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선조 [136 회]
삼려의 난
수석총이 완성되었다는 보고를 박규남에게서 들은 균은 오후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급히 병기창이 위치한 북한산성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북한산성의 병기창에 도착한 균은 기뻐하기는커녕 새로 만들어진 수석총을 보면서 신음소리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으음~!"
그리고는 계속해서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주변의 신하들과 일꾼들은 좀 못미더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균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했지만 아직 균의 평가가 끝난 것이 아니므로 그냥 기다려야 했다.
"사격실험 결과는 어떠한가?"
"예. 전하. 일다경(30분)동안 약 삼십여 발을 쏠 수 있었습니다."
"사격 후에 총신에 문제는 없었나?"
"예. 전하. 사격 후 여러 명의 장인들이 총을 분해해서 일일이 다 살펴보았사옵니다. 하지만 별 문제는 없어서 전하께 보고를 올린 것이옵니다."
균은 병기주부 나원호에게 새로 만들어진 수석총에 대해서 일일이 다 물어 보았다. 사실 균은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별로 못 미더웠다. 그래서 꼼꼼하다 못해서 집요할 정도로 따지고 자신이 총을 쏘아보는 등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 그런데 균이 그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총을 만드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철 제련기술이다. 탄환이 발사되면 총신과의 마찰력으로 엄청난 열이 발생하는데 총신이 잘 만들어져 있지 않으면 총신이 열에 녹아서 휘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총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기술을 총신제조 기술이고 좋은 총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총신의 원료인 철의 제련기술이 바탕이 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철 제련기술이 부족했다. 조선은 원래 금속 제련기술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이지만 그동안 과학기술 발달에 너무 게을리 했다. 그래서 현재 16세기 무렵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그렇게 앞선다고 평가를 하기 힘들었다. 그 예로 과학기술에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세종대왕의 경우도 이런 말을 남겼다.
'대개 공장(工匠)이란 것은 거의 다 천한 무리들이라, 비록 감장관(監掌官)이 엄하게 조사하여 단속하여도 반드시 틈을 타서 도둑질을 하여 간사하고 거짓됨을 금하기 어렵다.'
세종대왕이 이런 상황이니 다른 왕이 재위하고 있을 때 과학기술의 발달이 정체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소규모 전투가 아닌 전쟁이라도 있었다면 어느 정도 발달이 있었겠지만 조선은 너무 평화로운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화포를 만들 때 철을 쓰는 것은 위험했다.
물론 철로 화포를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청동을 써서 화포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화약을 많이 쓰는 대형화포의 경우에는 철로 만들다가는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화포들도 청동으로 만든 것이 많고 비교적 소구경인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의 경우에는 철로 주조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균이 병기창에서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을 개조하거나 생산하고 있는 이유도 비싼 청동으로 만든 대형화포보다 값싼 철로 만든 소형화포가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야전포라고 하면 이동하기 불편한 대형화포보다는 이동하기 편한 소형화포가 나으니 괜찮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철 제련기술의 부족은 총신을 만드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균이 부싯돌 격발장치의 기본개념을 알고 있었고 비공식적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으로 연구를 지원할 수 있어 격발장치의 개발은 빠르게 끝났지만 문제는 그 격발장치로 인한 빠른 발사속도에 총신이 버티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균은 비금도에 있을 때부터 당시 조선에서는 신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다마스커스 총신 제조법을 장인들에게 익히게 하고 철 제련기술의 발전에 중점을 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무리한 총의 개발보다는 관련기술을 점차적으로 개발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여러 해가 지나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나마 균은 그것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조선이 임진왜란 발발 1년 만에 왜군의 조총을 본 따서 화승총을 생산하기는 했지만 그 성능이 부족해서 인조 때 왜국으로부터 조총을 대규모로 수입하고 효종 때 표류한 서양인에게서 그 기술을 습득해야 했다.
그러니 수석총 정도라면 아무리 빨라야 1572년은 돼야지 생산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올해는 1568년이다. 균이 56식 소총을 개발한 것이 1562년 즉 6년 전의 일이니 아무리 균이 막대한 연구비를 투자한다고 해도 10년 정도는 걸리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균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음. 물론 내가 연구비라면 최우선적으로 지원해주었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나올 수가 있다니……. 설마 백과사전을 컨닝한 것은…….'
물론 백과사전에 철 제련기술 같은 것은 나와 있지도 않고 설사 나와 있더라도 조선시대 사람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백과사전을 읽기 위한 기반지식이 필요한데 이 시대에 균이 아니면 단어 뜻 찾기도 벅차다. 거기에 한글마저 틀려서 손에 쥐어주어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균의 의심과는 달리 수석총은 철저히 장인들의 노력이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균이 시험해본 결과 새로 만들어진 수석총은 수석총 중에서도 초기형에 가까웠다. 2조우선의 강선을 채택하여 명중률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서 유효사거리가 길어졌다. 그리고 격발장치의 발달로 발사속도가 빨라지고 화승총과는 달리 비가 와도 총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56식 소총에 비해서 57식 소총은 많은 발전을 보였다.
병사들이 56식 소총을 사격해서 적을 맞추어 사망하게 할 수 있는 사거리가 대략 100~150미터였는데 57식 소총을 사용하면 200미터가 넘는 거리에 있는 적도 맞추어 사망하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상도 가능해서 약 400미터의 표적을 맞추는 경우도 나왔지만 대략적으로 200미터정도의 표적까지는 잘 맞추었다.
또한 56식 소총은 300미터가 넘어가면 총알을 맞아도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57식은 400미터까지는 못해도 적에게 부상을 입혀 전투력을 상실하게 하였고 최대사거리는 둘 다 1킬로미터에 달했다. 종합적으로 비교해보면 유효사거리는 늘어나고 최대사거리는 비슷한데 이는 강선이 명중률을 증가시킨 덕분이었다.
