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삼려의 난
"신 예조판서 이황 삼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신이 독대를 청한 이유는 아까 조회 때 있던 일 때문이옵니다. 무릇 군주란 나라의 중심이니 그 행동이 무거워야 하고 웬만한 일이 있어도 함부로 흔들려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군주로써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하셨사옵니다."
"예판께서 과인이 노여움을 보인 것을 탓하시는 게구려."
"그러하옵니다. 전하. 비록 병조참의가 전하의 어의에 거슬리는 발언을 했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동감하는 신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함부로 노여움을 보이시는 것은 전하의 어의를 이루는데 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부디 이 노신의 말을 귀찮다고 하지 마시고 귀담아 들어주시옵소서."
원래 국왕의 노여움을 번개에 비유하여 '천노(하늘의 노여움)'라고 표현을 한다. 아무리 힘이 없는 왕이라고 해도 왕은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고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런 왕이 화를 낸다면 웬만한 세력가가 아니고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중앙정계를 잘 통제하고 있는 왕이라면 말 그대로 벼락과도 같은 것이다.
왕이 그렇게 노여움을 보이고 일을 추진한다면 신하들의 반대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신하들도 사람이니만큼 왕에게 불만이 생길 수 있으니 왕은 화를 낼 때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적당하게 낼 필요가 있는데 누가 보아도 균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이황은 경험이 많은 노대신으로써 경험이 부족한 젊은 왕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황의 말을 들은 균은 오히려 웃어버렸다.
"하하하. 예판께서 과인을 너무 시험하시는 것 아니시오?"
"……."
"정말 모르신다는 말이오? 예판이라면 과인이 왜 노여움을 보였는지 알 것이라고 생각했소만……."
"다른 뜻이 있으셨사옵니까?"
"과인의 나이 이제 고작 17살이오. 과인이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청춘을 바친 노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노여움을 보인다면 그것은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소? 거기다 일국의 왕인 과인이 고작 정 3품관 하나와 실랑이를 벌여서 득이 될 것이 뭐가 있겠소?"
균의 말을 들은 이황은 속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황은 원래부터 인물평가를 잘 하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다. 중종, 인종, 명종 세 명의 왕을 모시면서 관직생활을 했고 학문에 일가를 이루어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으니 그 경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이황이지만 균을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이황은 왜 균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자신도 대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믿고 있다가는 균에게 한방 먹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는 조용히 균의 속마음을 떠보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상책이었기에 이황은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균의 속마음을 알아내려 애를 썼다.
"전하 미거한 소신이 우둔하기까지 하여 전하의 깊은 뜻을 잘 알지 못하겠나이다."
"예판. 진정으로 모르신다는 말이오? 이미 과인이 언질을 주었지 않소?"
"……."
이황은 말문이 다 막혔다. 이황은 예조판서이자 경연관의 직책을 맡고 있기에 조정신료 중에서도 균과 보내는 시간이 무척 긴 사람이다. 물론 그의 제자인 유성룡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주요대신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노망은 들지 않았으니 균이 언질을 해주지 않은 것이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예판. 아직도 모르시겠소?"
"예. 전하."
"과인이 부족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과인의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오."
"!!!"
균의 말에 이황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앙군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다고 이황에게 알려진 것이 균의 안배라는 말이었다. 북한산성은 산성증축공사를 핑계로 비밀리에 무기개발과 군사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훈련받고 있는 군인을, 그것도 훈련시간이 부족해 무리한 훈련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휴가를 주기는 힘들다.
거기다 군사훈련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지면 누가 보아도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경우 애써 쳐둔 균의 대규모 함정은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이 휴가를 받아서 유성룡의 집을 방문한 것부터 유성룡에게 겁을 주어 함부로 발설하지 않게 한 것도 다 계산된 일이라는 말이 된다.
척보기에는 그냥 균이 이황에게 직접 말해주면 편할 것을 왜 돌려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균에 행동에 담긴 의미는 간단하다. 모든 일은 다 내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걱정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였다. 균이 열심히 반란군을 소탕할 함정을 파두었는데 기호사림들과도 사이가 좋은 이황이 중재를 하겠다고 개입하여 함정을 무너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자세한 사실을 전하기 힘드니 지금 여기서 알려드리리다. 과인은 충청도에서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거기로 해산된 병사들이 많이 흘러 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소. 그래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기대하고 있소."
"하오나 전하. 반란은 너무 위험하옵니다."
"과인의 생각이 그렇게 짧지는 않소. 그건 이제 예판께서도 잘 아실 것이오. 그렇지 않소?"
"하지만 전하."
"나도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소. 하지만 쌀밥을 먹던 사람에게 보리밥을 먹으라고 하면 가만히 있겠소? 그럴 바에는 짧고 빠르게 끝내는 편이 낫지 않겠소. 거기다 과인은 무모하게 모든 양반들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들은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자들은 먼저 찾아내서 제거를 하자는 것뿐이오. 그런 자들이 있으면 오히려 피가 많이 흐르게 될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황을 대동하고 경복궁의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은 원래 국사를 돌보느라 지친 왕의 휴식공간이다. 균도 후원을 자주 찾고는 했는데 정확히는 취로정에 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취로정에 가지 않고 후원을 천천히 활보했다.
