨서 그런 것이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지밀상궁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밤에 동부승지 영감과 상선 영감 그리고 검열 나으리가 모두 모두 강녕전으로 불려가서는 졸면 깨우고 또 졸면 또 깨우고, 이렇게 새벽까지 고초를 당했다고 지밀상궁들에게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세상에. 우리는 전하께서 정아공주마마를 잘 돌보아 주시기에 상냥하고 어진 분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니야. 지밀상궁들이 그러는 데 요즘 특히 잘 그런데. 꼭 증상이 너희들이 가끔씩 보이는 증상 있지? 그것이랑 비슷하데."

"뭐? 전하께서 생리를?"

"너 미쳤니? 남자인 전하께서 어떻게 달거리를 하시니? 그것 말고 그것 있잖아. 밤에 잠이 안 오면 이상하게 신경질 나는 것. 그것이랑 비슷하게 보인데."

"어머머……. 세상에……."

궁녀들의 입을 통해 곧 경복궁에는 균이 노총각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유성룡에게 한 말이 씨가 되면서 그 소문은 급속히 번져서 왕대비 박씨와 대비 심씨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며칠 후부터 균의 식단이 크게 바뀌었다. 강장식품으로 도배된 수라상 앞에서 균이 수저를 들고 부르르 떨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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