발사속도 면에서도 56식이 대략 1~2분당 1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면 57식은 1분 이내로 단축되어 발사속도가 2배나 증가했다. 따라서 57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전에 비해서 같은 시간에 2배의 총알을 더 멀리 떨어진 적에게 쏟아 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균은 57식 소총의 완성을 확인하고 나서는 무척 좋아했다.
'후후후. 이제 우리 조선군이 세계최강의 총으로 무장을 하게 되었구나.'
하지만 균의 군대가 57식 소총으로 무장하기는 아직도 나중의 일이다. 지금 있는 소총은 고작해야 시제품에 불과하고 알게 모르게 문제가 많을 것이다. 그런 문제를 보완하고 대량생산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면 넉넉히 잡아서 몇 개월의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따라서 빠르면 내년 초쯤에나 생산이 시작되어 조선군이 57식 소총으로 무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기뻐하던 균은 그 뒤의 일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표정이 굳었다. 57식 소총으로 자신의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총을 개발한 장인들에 대한 포상이었다.
"나주부. 이 총을 개발한 자들은 누구인가?"
"예. 전하. 여기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총신을 만드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한명은 격발장치와 강선을 파는 물건을 만드는데 재주가 뛰어납니다."
"소인 유 아무개라 하옵니다."
"소인 신 아무개라 하옵니다."
"너희들의 이름은 무엇이냐?"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에게 이름이 지니는 가치는 큰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낮은 사람들은 높은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아무개'라고 자신을 낮추어 말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임금이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장장이들의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에 해당했다.
"……소인은 유재영이라 하옵니다."
"……소인은 신해영이라 하옵니다."
"이렇게 좋은 총을 만든다고 애를 많이 썼다. 과인이 너희들의 이름을 기억할 터이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너희들의 이름을 과인이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할지어다. 그리고 김주부는 이들에게 포상으로 쌀 백 섬씩 내리도록 하고 다른 자들에게도 그 공에 따라서 상을 충분히 하사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두 사람은 임금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말한다는 생각에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균은 앞으로 더 지켜보겠다는 말로 격려를 하고 충분한 포상을 내렸다. 그리고 다른 장인들에게도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포상을 내려 병기주부 나원호 이하 수백 명이나 되는 병기창의 장인들을 기쁘게 했다. 하지만 얼굴이 파랗게 질린 사람도 있었다.
"전하. 이번에 병기창의 여러 장인들에게 내려야 할 상급이 무려 쌀 1만 섬(5만 냥)이나 되옵니다. 소신이 그들이 세운 공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이번에는 좀 과하신 듯 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한 일은 그 이상이 가치가 있다. 그대로 시행하라."
"하오나 전하. 이미 전하께서 친히 그들을 격려하시었사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영광스러워 상급을 받으나 받지 않으나 별 차이가 없이 열심히 일할 것이옵니다."
김호진의 말대로 이번에 균이 내린 상급은 균이 생각해도 많았다. 거기다 균이 친히 병기창에 왕림한 모습을 본 것 만해도 그들에게는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은 기억이 될 것이며 직접 이야기를 나눈 이들은 평생을 자랑스러워 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균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과인은 공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충분한 상을 내렸고 죄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가혹한 벌을 내렸다. 군주란 신상필벌이 명확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신하들과 백성들이 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니라. 이런 과인의 뜻은 변함이 없으니 김주부는 과인의 뜻을 따르라."
"예. 전하."
이렇듯 균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었고 이것은 부하들이 일을 하는 데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김호진의 말대로 지출되는 돈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부하들이 열심히 일하여 이번처럼 균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57식 소총이 개발되자 균은 무기조달계획도 세부적으로 세워야 했다. 기존의 56식 소총은 비금도에 있는 병기창에서 생산되었는데 하루에 2~3정을 생산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6년 동안 약 5천정의 소총이 생산되었는데 이중 2천정이 시마즈로 수출되고 조선군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3천정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조선중앙군의 총수는 약 1만 6천명. 지방군까지 합치면 아무리 못해도 10만은 될 것이라고 예상이 되니 조선군에 소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가 그나마 보유한 3천정의 소총도 57식 소총의 개발로 구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조선군에게 당장 필요한 소총의 수만 거의 10만정이었다.
이에 균은 57식 소총을 생산하는 시설을 북한산성의 병기창에 만들기로 했다. 목표는 하루에 소총 삼십 정을 생산하는 시설을 갖춘다는 것인데 이 경우 1년에 대략 1만정의 소총이 생산되기에 조선군 전체에 충분한 양의 소총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렇게 되면 벌써 구식이 되버린 56식 소총은 전량 시마즈로 수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균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내년 초에는 북한산성의 병기창에서 57식 북한산 소총을 생산해 조선군을 무장시키는데 사용하고 비금도의 병기창에서는 56식 비금도 소총을 그대로 생산해 시마즈군을 무장시키는데 사용하게 된다. 그러면 점차 조선과 왜국 두 나라의 군사력의 차이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역전하게 된다.
'당장은 조선의 군사력은 시마즈를 상대하기에도 벅차다. 하지만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조선의 군사력과 왜국 전체의 군사력은 비슷할 것이고 20년 후라면 조선의 군사력이 왜국을 압도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없을 것이고 역사는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균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있는 서류에 결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웃음을 보는 승지들과 사관들은 얼굴빛이 하애졌다. 그들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균이 웃음을 지을 때마다 일거리가 늘어났기 때문에 균의 웃음은 그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