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228)

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유성룡은 오늘 퇴궐한 후에 스승인 이황을 찾아뵙기로 마음먹었다. 궁내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무척 위험한 일이기에 사람들이 많은 궁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균이 있는 것을 보니 유성룡은 마치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불안했다.

"유 검열. 어디 아픈가?"

"아니옵니다. 전하."

"안색이 좋지 않고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몸이나 마음에 문제가 있는 듯한데……. 정말 문제가 없는가?"

"예. 전하."

균의 날카로운 지적에 유성룡은 가슴이 다 떨려왔다. 유성룡은 속으로 균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다행히도 균은 그런 유성룡의 속마음을 모르는 듯 어제 처리하지 못한 상소문을 다시 안겨주었다. 덕분에 유성룡은 무척 바빴지만 잠시나마 근심을 덜 수 있었다.

오늘도 균 덕분에 유성룡의 하루는 바쁘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균 덕분에 칼 퇴근을 한 그는 바로 제 스승인 이황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황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스……스승님."

"허허허. 너는 너무 걱정이 많구나.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은 단 한가지이다. 옛말에 군자대로행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명심하고 몸가짐을 바로하며 입을 함부로 열지 말거라."

군자대로행은 군자는 크고 바른 길로만 다닌다는 뜻이다. 물론 좋은 뜻의 말이기는 하지만 유성룡이 원하는 해답과는 거리가 멀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이황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황은 제가 할 말을 끝났다는 듯 허리가 쑤신다는 말과 함께 축객령을 내렸다. 그래서 유성룡은 그만 그 방을 나와야 했다.

유성룡을 내보낸 이황은 홀로 앉아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제자에게 자세히는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이황도 어렴풋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이황은 대학자 답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 그 제자들의 제자들과 그들이 아는 사람들을 합치면 거의 하나의 세력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그가 이끄는 영남학파는 주로 경상도 일대의 양반들이 많은데 꼭 경상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상도보다는 못해도 다른 지방에도 이황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고 특히 그의 학문이 융통성이 있다보니 전국적으로 폭 넒은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정보기관을 가진 균만큼은 못해도 적지 않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성룡이를 타일러 보내기는 했지만 그 말이 틀린 것은 없다. 지금 충청도 일대의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하는 사실이고 유독 전하께서만 모르시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 하지만 이미 올 봄 군사개혁 때부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전하께서는 천하를 속이고 있다는 말이니…….'

여기까지 생각한 이황은 균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야심가들을 골라내서 치려고 예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좋지만 반란이란 양날의 검이다. 잘 되면 좋지만 자신이 당하지 마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황은 영특한 균이 왜 그런 위험한 선택을 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아무리 일가를 이룬 대 유학자라도 균의 측근들도 모르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전하. 향약은 그 옛날 송의 대성현인 주자가 만든 것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아름다운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시어 전국에 향약을 시행하라 명해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불가하다. 어찌 전례에도 없는 해괴한 풍습을 시행하려 하는가?"

다음 날, 경복궁 사정전에서는 일반적인 조회답지 않은 격렬한 토의가 이어졌다. 원래 조회는 아침에 하는 회의기는 했지만 그 참가인원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된 토의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경연에서 세부적인 토의를 하고 조회에서 대략적인 토의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은 명망 높은 대신들에게 치어 경연에 낄 자격을 얻지 못한 김진기가 조회에서 균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서면서 격렬한 조회가 생긴 것이다. 이번 일의 발단은 다음과 같았다. 사간원의 헌납으로 있던 예양이 균에게 전국에 향약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균은 대번에 거절했다.

하지만 이를 김진기가 알고 좋은 기회이라고 판단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하여 오늘 조회에서 다시 건의한 것이다. 이번 일은 이미 균이 단호하게 거절하여 자신의 뜻을 확실히 보였다. 그래서 균은 무척이나 불쾌했는지 전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거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겨우 기회를 잡은 김진기들이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고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하오나 전하. 향약은 이미 중종대왕 때부터 논의가 된 전례가 있사옵니다. 전례가 없다고 하심은 잘못된 것이옵니다."

"그때 조광조의 말을 들어 향약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그 폐해가 지목되어 결국 폐지가 된 일이다.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은 일이 전례라고 할 수 없다."

"송구하오나. 그때의 신하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무리들이라 선대왕의 눈을 가려 향약의 실행을 막은 것이옵니다. 향약이 시행되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지금처럼 그냥 방치한다면 백성들은 짐승이 되어 문명대국 조선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 것이옵니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태조께서 조선을 세우신지 벌써 170년이 지났지만 향약이 없이도 백성들은 잘 살았다. 그런데 왜 그런 규약을 함부로 만들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려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향약이란 각 지방의 일을 그 지방 사람들이 알아서 자체적으로 처리를 하는 일종의 지방자치라고 알고 있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여 중앙에서 지방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던 조선시대에 분명히 많은 장점이 있는 일인데 왜 균이 강력히 거절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그 주체가 양반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향약의 시행은 각 정파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향약의 이전에도 유향소, 경재소 같은 양반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것의 실권을 대부분 훈구파 계열의 양반들이 쥐고 있었다. 이에 새로 등장한 사림파는 새로이 향약의 시행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훈구파의 유향소를 대신하여 자신들이 향촌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들의 명분이야 어리석은 백성들을 자신들이 잘 이끌어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향촌지배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고 균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실제로 조선의 풍습이 전기와 후기가 크게 다른데 이것이 17세기 향약의 전국적인 시행이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향약은 자체적으로 처벌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말 안 듣는 평민들을 양반들이 향약을 내세워 임의대로 처벌했기 때문이다. 같은 죄를 지어도 양반들은 고작해야 근신을 시키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매질이 가해지는 등 자신들 마음대로 처벌권을 남발했다. 이렇게 지방의 권력을 양반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향약의 본질이니 균이 결사반대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은 도를 지나쳐 변방의 풍습은 해괴하기 이를 때가 없사옵니다. 예를 들면 진도 같은 섬 지방에서는 아내를 얻기 위해 칼을 들고 여자의 집에 쳐들어가는 풍속이 있었고 북방의 평안도와 함경도의 백성들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여진족에 가까울 정도로 그 성품이 사납고 풍속이 어지러워 시급히 교화가 필요하옵니다."