"예판께서는 우리 조선이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그야 바른 정치를 통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예판께서는 바른 정치만으로 백성들이 편안해 질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
이황은 균의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치가 백성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들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지방의 양반지주들이다. 중앙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고 떠들어봐야 그들이 집단으로 거부하면 시행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이황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특히 왕조의 유지기간이 길고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흘린 피가 적었다. 덕분에 지금 유력한 집안의 경우 고려시대 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명문들이 많았고 어떤 가문들은 그 지역의 인심을 사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 비해서 유난히 신권이 강한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그러다보니 왕권이 신권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여 여러 가지 개혁에 제동이 걸렸다. 예를 들면 균의 수미법은 원래 조광조가 시행을 하려고 했었고 이이, 유성룡 같은 사람들도 그 시행을 건의했다. 하지만 그런 수미법 즉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이 된 것은 조광조의 최초 시도이후 이백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다.
"이미 조정에는 예판대감을 비롯하여 명망 높고 유능한 대신들이 많이 있소. 하지만 과인은 그렇다고 해서 조정의 명령이 전국방방곡곡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아마 예판대감도 같은 생각일 것이오."
여기까지 말을 한 균은 잠시 주저앉아서 이름모를 들꽃 하나를 땄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이황에게 말했다.
"과인은 이 나라 만 백성들의 아버지이오. 그런 과인에게는 여러 명의 자식이 있는데 양반이라는 아이가 말을 듣지 않소. 거기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세다고 다른 아이들의 간식을 빼앗아 먹기까지 하오. 이런 아이가 내 귀여운 자식이라고 오냐오냐 한다면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아니옵니다. 전하."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먼저 타이르고 그다음에는 회초리를 들어 엄히 다스리는 것이 아비된 자의 도리이오. 그리고 이왕 버릇을 고치기로 했다면 조금이라고 어렸을 때 고쳐야지 덜 때릴 수 있지 않겠소?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종아리에 멍든 것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아픈 법이오. 과인의 뜻을 아시겠소?"
"예. 전하."
균은 고뇌에 찬 젊은 왕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면서 연기를 했다. 옆에서 보던 대전내관 정성우가 평소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진귀한 장면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균은 그런 것에는 상관없이 이황에게 이번 일의 당위성을 말과 행동으로 강조했다. 그렇게 이황을 납득시킨 균은 그만 그를 돌려보냈다.
'이 정도면 명나라의 간섭과 다른 신료들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 이제 군비를 증가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초기에 반역자들을 소탕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해야 한다.'
이로써 균은 장거정에게 편지를 보내서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고 기호사림과 가장 친한 세력인 이황의 영남학파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조식의 남명학파나 홍섬의 훈구파는 충청도의 기호사림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기호사림들은 우호세력이 하나도 없게 되었고 균은 명나라의 개입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사전에 예방했다.
"깡~! 깡~! 깡~!"
그다지 크지 않은 대장간 안에 무엇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한 사내가 봉을 하나 두들기고 있었다. 한참을 두드리던 사내는 한 손에 그 봉을 들었다. 봉의 안쪽에는 또 작은 봉이 하나 있었는데 그 봉을 꺼내자 원래의 봉은 마치 총신과도 같이 중간에 긴 구멍이 뚤린 모습이 되었다.
사내는 그 봉은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원래 총신은 반듯해야 한다. 아니면 총알이 총신에 걸려서 총이 터지거나 발사불량이 생길 수가 있다. 그래서 사내는 꼼꼼히 총신을 살핀 후에야 만족을 했는지 그 총신에 강선을 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말을 거창하지만 강선을 파는 것은 약간의 도구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것이다.
그렇게 강선을 판 후 후미를 막고 나무로 된 개머리판과 총좌와 총신을 결합하고 약간의 조치를 하면 하나의 총이 완성된다. 총이 완성되자 사내는 기쁜 듯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부르러 가는 듯 급히 대장간을 나섰다. 그 사내가 대장간을 나서자 북한산성의 전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내가 달려간 곳에는 병기주부 나원호가 화포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주부나으리. 완성했습니다. 완성했어요."
"왠 호들갑인가?"
"제가 드디어 수석총을 완성했습니다."
"수석총? 아! 부싯돌을 쓰는 총말이군. 어서 가지고 와보게."
"예. 주부나으리."
과연 사내가 가지고 온 총에는 전에 화승총에서 쓰던 화승격발장치를 대신해서 부싯돌과 철로 이루어진 격발장치가 존재했다. 철이라는 금속은 의외로 반응성이 높은데 여기에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꽃이 생긴다. 그런 철의 반응성과 부싯돌을 이용한 것이 수석총인데 화승총에 비해서 발사속도가 빠르고 우천시에도 사용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나중에는 화승총을 아예 대체해버린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수석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이고 그런 총이 보편화되는 것은 18세기 전후의 일이다. 따라서 약 백년은 앞서서 그런 수석총이 북한산성의 병기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중에 57식 북한산 소총이라는 이름을 붙인 수석총의 등장으로 조선군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무기체계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