"그것은 변방의 특수한 일일 뿐이다. 과인이 사가에 있을 때 진도보다도 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비금도에 있었지만 그런 참람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 그런 일들이 일반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몇 마리 되지도 않은 빈대와 벼룩을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우자는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

"하오나 전하. 그렇게 일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성부와 조선 팔도 모두를 다 살펴보고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옵니다."

"과인이 사가에 있을 때 한성부와 비금도를 오가면서 많은 것을 보았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육로로 한성부와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를 다 살피어 보았는데 과인이 그런 제반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그때 과인이 본 것이라고는 다른 자들에게 수확을 다 빼앗기고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본 기억밖에 없도다."

원래 균은 처음에는 그렇게 강하게는 공격하지 않다가 상대가 실수를 하면 그때부터 밀어붙이는 스타일을 구사하는데 오늘은 날씨가 더워서 신경질이 올랐는지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래서 바로 방금 전처럼 양반지주들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인데 그나마 다른 자들이라고 돌려서 말해서 그렇지 아니면 삼사에서 난리를 칠 사안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균이 화를 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김진기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부여 일대에서 김진기의 영향력은 커서 향약이 시행되어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은 없다. 하지만 향약의 시행은 양반들 중 상당수의 이익이 달린 문제이니 왕이 화를 내면 낼수록 유사시 자신을 따를 양반들은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균은 그런 김진기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화를 냈다. 원래 왕은 정 2품 이상의 대감들에게는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대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대상이 영감인 정 3품 병조참의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할아버지뻘이고 명망 높은 대신들 앞에서 화를 내는 모습은 균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대들은 백성들의 인륜이 무너지고 풍속이 어그러져 향약을 실시하여 이를 교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본시 백성들의 성품이 난폭해지는 것에는 그런 한 가지 이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살림살이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되었으니 백성들에게 공맹의 도리를 가르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또한 이미 지방의 양반들 중에서 남의 모범이 될만한 자들은 유향소에 모여 지방관들을 도와 그 지방의 일을 하고 있고 과인이 파견한 지방관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은데 다시 향약을 시행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하오나 전하. 신 병조참의 김진기가 진심으로 충정어린 마음으로 간곡히 간하옵니다. 태조대왕께오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심은 바로 고려말기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을 위하신 대왕의 고귀한 뜻 때문이옵니다. 그러나……."

"전하. 오늘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그만 조회를 파하시는 것이 어떠하시겠사옵니까?"

두 사람의 말이 너무 빨라지고 억양이 거칠어지자 지를 지켜보던 예조판서 이황이 즉시 중재에 나섰다. 마침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느라 조회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균의 오전일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 이황의 의견에 많은 신하들이 동조했다. 그래서 당사자인 균과 김진기도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예조판서의 말대로 과인이 할 일이 많으니 더 이상 불필요한 논의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오늘 조회는 이만 파할 것이니 모두 소속 관청으로 돌아가서 과인에게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시오."

"예. 전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결국 김진기는 균을 본격적으로 물고 늘어져 자신의 인지도를 올리려고 했지만 시간부족으로 자신이 원한만큼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균이 이름난 대신들 앞에서 함부로 화를 내어 상당한 신망을 잃었을 것으로 생각되었고 자신과 함께 향약시행을 요청한 신료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부족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상참의 다음에 균이 하는 일과는 조계와 윤대 등 조정의 각 부서에서 보고를 받는 일이다. 이것으로 국왕의 공식적인 오전 일과가 끝나는 데 오늘은 상참이 길어져서 그런 일과를 빨리 시행해야 했다. 그래서 균은 또 상소문을 사관들에게 떠넘기려고 핑계꺼리를 찾고 있었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이황이 독대를 청해온 것이다.

"전하. 신 예조판서 이황이 독대를 청하나이다."

"알겠소. 사관은 그만 나가보라."

"예. 전하."

원래 사관은 국왕의 모든 부분을 감시한다. 하지만 사관이 국왕과 함께 있는 시간은 시대마다 다 다른데 중종 때는 여자사관을 두어 왕의 사생활까지 모두 기록하자는 말이 나와서 중종이 진땀을 뺐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 일을 논의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사관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모든 원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나라 일을 논의하면서도 사관을 합법적으로 내보낼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독대라고 해서 밖으로 알려지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사관의 입석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균은 떠나가는 일꾼들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이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예판대감. 무슨 일로 과인에게 독대를 청하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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